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굿 타이밍2021.09.01.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우물쭈물하자 레어넌이 이내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얼른 비켜섰다.
“이렇게 서 계시지 말고 안에서 편하게 이야기하죠. 들어오세요, 로렐라.”
“아, 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면 자꾸…… 자꾸만 시선이 한군데로 쏠릴 것 같은 탓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망토를 내밀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새벽에 위너드가 내게 둘러 준 망토는 남성용이라 길이도 길고, 또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아마 레어넌에게도 잘 맞을 것이다.
“네? 이건 왜……?”
“오늘 바람이 많이 불어서요.”
나는 손을 들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마구 펄럭이는 그의 앞섶을 가리켰다.
“……이런.”
곧장 시선을 아래로 내린 레어넌이 풀어헤친 셔츠 단추를 황급히 잠갔다. 그러나 땀에 젖은 셔츠가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달라붙어 눈 둘 곳이 없는 건 여전했다.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퍽 당황했는지, 그는 목 언저리를 온통 새빨갛게 물들인 채 연신 사과를 건넸다.
“평소 험한 기사들하고만 지내다 보니 이런 결례를…….”
“결례라니요, 그렇지 않아요.”
레어넌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드는데.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로렐라 님의 주식을 600주 구매합니다.」 「언니? 지금 뭐 하는 거죠? 그 좋은 걸 왜 가리게 하는 거죠? 나 지금 집 앞이에요. 잠깐만 문 열어봐요, 네? 언니?」 갑작스레 뜬 메시지에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불과 어제였다면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주식이 팔린 건지 고민했겠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그렇군.’
이 메시지들이 ‘댓글’이라는 건 무척이나 큰 정보였다. 줄곧 짐작만 해 왔던 ‘그들’의 정체를 유추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니까. 아슬아슬한 밀당에 가슴을 치며 ‘다음 화!’를 외쳤던 나로선, 이제 그들의 존재가 누구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독자의 마음은 독자가 가장 잘 아는 법. 그들이 뭘 가장 원하는지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했다. 오늘의 나는 메시지에 휘둘려 행동하던 어제의 내가 아니라고! 나는 얼른 창을 끄고 레어넌을 마주한 채 싱긋 웃었다.
“혹시 훈련 지도를 하던 중이셨나요? 아까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소리를 들었거든요.”
“네. 맞습니다.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늘 참관을 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면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괜찮으시다면 쓰세요.”
그리고 목석처럼 서 있는 그의 팔에 망토를 올려 주었다. 주식과는 관계없는 행동이었다. 셔츠 단추를 잠갔다고는 해도,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가웠고 땀에 젖은 그가 체온을 뺏겨 감기에라도 걸릴까 봐 걱정이 됐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레어넌은 말과는 달리 망토를 두르지 않았다. 그저 손에 반쯤 펼쳐 든 채로 잠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표정이 좀 미묘했다.
“왜 그러세요?”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망토를 건네주기 전 미리 확인했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흙먼지가 묻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잠시 후, 레어넌은 내게 다시 망토를 건네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별로 춥지 않군요.”
그러나 아름다운 미소와는 달리 말투는 평소답지 않게 다소 딱딱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나를 에스코트해 주는 손길은 변함없이 다정했지만, 방금 전 보여 준 낯선 모습에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따라 안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 *
“와아…….”
신전에 머무는 동안 성기사단 본부에도 들어간 적 있었지만,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성기사단의 내부는 신전 못지않게 화려하고 성스러웠다. 기사들이 부대껴 살고 있는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고 정돈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역시, 기사단장의 집무실이 있다는 본관의 홀이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레어넌은 선뜻 그곳까지 나를 안내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기다려 달라 말했다. 홀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육중한 마호가니 문을 등지고 넓게 펼쳐진 부채꼴 모양이었다. 양쪽 벽을 따라 높다란 장식장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안에는 유구한 세월이 느껴지는 수많은 검이 보관되어 있었다. 손잡이와 검집에 화려한 보석을 박아 놓은 것부터 시작해서,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것까지. 문외한인 내가 봐도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는 보검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구경하는데,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많이 기다리셨죠, 로렐라.”
평소처럼 화려한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레어넌이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입가에 평소의 그 상큼한 미소가 서려 있는 것을 보니, 아까 내가 느낀 건 아무래도 기분 탓인 모양이었다.
“여긴 베르하르트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보를 보관하는 곳입니다.”
내가 장식장 안을 기웃거린 걸 보았는지, 그가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처럼 오셨는데, 내부를 좀 더 둘러보시겠습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좋아요!”
나는 눈을 반짝이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에는 함께 차를 드시면 어떨까요.”
“그것도 좋아요……!”
끄덕, 끄덕, 끄덕. 마치 머리를 앞뒤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목각 인형처럼 그가 하는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패닉 상태로 무작정 찾아온 건데,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무척이나 편해졌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울해지는 라이벌과의 격차도,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가득 쌓인 피로도,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고민도 그의 상냥한 미소 앞에서는 모두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홀을 나가 복도를 끝까지 가로지르면, 커다란 온실이 나타납니다. 무척 아름다운 장소이니, 그쪽부터 보시죠.”
그렇게 말한 레어넌은 호위들을 모두 물리고는 천천히 보폭을 맞추며 나를 이끌어 주었다. 넓은 복도를 걷는 사람은 오로지 우리 두 사람뿐이었다. 복도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용맹한 기사들의 조각이 빼곡히 새겨진 웅장한 기둥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나지막하면서도 포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 왔다.
“……정말 괜찮으신지요?”
“아, 네.”
그 질문의 의미를 금세 알아차린 나는, 그를 향해 얼른 눈웃음 지어 보였다.
“서신 감사했습니다. 실은 답장부터 보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는 결례를 범하고 말았네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어요.”
“결례라뇨,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든 찾아오셔도 좋다고 제가 먼저 말씀드렸으니까요. 다만…….”
레어넌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한층 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얼굴에 여전히 수심이 가득해서, 마음이 더 쓰입니다.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 것 같군요.”
“아, 그건…….”
날카로운 지적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티가 나나?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펠리어트가 병사들을 이끌고 저택에 쳐들어간 것도 모자라, 메이레드 백작님을 북쪽에 구금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가족을 볼모로 삼다니, 설마 그 정도로 안하무인이었을 줄이야…….”
레어넌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뿐만 아니라 어찌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등에 푸른 힘줄마저 도드라진 게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황제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말씀드리다니, 누구한테…… 넥?!”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와 깜짝 놀란 나와는 달리, 레어넌은 마냥 진지했다.
“알현할 수 있도록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면 숙부께서 틀림없이 조치를 취해 주실 겁니다.”
숙부? 서, 설마 지금 황제를 숙부라고 부른 건가……?
“아, 아니. 그건…….”
“그다지 바라시는 것 같지 않아 쭉 참고 지켜보려 했는데, 도를 지나치는군요. 아무리 권세 높은 가문이라 해도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 안 돼! 그 쓰레기를 굳이 황제까지 나서서 풀어 줄 필요는 없다고!
“단장님! 그게요, 사실은…….”
레어넌은 펠리어트가 백작가에 왔다는 사실만 알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황급히 그간 있었던 일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내가 어떻게 갇혔고 어떻게 풀려났는지 모두.
“그러고 나니 빚쟁이들이 저택을 찾아왔고요…….”
그 후의 일까지는 차마 상세히 말할 수 없어서 고개를 떨구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설마 메이레드 백작이 그런…….”
레어넌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만 보더니,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드셨겠군요.”
“그래서 말인데…… 언제 아물지 모르는 제 마음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오라버니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일부러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덧붙였다. 이제 목소리를 가늘게 떠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제가 나약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약하다뇨. 아닙니다, 로렐라.”
레어넌은 힘주어 내 이름을 불렀다.
“당신의 잘못이 아닌걸요.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힘든 상황에서 이렇게 꿋꿋하게 버텨 낸 당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나약한 사람이라면, 도망치거나 회피하기 급급했을 테니까요.”
그의 단호한 대답에 어쩐지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맞아, 나는 도망치지 않았어. 도망치기는커녕 어떻게든 주식을 팔아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입술을 꼭 깨문 채 말을 잇지 못하자 레어넌이 또다시 속삭이듯, 그러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 잘될 겁니다. 무슨 일이 있든, 전 당신 편에 서 드리겠습니다.”
단호하지만 더없이 다정한 위로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젯밤의 일이 나에겐 꽤 큰 충격이었나 보다. 이런 위로에도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걸 보면. 내심 주식을 사 주는 그들은 모두 내 편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고, 심지어 세이블과 비교하면 난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배신자들이라고 소리치며 화도 냈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버림받은 아이가 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레어넌의 위로는 그 마음까지 모두 덮어 주었다. 어쩌면 모두가 나를 등진다 해도 이 사람만큼은 그러지 않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차올랐다.
말로는 표현 못 할 고마움과 감격에 나는 그만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몰래 눈가를 훔치려는데, 그보다 먼저 따듯한 체온이 얼굴에 닿았다.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우십시오.”
고개를 들자 다정한 미소가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눈 밑을 잠시간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 레어넌은 이윽고 내 고개를 자신의 품에 가만히 끌어당겼다. 순간 거센 박동이 귓가를 휘감았다. 내 안쪽에서 똑같은 진동이 울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건 내 심장 소리인가 보다.
‘아, 아니……. 이제 눈물 안 나오는데…….’
얼굴이 몹시 뜨거웠다. 보지 않아도 홍당무가 되어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모른 척 더 깊게 그의 품에 안겼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종소리가 미친 듯이 울렸지만, 나는 화면도 쳐다보지 못한 채 토닥이는 손길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 * *
“와아…….”
온실에 들어선 순간 내 입은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레어넌의 말대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반짝거리는 신록이 사방에서 초록빛을 내뿜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고,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형형색색의 진귀한 꽃들은 저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눈길을 빼앗은 건, 온실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은 고목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에요.”
이리저리 고개를 휘둘러가며 구경에 푸욱 빠져있던 찰나, 고목 아래에 고즈넉한 그네가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레어넌도 내가 어딜 보고 있는지 눈치챈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그쪽으로 이끌었다.
“기사단의 신목입니다. 원래는 한 쌍의 나무였다는데, 어느 날 벼락을 맞아 하나만 남았다고 하더군요. 이 그네는 타다 남은 조각으로 만든 겁니다. 이렇게라도 함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래서일까. 유독 옆으로 곧게 뻗은 하얀 나뭇가지에 매달린 그네는 마치 나무가 태어날 때부터 거기 있던 것만 같았다. 정말 신기한 건 사실 그네보단 그 가지였다. 대리석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그 가지는 다른 것들보다 유독 굵고, 반질반질했다.
“괜찮으면 타 보시겠습니까?”
“그러고 싶긴 한데…….”
아무리 굵고 튼튼하다고 해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그네라 조금 불안해져서 위를 바라보자 레어넌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부러지거나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매번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있으니까 안전합니다.”
그 말에 나는 주춤주춤 그네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생각보다 높아 드레스를 입은 채로는 그네에 올라타기가 쉽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였다.
“실례하겠습니다.”
갑자기 몸이 살짝 위로 들렸다. 비명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어느새 내 몸은 그네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나는 몸이 뒤로 넘어갈세라 얼른 그네의 줄을 붙잡았다. 레어넌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이 하얀 가지가 사실은 유니콘의 뿔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유니콘이요?”
“네. 코끼리 수십 마리가 밟아도 부러지지 않는 뿔을 가졌다는 전설의 마물입니다. 초대 기사단장께서 그 뿔을 잘라 이 나무 밑에 심자, 놀랍게도 나무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흰 가지가 돋아났다더군요.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이지만…….”
레어넌은 살짝살짝 그네를 밀어 주며 말을 이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이곳을 놀이터 삼아 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이야기를 쭉 사실이라 믿었…….”
하지만 그는 이윽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땐 어렸으니까요.”
슬그머니 부연 설명을 붙이는 레어넌의 붉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멋진 전설이네요. 저라도 믿을 것 같은데요?”
일부러 활짝 웃으며 호응해 주자, 레어넌이 여전히 멋쩍은 미소를 지은 채 모른 척 관자놀이를 긁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알면 알수록 다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년 같은 남자였다. 그런 그가…… 황제의 조카였다니. 베르하르트 가문이 사실 황족이라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공작저에 갇혀 지내느라 사교계와는 거리가 멀기도 했고, 이름뿐인 공작 부인에게 그런 얘길 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내심 자세한 얘기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나는 지금만큼은 그 무엇보다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오직 둘뿐인 공간. 사방에선 꽃향기가 진하게 피어오르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쾌적한 온도, 거기다 앞뒤로 신나게 흔들리는 그네까지. 밤새 심란했던 게 스스로도 거짓말 같았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시스템 창은 시끄럽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띵동! 띵동! 띵동! 종소리가 어찌나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때, 소란스러운 종소리 사이로 레어넌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어딘가 모르게 경직된 듯한 느낌이라, 나는 즉시 상념을 멈추고 얼른 대답했다.
“네, 그럼요.”
“저 망토는 누구의 것입니까? 보아하니 남성용인 듯한데…….”
그는 반대쪽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그 위에는 내가 아까 그네를 타기 전 곱게 잘 접어 올려놓은 망토가 있었다.
“저건…… 마부에게 잠시 빌린 거예요.”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재빨리 대답했다.
“오늘 바람이 좀 쌀쌀한 것 같아서요.”
마부가 쓰기에는 너무 고급스러웠지만, 내 비밀의 안내자가 건네준 망토라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적당한 대답을 내뱉었다.
“아, 그랬군요.”
순간 레어넌의 얼굴에 활짝 만개한 꽃 같은 미소가 피었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그의 목덜미가 붉게 물드는 게 보였다.
“…….”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흘끔흘끔 눈치를 살폈지만, 그네를 밀어 주는 레어넌의 입은 꾹 다물린 채 열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혹시 다른 남자 것일까 봐 신경 쓰인 건 아니시죠?”
결국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과장된 웃음과 함께 말을 건넸다. 그때 돌아온 것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쓰였습니다.”
“네?”
“신경,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