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진짜 여주감 VS 연기 천재2021.08.28.
밤새도록 시끄럽게 울어 댈 것 같던 부엉이의 울음소리도 어느덧 수그러든 아주 늦은 밤. 빽빽하게 차오른 전나무 숲길 사이로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자박자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밤이슬을 머금은 풀잎이 드레스 아랫단을 축축이 적셨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또다시 우뚝,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말없이 곁에서 보폭을 맞추던 위너드 또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내 옆얼굴을 몇 번 힐끔거리더니, 이윽고 한껏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그만 마차 부를까?”
나는 대답 대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로렐라, 대체 언제까지 걸을…….”
“아오오옥!”
그대로 밤하늘을 향해 괴성을 토해 냈다. 그러자 위너드가 얼른 말을 끊으며 내게서 멀리 떨어졌다.
“이런 개……!”
또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하늘에다 대고 질펀하게 욕설을 쏟아 내자니, 진짜 ‘그들’이 들을까 봐 걱정됐다. 자존심은 잔뜩 구겨져 참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씩씩대던 나는 급기야 애꿎은 나무를 발로 쿵쿵 차 댔다.
“진짜! 열 받네!”
“진정해, 응? 네가 이러는 이유야 당연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제 마음을 가라앉혀야지.”
위너드는 그런 나를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달랬다. 이 광경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이젠 셀 수조차 없었다. 달빛에 의존해 걸어야 할 정도로 어두운 숲길이지만, 마차를 타기 전에 차가운 바람을 좀 쐬고 싶다고 제안한 건 나였다. 안 그러면 이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를 도무지 진정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쉼 없이 화가 치밀었다. 몇 발자국 걷다 나무를 차고, 또 몇 발자국 걷다 나무를 차기를 반복하느라 정작 걸어온 길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시스템 창을 켜 작고 귀엽고 하찮은 내 주식을 들여다보았다. 그럴수록 위너드가 보여 준 다른 후보의 주식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5만 주? 누군 겨우 몇 백 주에 그 개고생을 했는데, 5만 주우?!”
내 것이 아니라 그런가? 왜 이렇게 커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실제로도 엄청 큰 숫자다. 생각할 때마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목구멍 안쪽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자자, 이제 시스템 창 보는 거 금지. 볼 때마다 열 받는다면서 왜 자꾸 열어 보고 그래.”
위너드가 부드럽게 얘기하며 눈앞의 화면을 슬쩍 꺼 버렸다. 그러나 분노 곡선은 이미 정점까지 올라간 뒤였다.
“뭐? 우리언니, 개간지나? 하고풍거 삭다해라?!”
누가 주접킹 아니랄까 봐, 주접도 이런 주접이 없네! 게다가 요즘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그 새끼 남주 아니죠’마저 1만 주나 사 주다니! 사랑하는 연인의 배신을 목격하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도저히 참기 힘든 질투심과 배반감에 휩싸여 치를 떨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충격적인 건, 바로 ‘사이다 만수르’라는 만나 본 적조차 없는 새로운 이름이 그녀의 주식을 펑펑 사 줬다는 거다. 원한다면 나도 얼마든지 혈관에 사이다 링거 꽂아 줄 수 있는데……! 퍽퍽! 애꿎은 나무둥치를 찰 때마다 머리 위로 마른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다들 속고 있는 거야. 주식을 팔기 위해 그럴듯한 상황을 연출한 것뿐이라고!”
한밤중에 하필이면 다 쓰러져 가는 폐허에서 남자를 무릎 꿇린 이유가 뭐겠는가.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남루한 망토로 감추고 있다가, 달빛 아래서 박력 있게 벗어 던진 게 대체 무엇 때문이겠냐고! 그때 위너드가 슬그머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
“뭐라고?”
발끈해서 되받아치려다 순간 발길질이 멈췄다. 그건…… 그렇네? 하지만 머쓱해한 것도 잠시.
“야!”
나는 몸을 홱 돌려 그를 매섭게 째려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네가! 하지만 눈치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안내자 놈은, 멱살을 잡기에는 이미 너무 먼 곳에 가 있었다.
“아, 그렇지. 내가 뭐 하나 알려 줄까?”
있는 대로 사람 속을 긁어 놓곤 능청스럽게 화제를 바꾸는 것도 위너드의 특기였다. 매를 버는 특기.
“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기만 해 봐! 이번에야말로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그와의 거리를 재며 조용히 팔을 걷어붙였다.
“주식이 팔릴 때 뜨는 메시지들 말이야. 그걸 ‘댓글’이라고 부른다더군.”
위너드는 이건 몰랐지? 하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반면에 나는 익숙한 단어에 소매를 접던 손까지 멈추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 댓글……?”
“그런 게 있어. 쉽게 설명하자면 본인의 의견이나 소감을 적는 짧은 글이라고 생각하면 돼.”
아니, 댓글이라면 나도 종종 달아 본 경험이 있는데……? 뜻밖의 이야기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상황을 내려다보며 주식을 사고, 댓글을 다는 존재라. 그 말을 되뇔수록 자꾸만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바로 전생의 나 말이다.
“이제 그만 가자. 감기 걸릴라.”
어깨 위로 따듯한 무언가가 씌워졌다. 고개를 드니 망토를 벗어 내게 손수 둘러 주던 위너드가 시선을 맞춘 채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진짜 절망에 빠지면 잘생긴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봐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구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머뭇머뭇 입술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 라이벌이라는 그 악녀는, 5만 주를 판 것도 모자라…… ‘우리 언니 개간지나.’라는 댓글이 달렸다는 거지……?”
“그렇지.”
담백하고도 깔끔한 확인 사살을 듣는 순간, 커다란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뻣뻣하게 굳은 입술을 뚫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 어.”
“로렐라?”
그리고 위너드가 고개를 기울인 순간, 나는 절망 섞인 울음을 토해 내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흐으…… 우아앙!”
밤공기가 차가운 탓에 어깨가 절로 부르르 떨렸다. 다 젖어 버린 치맛자락이 발목에 얼음장처럼 달라붙었지만, 그보다는 마음이 더욱 시려 왔다.
“왜, 왜 그래?”
당황한 위너드가 날 따라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친……! 그걸 어떻게 이겨!”
“왜 또 우는 척을……. 아니, 잠깐. 설마 진짜 울어?”
나를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는 손길이 느껴졌지만,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그 대신 낭패감 섞인 우는 소리만 터져 나왔다.
“나랑 달리 완전 여주감이잖아……! 내가 독자라도 그쪽 주식을 사겠네!”
“뭐어?”
단순히 주식 판매 숫자를 겨루는 경쟁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래서 다른 후보들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일 거라 믿었던 게 얼마나 큰 오판이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게 뜬 메시지들은 대부분 레어넌 단장이나 펠리어트 관련이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하지만 세이블 릴리는 달랐다. ‘우리 언니 개간지나.’라니. 이건 그녀에게 어떤 남자를 가져다 붙여도 상관없다는 소리다. 아니, 어쩌면 남주 따위는 없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독자로서의 경험과 그녀의 행동으로 미루어 봤을 때, 세이블 릴리는 아마도…… 사정 있는 악녀일 것이다. 진짜 악인에게 열광하는 일은 드무니까. 어쩌면 악녀 주인공 클리셰대로 이용만 당하던 삶에서 벗어나 피도 눈물도 없는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건 아닐까? 미친, 나라도 이건 정주행한다! 아무튼,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그녀는 진짜 주인공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나처럼 어설픈 연기를 통해 주식을 벌어들이는 게 아니라. 일단 평범한 빙의녀와 사연 있는 악녀는 캐릭터의 강렬함부터 차이가 난다고! 진짜 주인공감과 주인공을 연기할 뿐인 나. 과연 어느 쪽에 승산이 있을까?
“으허엉……!”
답이 정해져 있는 뻔한 걸 자문하다 보니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때, 내 어깨를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 로렐라. 너도 여태까지 잘해 왔잖아.”
평소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따듯한 위로까지 들으니 더더욱 참담했다.
“막상 비교해 보니 내 주식이 너무 뽀짝해서 그래…… 허어엉.”
“뭐, 그 마음도 이해해. 처음 본 라이벌이 저렇게까지 유력하니까.”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도 잠시.
“그래서…… 포기하려고?”
“뭐?”
“네가 정 힘들다고 판단한다면, 그것까지 내가 뭐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긴 하지…….”
늘 자신만만하게 빛나던 위너드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시무룩한 기운이 역력했다. 순간 얼굴에 열이 화르륵 올랐다.
“포기하긴 누가 포기해.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잖아! 어차피 못 하면 죽는다며……!”
두근거리던 심장이 이제는 거의 터질 듯이 뛰었다. 시샘, 부러움, 서러움, 그리고 두려움까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그래, 그렇지.”
고요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내 주인공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위너드는 케인을 팔 안쪽에 끼운 채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올라간 입매에 시선이 향한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이글이글 불타는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난 상대가 보여 줄 수 없는 것들을 모조리 보여 줄 거야! 연기든 뭐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어!”
살고 싶다.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
“제각기 다른 취향을 전부 만족시켜 줄 수만 있다면 분명 몇 백, 아니 몇 만 주를 벌어들일 수 있을 거야!”
어라?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인데. 하지만 그런 기시감도 잠시,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말하길 기다렸어. 일단은 따뜻한 곳으로 가자. 내 소중한 주인공이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어느새 눈앞에 커다란 마차가 나타났다. 우리가 아까 타고 온 바로 그 마차였다. 나는 커서 흘러내리려는 망토를 다시 한번 여민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렇게 좌절만 하고 있어 봤자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부디 방금 전의 각오를 잊지 않길 바라. 너는 반드시 주인공이 될 수 있어, 로렐라.”
마차의 발판을 밟고 오르는 내 손을 잡아 주던 위너드가 낮게 속삭였다.
“그날까지 난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진지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평소만큼이나, 아니 평소보다 더 감미롭고 달콤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사람을 홀릴 듯한 아름다운 웃음이었으나, 기운이 빠진 나는 더 이상 생각할 힘도 없었다. 그저 그의 손을 힘주어 맞잡은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저택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을 훌쩍 넘긴 아침이었다. 위너드는 언제나 그렇듯 홀연히 사라졌다. 마부의 기억은 지워 둘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남긴 채. 현관 앞에 도착해 조심스레 문을 열자,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아가씨!”
잠을 설쳤는지 유독 퀭해 보이는 얼굴. 바로 조이였다.
“대체 말씀도 없이 밤새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거의 울먹이고 있는 조이를 보며, 나는 위너드에게 다음부터는 그냥 공간 이동을 시켜 달라고 요구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행선지를 말할 수 없는 외출이 생길 텐데, 그때마다 고용인들에게 일일이 변명할 수는 없으니까.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하세요? 설마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건…….”
“아니야. 잠이 안 와서 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
대충 대답을 둘러대는데, 조이의 앞치마 주머니에 고급스러운 금빛 봉투가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건 뭐야?”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화제를 그쪽으로 돌렸다.
“아, 방금 전 배달부가 왔다 갔어요. 아가씨께 온 서신이에요.”
“서신? 나한테?”
빚 독촉하는 서신 말고 내게 이런 걸 보낼 만한 사람이 있나, 하고 생각하며 그녀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분명 빚은 다 청산했을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은근히 차오르는 걱정을 삼키며, 나는 레터 나이프도 없이 봉투 겉면을 아무렇게나 찢었다. 그리고 편지를 읽어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신을 보낸 사람은 레어넌이었다. 펠리어트 공작이 병사를 이끌고 메이레드 백작가로 향했다는 것을 부하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 편지는 나의 안부에 대한 걱정으로 끝났다. 괜찮다면, 답신을 주길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과 함께.
“아가씨,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조이의 어깨 너머로 막 출발하려는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잽싸게 달려가 그 앞을 막아섰다. 깜짝 놀란 마부가 급히 고삐를 당기자, 말 두 마리가 세차게 울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위험해요!”
조이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의 문을 열어젖히며 크게 소리쳤다.
“에크레투스 기사단까지, 빨리!”
“네……?”
“아, 아가씨?”
이번엔 마부와 조이, 두 사람의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마차의 벽을 쿵쿵 두드리며 짧고 강하게 외쳤다.
“출발!”
이윽고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빠르게 달려 나가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손바닥이 아프도록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 * *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하얀 대리석 건물의 커다란 정문 앞.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약속을 잡지도 않고 무작정 찾아왔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뭐에 홀린 것처럼 대책도 없이 마차부터 타 버렸다. 레어넌 단장이 안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이른 시간에 찾아와도 되는 걸까? 정문을 지키고 서 있는 병사들에게 부탁해 보면 어떨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앞선 탓이었다. 아무 때나 와도 좋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불쑥 찾아와 불러내는 건 상식 밖의 일이다. 아무런 계획도 뭣도 없이 대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저지른 일이지만 어이가 없었다. 세이블 릴리라는 내 라이벌의 활약을 직접 목격한 직후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음이 급한 나머지 깊게 생각하지 못한 내 실책이었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마부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 괜히 기사단 본부 주변을 서성였다. 담 안쪽에서 용맹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훈련 시간인 모양이었다. 결국 별다른 소득도 없는 짧은 산책을 마치고, 마차가 기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로렐라, 잠깐……!”
뒤에서 철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다급하게 내 이름을 외쳤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느슨하게 묶은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만……. 하아.”
레어넌 단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곁으로 달려왔다. 그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허리에 손을 얹고 몸을 살짝 굽힌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여러 명의 괴한들을 상대로 검을 휘둘렀을 때도, 숨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었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 기울었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그가 이내 민망한 듯 웃음을 흘리며 부드럽게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로렐라.”
“……네? 아, 안녕하세요. 단장님.”
멍하니 그의 얼굴을 보다가 인사를 받고서야 한 박자 늦게 나도 인사를 건넸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차에 나타난 그가 반가우면서도 좀 놀라웠다.
“제가 온 줄은 어떻게 아시고…….”
“문 앞을 지키던 병사가 보고 알려 줬습니다.”
조심스럽게 묻자, 대답과 함께 밝은 태양처럼 환한 미소가 쏟아졌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그냥 가려고 하셨습니까?”
“아, 그게…….”
나는 순수한 의문이 묻어 있는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아 조용히 눈동자를 굴렸다. 덕분에 레어넌 단장의 모습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 그는 언제나처럼 주름 한 점 없는 하얀색 정복이 아니라 검은 바지에 탄탄한 종아리를 감싼 검은색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 역시 훈련을 하고 있었나 보다. 흰 셔츠의 단추가 목 아래까지 다소 느슨하게 풀어진 것을 보면. 하필이면 내 시선과 같은 높이에 땀에 젖은 쇄골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모양새가 잘 잡힌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도 마찬가지로 탄탄해 보였다.
“그, 그러니까 그게…….”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