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2021.09.15.
“……감사합니다, 손님.”
계산서를 내미는 내 손은 거센 태풍 속에 겨우 매달려 있는 나뭇잎처럼 바르르 떨렸다. 손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고 놓칠 뻔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손님들이 주문한 커피는 총 여섯 잔이었다. 중간에 레아와 교대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완수하지 못했을 임무였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처음 제대로 된 주문을 받았다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우리는 알쏭달쏭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텅 빈 가게에서 빈 잔을 정리하던 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로렐라 님은 짐작 가는 게 있으세요?”
“글쎄요…….”
하지만 나라고 딱히 이렇다 할 답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체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이 팔렸는지, 뭐 때문에 우리 커피가 좋았던 건지 물어도 손님들은 이유조차 말해 주지 않고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그저 좋았다는 대답뿐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다들 또 오시면 좋겠네요.”
어쩐지 들떠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도 팔 전체가 저릿할 정도로 쑤시지만, 팔이 떨어질 것 같아도 상관없으니 이렇게 계속 손님이 와 준다면 참 좋을 텐데.
‘팔리기만 한다면, 그깟 달고나 커피 하루에 100잔이 문제야?’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뇌며, 다짐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 * * 처음에 온 손님은 그다음 날에도 또 가게를 찾았다. 그 손님의 손님 또한 재방문해 주었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새로운 손님들을 데리고서. 주문은 모두 똑같았다. 얼음까지 띄운 차가운 우유에 연유를 듬뿍 넣은 달고나 커피.
“저기요, 제 주문은 아직 멀었나요? 두 잔 부탁드렸는데요.”
“제가 먼저 시킨 것 같은데, 언제쯤 나올까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앞에는 수많은 부인이 길게 장사진을 치고 있는 진풍경까지 생겨났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왜 떡상하는 건데? 이상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세상에, 여기서 뵙네요.”
“어머, 안녕하세요. 설마…… 부인도요?”
“……네에.”
손님들은 어쩌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한결같이 얼굴을 붉혔다. 심지어는 서로 눈이 마주칠세라 그저 위만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건 내가 말을 걸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게를 찾은 이유를 물어도 다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시선을 피하며 ‘커피를 마시려고요.’ 할 뿐이었다.
‘대체 뭐지?’
커피를 파는 곳이 여기만 있는 게 아닌데.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거다. 나는 저택의 하녀들을 총출동시켰다. 그걸로도 모자라 레아의 지인들부터, 심지어는 신전에서 안면을 튼 여사제까지. 그야말로 아는 사람들은 다 불러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덕분에 주방은 발 디딜 틈 없이 복작거렸지만,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어억.”
“흐읍……!”
그저 이런 처절한 신음만 간간이 새어 나올 뿐.
“끄으윽.”
한참 동안 거품기를 휘젓던 내 입에서도 이윽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동시에 상체가 앞으로 훅 고꾸라졌다. 낯선 세계에 빙의해서 가장 절실하게 바라 마지않는 것은 속도 빠른 인터넷도, 핸드폰도, TV도, 에어컨도 아니다. 바로 전동 거품기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맞은편에 앉아 울상으로 팔을 주무르던 조이가 깜짝 놀라 나를 잡아 주었다.
“저랑 교대해요, 네?”
“안 돼. 아직, 아직 40번을 더 채워야…….”
“제가 할게요……!”
조이는 비장하게 대답하고는 내 손에서 덥석 거품기를 빼앗아 갔다. 그러고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미친 듯이 손목을 돌리기 시작했다.
“로렐라 님…… 밖에, 지금 손님이…….”
그 옆에서 반 가사상태로 커피를 휘젓던 레아의 입에서도 띄엄띄엄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쯤 새로 온 손님이 늘어났을 테니 누군가는 나가 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미안한 마음 반, 이때다 싶은 마음 반으로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니, 아니나 다를까. 아까보다 배로 많은 손님이 몰려 있었다.
“여기요! 주문 좀요.”
“저도 추가로 두 잔 더 받을 수 있을까요?”
내가 나타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려왔다. 거의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살려 줘. 순간 진짜 비명을 지를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나는 감각 없는 팔을 억지로 움직여 모든 손님의 주문을 꼼꼼히 받아 적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보태기 위해 주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바로 첫날 온 그 손님이었다.
“저기, 손님! 잠시만요!”
나는 커피를 비우고 뒤돌아 나가려는 그녀를 부리나케 잡았다.
“어머, 안녕하세요.”
나를 보자마자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호호, 하고 웃었다.
“손님. 손님께서 제일 단골이시니까 죄송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왜 이렇게 저희 가게를 자주 찾으시는 건가요?”
그래. 팔이 떨어질 땐 떨어지더라도, 오늘만큼은 반드시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든 게 무엇 때문인지. 왜 커피 맛에 대해선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 건지를!
“커피가 특별해서 오시는 건가요?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 그게…….”
그녀는 다른 손님들이 그렇듯 이번에도 대답은 해 주지 않고 손가락을 꼼질대며 얼굴만 붉혔다. 그러나 나도 오늘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앞으로 계속 가게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 말에 손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 귓가에 슬쩍 입술을 가져다 댔다.
“사실…… 여기 숙변라떼가 지금 엄청 화제예요.”
“아, 네에. 네?!”
무, 무슨 라떼요?
“정식 이름은 그게 아닌 건 알지만, 누가 그렇게 부른 뒤로 모두가 따라 부르고 있죠.”
그러면서 그녀는 자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동안 어떤 방법을 써 봐도 소용없었는데, 숙변라떼만 쭉 들이켜고 나면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거 아니겠어요?”
“아니, 그 숙, 그런 이름이 아닌데…….”
“사실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도움받고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종종 들를게요.”
부인은 환한 웃음으로 감사 인사를 건네더니 몸을 돌려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차마…… 멀어지는 그녀를 다시 잡을 수 없었다. 그사이에도 손님들은 계속 찾아왔다. 모두가 내 앞에서 라떼 한 잔, 두 잔, 세 잔! 주문을 외쳤다. 그랬구나.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와 경쟁하듯 주문하고,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엔 조용히 얼굴만 붉히며 먼 하늘을 쳐다본 거였구나……. 열심히 주문을 처리하다 말고, 나는 문득 자리에 서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티 없이 새파란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후후, 그랬구나. ……숙변 라떼. 그 순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나도 명색이 여주인공 후보인데, 다른 것도 아니고 응응라떼라니! 세상에 그 어떤 여주도, 화장실 사정에 도움을 주는 무언가를 개발해서 팔지 않았다. 하물며 커피는 우아함과 고상함의 끝판 왕인데! 어떻게 나만 이래. 왜, 나만! 또다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 * * 다행스럽게도 마음의 상처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치료제는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돈이다.
“숙변라떼면 어떻고 관장라떼면 어때!”
돈이 이렇게 잘 벌리는데……! 아, 혹시 식사 도중이시라면 죄송합니다. 나는 습관처럼 띄워 놓은 시스템 창을 향해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다시 장부를 들여다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응응라떼 덕분에 늘어난 손님들은 이윽고 커피 외에 다른 것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치즈볼이라든가, 뚱카롱 같은. 덕분에 매출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때론 커피보다 다른 상품들이 먼저 매진될 때도 있었다. 크으, 이번에야말로 국뽕이 차오른다. 게다가 더 이상 커피를 100번 젓지 않기로 했는데도, 라떼는 여전히 잘 팔렸다. 왜냐하면 내 경험상 그 효과는 거품에서 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고백했을 때 주방에선 폭동이 일어날 뻔하긴 했지만……. 비록 주식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악플의 공격까지 받았었지만 그래도 내 두 손으로 성과를 냈다는 사실에 몹시 뿌듯했다. 다른 사람의 가게를 망하게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무일푼이었던 내게 많진 않지만 꾸준히 돈이 들어온다는 사실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니, 형편뿐만 아니라 숨통도 꽤 트였다. 레아가 싹싹하고 일 잘하는 직원을 두 명 채용한 덕분에, 나는 문제가 있거나 의논할 일이 생길 때나 가끔 가게에 얼굴을 비추기로 한 것이다.
“후후.”
오늘도 아침 느지막이 눈을 뜬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침대를 벗어나 커다란 옷장을 열었다. 텅 비어 있던 곳에 화려한 드레스와 구두들이 가득 열을 맞추고 있었다. 모두 조이의 성화에 못 이겨 마련한 것들이었다. 수익금이 들어오자마자, 조이는 나를 닦달하다시피 해 저택으로 디자이너들을 불렀다. 새 출발을 위해서라도, 단벌 숙녀 신세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 말이다.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기에, 우선은 드레스와 구두를 장만하는 데 꽤 큰돈을 썼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레어넌 단장님을 위한 작은 선물을 사서 감사의 편지를 함께 보냈다. 성대한 만찬을 몇 번이고 열어 고마움을 전해도 부족한 일이지만, 그러기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작지만 진심을 담은 성의 표시를 하고 싶었다. 내가 직접 번 돈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오늘은 무슨 드레스를 입을까, 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옷장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응, 들어와.”
대답하자마자 조이가 동글동글한 얼굴을 쏙 내밀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난리가 나는 갈색 곱슬머리와 너무나 선량한 잿빛 눈동자를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가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너도 잘 잤니?”
“네!”
조이는 만면에 함박웃음을 띤 채 침대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한데 어깨를 들썩거리는 것이 어쩐지 평소와는 좀 달라 보였다.
“왜 그래? 아침부터 무슨 일 있어?”
“이런 게 왔어요, 아가씨!”
그녀는 대답과 동시에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난생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봉투. 인장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온 거지?”
레어넌 단장님께 선물을 보낸 건 어제니까 벌써 답장이 올 리가 없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른 뒤집어 본 그때였다.
“헉……!”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이고,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드디어…… 드디어 왔구나!”
“네, 아가씨!”
조이도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바로, 황궁에서 온 서신이었다. 일전에 보낸 혼인 무효 진정서에 대한 답변이 틀림없었다.
* * * 서신이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나는 낯선 건물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황궁 입구 바로 옆에 붙은 이곳은, 여러 민원을 수리하는 것부터 시작해, 귀족 간의 각종 분쟁을 중재시켜 주는 사무실이 모인 곳이라고 했다. 역시 황궁의 부속 건물답게 으리으리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각종 화려한 장식은 물론이고, 내 앞에 놓인 책상과 의자조차도 웅장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질 좋은 홍차를 마시며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스렸다. 굳게 닫혀 있는 복도 쪽 문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오늘 펠리어트는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로렐라 님.”
그때 반대쪽 문이 열리고, 빳빳한 망토를 두른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미리 소개받은 황궁의 사무관이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급한 마음에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결과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떨리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네, 고지해 드린 대로 혼인 무효가 인정되었습니다. 이는 체임버스 가문에서 예전과 똑같은, 서로의 지장이 찍힌 혼약서를 제시하지 않는 이상 쭉 유효합니다.”
아싸! 드디어 이런 날이! 만세! 만만세! 나는 소리 내어 만세 삼창을 부르고 싶은 걸 억누르느라,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사무관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심정이신지 압니다. 사실 그래서 일부러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린 건데…… 받으셨던 1차 고지 외에도, 최종 결과 역시 서신으로 보내 드리고 있거든요.”
“아니에요. 중요한 일인데 직접 와야죠.”
그 사이코가 중간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거든요.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체임버스 공작 가문에도 똑같은 결과가 서신으로 갈 겁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하시길, 그쪽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고…….”
그는 아마도 이런 케이스를 많이 다뤄 본 듯, 굉장히 사려 깊고 또 세심했다.
“아마도 불복 의사를 내비친 거라 생각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효력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나, 그래요……?”
나는 짐짓 놀란 척 두 눈을 깜빡였다. ‘황궁의 결정에 불복하다니, 네가 뭔데!’라고 속으로 욕해 가면서.
“영애께서는 이제 자유입니다. 체임버스 가문에서는 더 이상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나름대로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이 말 앞에서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어깨를 마구 들썩이자 사무관이 씨익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속 시원하시겠군요.”
“시원하다마다요! 전 이제 북쪽으로는 머리도 안 둘 거예요.”
그동안 겪은 설움이 한순간에 씻은 듯 사라졌다. 이게 얼마나 끝내주는 기분인지,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아니! 아예 이 세상에 동쪽, 남쪽, 서쪽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으로 들뜬 목소리를 한껏 높인 그때였다.
“……그거 미안하게 됐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