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기대하고, 기다리고2021.09.04.
신경 쓰인다고? 심장이 한껏 뛰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어떻게든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다. 설마 아까 망토를 받아 들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게……. 아니, 아니야. 내 처지가 어떤지 알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펠리어트나 그의 수하를 또 마주친 건 아닌지 신경 쓰였단 소리겠지. 레어넌의 성정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어쩜 이렇게 사려 깊을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한동안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대답하려던 그때. 레어넌이 다시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푸른 하늘을 담은 듯한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담겼다.
“백작가에서조차 믿고 진심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어…….”
……하녀, 조이가 있긴 한데요. 그러나 얼굴이 확 달아올라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고 싶었지만, 마치 누가 깃털로 살짝살짝 건드리는 것처럼 목구멍 안쪽이 간지러웠다. 심장에서부터 퍼지는 홧홧한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까지 내달렸다. 그네는 여전히 기분 좋은 속도로 흔들렸다. 고요한 가운데, 그네가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기분 좋은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잠시간의 정적 끝에, 레어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한 이야기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그가 붉게 물든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마주 보던 시선이 사라지니 왜인지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큰 위로가 된 이야기였어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이군요.”
그제야 레어넌의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친 채 활짝 웃었다. 심장이 아까보다 훨씬 더 크게 콩닥거렸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격분에 휩싸여 로렐라 님의 주식을 500주 구매합니다.」 「키!쓰!갈!겨!제!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창이 요란해졌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멈추지 않고 또다시 700주를 추가 구매합니다.」 「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키갈!」 흡사 광기에 가까운 메시지였다. 한 번으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같은 메시지를 보내 왔다. 키스를 갈기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주먹을 쥐며 마음속으로 크게 외쳤다.
‘못 해! 못 한다고!’
차라리 레어넌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면 미친 척하고 돌진했을지도 몰랐다. 근데 나를 진심으로 위로해 준 사람을 그렇게 이용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지금은 나도 힘들어!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하지만 곧 흔들리는 그네처럼 내 마음도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못 하……나? 목숨이 달려 있는데? 한 번에 5만 주나 팔아 치우는 라이벌을 봤잖아. 그런데도 정말 못 할 이유가 있나? 복잡한 마음으로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는데, 순간 반짝하고 묘수가 떠올랐다.
‘정 안 되겠으면, 하는 척만 하면 되잖아?’
그네에서 내릴 때 그가 잡아 주지 않을까? 그때 조금 가까이 다가가 힘껏 까치발을 들면 턱 부근에는 입술이 닿을 듯했다. 거기라면 실수로 무마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주접킹’을 애태우기엔 아주 좋은 위치였다. 조금만 더 가면 키스 각이었는데, 그게 실패할 때의 아쉬움! 이건 주식을 안 사고는 못 배기지! 만면을 뒤덮은 미소가 어쩐지 사악하게 변하는 듯했다. 나는 레어넌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두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다시 미친 듯 달아올랐다.
“이제 그만 내리시겠습니까?”
결의를 다지느라 그네 타는 몸짓이 시들해진 모양이다. 눈치 빠른 레어넌이 그네를 잡아 멈춰 주며 물었다.
“네에에…….”
그러나 긴장한 탓에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약간 기울이는 그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코인을 몰빵하여 로렐라 님의 주식을 1만 주 구매합니다! 신기록입니다! 보상으로 쿠키가 구워졌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1. 네. 2. 아니요.」 1, 1만 주우?!
“네에!”
너무 놀라 온실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질 정도로 크게 대답했는데……. 띵동! 「쿠키가 사용되었습니다.」 어? 당황할 틈도 없이 머리 위에서 우지끈! 소리가 들렸다.
“꺄아악!”
“로렐라……!”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 찰나, 레어넌 단장이 나를 향해 다급하게 팔을 뻗는 게 보였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 품에 뛰어들다시피 안겼다. 그리고…….
“……!”
……입술에 부드럽고 따듯한 무언가가 꾸욱 닿았다.
종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지고 네모난 창이 빛을 뿜어내며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번쩍였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 틈으로, 깃털처럼 간지럽고 포근한 그의 숨결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 * * 잠깐. ……잠깐!!
“아!”
입술이 떨어진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짧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동시에 내 몸을 지탱해주고 있던 단단한 가슴팍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가슴은 물론, 손끝과 발끝에서도 심장이 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정신없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불의의 사고였지만, 생각하고 있던 계획이 있던지라 떳떳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대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제대로 덮치려던 게 절대 아닌데!
“아, 아닙니다.”
“제가 그만 실수를……!”
“괜찮습니다. 그냥 사고인데요.”
그러나 말과는 달리,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변해 버린 레어넌 단장의 얼굴은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이러시면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합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내 목소리와 한껏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마치 듀엣 곡이라도 부르듯 연달아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띵동! 갑자기 들려온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건…… 실로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뿌듯하게 웃으며 코를 쓱 문지릅니다. 세상에서 제일 값진 쿠키였다.」 「‘빨간 딱지 존버단’ 님이 으름장을 놓으며 3000주를 구매합니다. 초록 창, 눈 감아.」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빨간 딱지 존버단? 넌 또 뭔데?! 떨리는 눈동자가 시스템 창 위를 헤매는데, 순간 창 너머로 입술을 손등으로 꾹 누른 채 조각상처럼 서 있는 레어넌이 보였다. 악! 잘 익은 사과에서 이젠 숫제 시뻘건 숯처럼 불타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 없는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갑자기 온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기사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단장님?”
“갑자기 비명이 들려서……!”
그들은 잽싸게 달려와 수색이라도 하듯 온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나와 레어넌이 서 있는 자리에 떨어진 흰 가지를 발견하는 덴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왜인지 모를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설마…… 부러진 건가요?”
“어떻게 이런…….”
누군가 조심스레 화두를 꺼내자 다른 기사들도 못 믿겠다는 듯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휘둥그레진 눈으로 두 동강이 난 나뭇가지와 우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볼 뿐.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땅을 바라보는 것 외엔 없었다. 구멍이라도 파서 숨고 싶다. 아니, 차라리 소멸되고 싶어! 그런데 그때,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어넌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스윽 굽히고 앉았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그는 조심스럽게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들어올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내 시선 또한 나뭇가지 끝을 향했다. ……마치 칼로 벤 것처럼 깔끔하게 잘려 있었다.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다치신 곳은 정말 없으십니까?”
레어넌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고작 찰나의 시간인데도 날카롭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다정하고 걱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내게로 온전히 쏟아졌다.
“전 괜찮아요……!”
나는 어떻게든 주의를 돌리기 위해 공연히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사려 깊고 또, 순진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지만 무엇보다 제국 제일의 ‘성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유능한 검사답게 오감이 발달했고 눈치도 빨랐다. 나뭇가지를 면밀히 조사하다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일단은 자리를 피하는 게 우선일 듯했다. 나는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렇지. 차는 다음에 마셔도 될까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 레어넌이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온실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나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레어넌도 다행히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가니 연석 옆쪽에 마차가 하나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타고 온 그 마차였다. 마부 역시 나를 알아보고는 출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그리고…….”
나는 그 앞에 서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죄송했습니다!”
좋아, 이제 합법적으로 도망칠 시간이다! 황급히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리는데, “로렐라.” 하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퍽이나 다급한 말투여서, 나는 발판을 오르려는 걸음을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왜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채 천천히 뒤를 돈 그 순간, 다짐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어넌의 얼굴에서도 애써 시야에 담지 않으려 했던 부분이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바로 단정하게 맞물린, 잘생긴 입술이. 방금 전 내 입술이 진짜로 저 위에……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행여나 레어넌에게 머릿속을 들킬까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데,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또 만나 주시겠습니까?”
별 얘기가 아닌데도 그의 얼굴은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네? 아, 그럼요.”
“따로 용건이 없어도, 서신을 보내도 될까요.”
어라? 이건 내 멘트인데.
“물론이죠.”
나는 당시의 레어넌이 그랬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다음번엔 제가 초대할게요.”
솔직히…… 기사단 관저엔 당분간 못 올 것 같다. ‘코끼리 수십 마리가 밟아도 부러지지 않는다’는 나무를 한 번에 부러뜨린 여자가 있었다는 전설이 백 년쯤 뒤에 사라지면 모를까…….
“전 어느 쪽이든 좋으니 모쪼록 편하신 대로 정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그의 상냥한 배려가 고마워 생긋 웃으며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레어넌이 에스코트해 주려는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위로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장……님?”
천천히 흘러가던 구름의 그림자가 밝게 빛나는 금발 위에 드리운 순간. 내 손등 위로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