23화. 알지 못했던 이야기2021.09.18.
펠리어트는 문틀을 한 손으로 짚은 채, 건조한 시선으로 나와 사무관을 잠시간 말없이 훑었다. 차가운 표정으로도 가릴 수 없는 수려한 이목구비가 오늘따라 더욱 빛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당황한 나머지 소리 없이 눈동자만 굴렸다. 호, 혹시 방금 욕한 거 들었나? ……역시 다 들은 것 같지? 아니, 그게 지금 문제가 아니라! 나는 다급해져 홱 사무관을 바라보았다.
‘안 온다며! 오늘 분명 안 온다고 했잖아요……!’
내 무언의 항의를 눈치챘는지, 사무관이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격렬한 몸짓을 보니 아무래도 그 역시 모르고 있던 일인 모양이다.
“공작님……!”
안 되겠다 싶었는지 사무관이 벌떡 일어나 나와 펠리어트 사이를 가로막았다.
“가, 갑자기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시면…….”
“안 되나?”
사무관을 향해 반쯤 고개를 돌린 펠리어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음엔 방문 약속을 미리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국 기세에 잔뜩 눌린 사무관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황당해서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니, 저기요! 그렇게 겁을 먹어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마음 같아선 이대로 줄행랑을 치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혼인 무효 결과를 문제없이 잘 전달받았다는 확인서에 아직 사인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인부터 후딱 해치우고 가 버릴걸. 그러면 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짙은 후회가 차올랐다. 그사이 펠리어트가 사무관을 가볍게 제치고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의자 등받이를 손으로 꾸욱 누른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계속해, 로렐라.”
어서 사인하라는 건지, 아니면 방금 하던 뒷담화를 계속해 보라는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덕분에 더욱 오기가 생겼다. 그래, 여긴 황궁 아닌가. 제국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지닌 기관. 그런 곳에서 혼인 무효를 직접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상황이다. 그러니 겁낼 필요가 전혀 없지. 나는 눈썹을 위로 치켜뜬 채 눈앞에 놓인 서류에 보란 듯이 내 이름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그럼…… 전부 마무리되었습니다.”
사무관은 후다닥 다가와서 내가 넘긴 서류를 품에 꼭 안고 정중히 문을 열었다. 다급한 몸짓을 보니 이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뿐인 듯했지만, 그는 용케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공작님, 오늘부로 로렐라 메이레드 영애께서는 체임버스 공작 가문과는 무관한 분입니다. 그 점을 꼭…… 주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 펠리어트는 입꼬리 한쪽을 위로 한껏 끌어 올릴 뿐이었다. 마치 기분 나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그러고는 차분하게 팔짱을 낀 채 내게 말을 건넸다.
“마지막으로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는 건 아니겠지.”
“뭐……?”
“고, 공작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곁에 있던 사무관 역시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불렀다.
“가문과 유관한 사람하고만 차를 마셔야 한다는 법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괜찮지 않나?”
그때였다.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주식을 1000주 구매합니다.」 「펠리어트 아메리카노에 헤이즐넛 시럽 넣으면 사형.」 어김없이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그러나 나는 황급히 창을 꺼 버렸다. 지금 그런 분위기 아니라고!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시스템 화면을 보고 났더니, 내 안의 생존 본능이 자연스럽게 꿈틀거렸다. 마치 오랜만에 경마장을 찾은 ‘꾼’처럼 몸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생각을 해 보면, 지금이 주식을 팔 절호의 기회이지 않을까? 그동안 현생을 챙기느라 주식에 조금 소홀하긴 했었지. 게다가 황궁 안에서라면, 그와 차 한 잔쯤 마셔도 별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펠리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시지 못할 것도 없지.”
사무관의 휘둥그레한 두 눈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하지 않고 생긋 미소 지었다.
“단, 30분만이야.”
제법 단호한 제약에도 펠리어트는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30분만 팔고 빠지자. 딱 30분만……! * * * 사무관은 우리를 안쪽에 따로 마련된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아까 있었던 사무실도 참 고급스러웠는데, 이곳은 그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호화찬란했다. ……심지어 어딘가 모르게 로맨틱한 느낌마저 들었다. 붉은색 소파와 흰색 레이스가 깔려 있는 티 테이블. 그 위에 올려진 화병에는 핑크색 장미 한 다발이 풍성하게 꽂혀 있었다. 설마…… 재결합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다소 불쾌한 오해였지만, 진짜로 사무관이 그렇게 생각했느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주식만 팔면 그만이니까. 근데 그러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을까? 다짐한 것까진 좋았는데, 상황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기에 고민이 되었다. 백작저에서 그랬던 것처럼 억지로 눈물 콧물을 찍어 내며 ‘당신 곁이 싫은 게 아닐지도…….’ 같은 오그라드는 멘트를 날릴 수는 없었다. 혼인 무효를 증명하는 서류에 시원하게 사인까지 한 마당에 어설픈 연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게다가 펠리어트에게 괜한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다. 그가 비록 재수 없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니까……. 하지만 집착광공을 먹어 대는 괴식성을 지니신 선생님들께서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계실지도 모르는데, 정말로 차만 홀짝이다가 일어나는 것도 안 될 말이다. 한참을 끙끙대고 있는데,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테이블에 올려진 찻잔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차를 마시자고 한 걸까.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가 그의 제의를 수락한 건 명확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펠리어트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꼿꼿한 석상처럼 등을 쫙 펴고 앉은 채 오로지 앞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맞은편에 앉은 펠리어트의 모습을 싫어도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다소 거만하게 소파에 기대어 팔걸이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었다. 손등엔 베인 듯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희고 고운 피부 때문에 가끔 잊게 되는데, 이렇게 보니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내 전장에서 싸우던 사람이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평소보다 힘주어 넘긴 듯한 머리는 한 올 흐트러짐이 없었다. 검은색 실크 셔츠는 유달리 흰 그의 피부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고, 몸에 딱 맞게 재단된 검은색 베스트 또한 탄탄한 가슴과 넓은 어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진주 단추가 달린 재킷 위로는 자세히 보아야만 눈치챌 수 있는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다.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자세히 보니 은근히 옷차림에 꽤 신경 쓰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이따가 황궁에라도 가는 건가.’
아, 여기가 황궁이지 참.
“……로렐라.”
그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드니,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영롱한 검은색 눈동자에는 마치 밤하늘이 그대로 담긴 듯했다. 왠지 모를 어둠이 서려 있으면서도, 그윽한 눈빛에 정신이 팔리지 않도록 노력하던 그때였다.
“당신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어.”
특유의 서느런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이런 얘기를 꺼낼 줄은 예상도 못 했던 탓이었다.
“얼굴색을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군.”
당신이 날 쫓아다니는 걸 멈춰 준 덕분이라고 쏘아붙일까 하다가 참았다. 괜한 이야기로 싸움의 불씨를 먼저 제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업에 그 정도로 소질이 있었다니, 예전엔 미처 몰랐어.”
“뭐?”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전혀 예상치 못한 화제가 돌아왔다. 나는 빠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건 대체 어떻게 알았지?
“……하아.”
절로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방금 한 생각은 철회해야겠다. 날 쫓아다니지 않은 게 아니라, 날 쫓아다니는 걸 들키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으니까.
“제법 잘되고 있는 것 같더군. 대단해.”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펠리어트는 평소와 똑같은, 아무런 고저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어투로 칭찬을 건넸다.
“뭐, 그거야…… 보통이지.”
이런 얘길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순간 머쓱해져 괜한 허세를 부리며 답했다.
“내게 말했더라면 도와줬을 텐데. 나중에라도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지 이야기해.”
“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워낙 잘되고 있어서 말이지.”
퉁명스럽게 대꾸한 것도 잠시, 나는 눈썹을 치켜올려 그를 쏘아보았다. 타이밍을 놓쳐 바로 말하지 못했지만,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까 사무관도 이야기했듯, 나랑 당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런 짓은 그만둬.”
“그런 짓이라니?”
“자꾸 사람 뒷조사하는 거 말이야! 당하는 사람한텐 얼마나 불쾌한 일인지 알아?”
펠리어트는 눈을 천천히 한 번 깜빡이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적 없어.”
“거짓말. 그럼 내 사업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수하 중에 아우레아 출신이 한 명 있어서.”
“뭐……?”
“여동생이 그곳 단골이라더군. 함께 가게에 간 적도 있다던데.”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쳤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과 말투, 눈동자 그 어디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 그, 그래?”
덕분에 나는 진짜로 머쓱해지고 말았다. 민망해서 얼굴까지 화끈거리는 듯했다.
“설마 내가 쭉 당신 뒤를 캐고 다닌다고 의심했던 건가?”
“마, 말을 헷갈리게 하니까 그렇지! 부연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그렇게 말하면 누구나 나처럼 생각할걸?”
무안한 마음에 괜히 그에게 책임을 전가시켰다. 거의 생떼나 다름없는데도 펠리어트는 별다른 말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내가 말을 잘하는 재주만큼은 갖고 있질 않아서.”
“뭐?”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그럼 그거 빼고는 완벽하다는 거야?”
“그렇지 않나?”
“뭐래.”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방금보다 훨씬 더 큰 소리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받아치는 모습을 보니,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틀림없었다. 근거 없는 미친 자신감은, 아무래도 북부공작에게 주어지는 기본 패치인가 봐.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계속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나, 그런 자화자찬은 나도 하겠다.”
그래서 괜한 핀잔을 주었던 건데, 순간 펠리어트의 입술 끝이 위를 향해 매끄럽게 올라간 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해 입술이 아래로 살짝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펠리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도 재주가 아주 많던걸. 사업 수완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예를 들면, 나를 미친놈으로 만드는 재주라든지.”
참나, 진짜 뭐래?
“잘 모르는 모양인데, 당신은 원래부터 돌은 놈이었거든?!”
“게다가 욕도 잘하고.”
“그것도 원래 그랬어. 당신이 몰랐던 것뿐이지. 사기 결혼이었다고 원망하기엔 이미 많이 늦은 거 알지?”
처음 마주한 그의 미소 때문일까. 갑자기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펠리어트와 마주 보고 앉아서 웃으며 대화를 하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가 전쟁터에서 돌아온 이후, 우리는 마주칠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으니까. 그를 미친놈, 또라이, 사이코라고 생각했었다. 꺼지라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고 심할 때는 혐오스럽게까지 느꼈다. 그런데 막상 차분한 자리에서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누니, 내가 알던 펠리어트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의외로 대화도 잘 통하고……. 어쩌면 우리가 더 이상 아무 관계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 사기 결혼은 맞지.”
그때, 소슬한 바람 같은 음성이 귓가를 나직하게 스쳐 지나갔다.
“2년간 단 하루도 함께 있던 적 없으니까.”
그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또다시 나와 펠리어트 사이에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왜일까.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도 익숙했던 침묵이 오늘은 오히려 불편하게 다가왔다.
“서, 서신이라도 주고받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괜히 허둥지둥하여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그대로 입에 담았다. 그러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펠리어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줄곧 침묵을 지키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저택으로 돌아가서 당신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어.”
“무슨 말……?”
“전쟁터에 나간 2년 동안 편지 한 통 없던 인간이, 이제 와서 무슨 대화냐고 했었지.”
“아, 그건…….”
내 말은 거의 동시에 말문을 연 펠리어트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나는 분명히 보냈어.”
그는 상체를 내게로 약간 기울인 채 곧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