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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라이벌의 정체 (16/173)

16화. 라이벌의 정체2021.08.25.

커다란 마차가 밤이슬이 흠뻑 내려앉은 도로 위를 쉼 없이 달려 나갔다. 어두운 밤거리에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긴 채, 어둠뿐인 창문 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유리에 비치는 붉은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다, 아까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단어를 소리 없이 입 안에서 굴렸다. 라이벌. 손바닥이 다시금 땀으로 축축해졌다. 라이벌을 만난다고 하니 평정심보다는 긴장감이,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이 차올랐다. 후보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누구보다 많은 주식을 팔아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주인공이 되어라.’라는, 시스템 창을 통해 날아든 메시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경쟁 상대를 직접 만나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어떤 사람일까? 설마 나처럼 빙의자인 걸까? 확실한 건 누가 됐든 그 사람보다 주식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거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소멸’할 테고,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온갖 생각에 괜히 애꿎은 드레스 자락만 움켜쥐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위너드가 나를 바라보고 있던 탓이었다.

16550614198573.jpg“너무 긴장하지 마.”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긴장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담. 정말 귀신같은 눈치가 아닐 수 없었다.

16550614198573.jpg“그야, 나는 너 말고 다른 거엔 관심 없으니까.”

뭐지. 혹시 속마음까지 읽는 건가?! 다른 사람이 했다면 낯간지러울 법한 말이었지만, 위너드가 하니 의심부터 들었다. 그러고 보니 라이벌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그를 따라나서긴 했지만, 아직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다.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속사포처럼 빨리 질문을 쏟아냈다.

16550614198582.jpg“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건데? 그 사람은…… 얼마나 팔았대?”

16550614198573.jpg“글쎄. 가 보면 알겠지?”

하지만 위너드는 애매한 대답과 함께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0614198573.jpg“규정상 말해 줄 수 없어, 로렐라. 물론 나도 전부는 알지 못하고.”

또, 또. 그놈의 규정! 말을 꺼낸 내 입만 아프지. 나는 뾰로통해서 괜히 툴툴거렸다.

16550614198582.jpg“속 시원히 말해 주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안내자는 무슨. 이 늦은 밤에 사람을 대체 어디까지 끌고 갈 셈이야? 그냥 지난번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목적지로 데려다주면 좀 좋아?”

16550614198573.jpg“이럴 때 바람이라도 좀 쐬게 해 주고 싶었던 건데, 괜한 짓이었나?”

그의 입술 끝은 여전히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16550614198573.jpg“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거야. 피곤하면 눈 좀 붙일래?”

……이것 봐라. 어쩐지 말을 돌리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따져 묻는 대신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을 청하는 척하며 그가 한 말을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위너드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안내자가 후보의 일에 개입할 수 없다는 건 진짜일까? 혹시 도와줄 수 있는데 귀찮아서 그러는 거라면? 날 그냥 주식 파는 기계로 만들어서, 개처럼 굴리려는 수작 아니야?! 한 번 싹 터 버린 의심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안 그래도 미심쩍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감옥에 갇힌 날 못 본 척하고 사라진 그때부터 위너드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귀티가 흐르는 잘생긴 얼굴과 매력적인 눈웃음, 그리고 늘 미소가 서린 붉은 입술까지. 내심 안내자가 아니라 내 안구의 구원자는 아닐까 칭송했던 얼굴도 지금은 그저 수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16550614198582.jpg‘내가 만만해 보였나 본데…….’

나는 속으로 이를 갈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16550614198582.jpg“흐읍……!”

그러고는 바로 숨을 삼키며 드레스의 앞섶을 움켜쥔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니, 고꾸라진 척했다.

16550614198573.jpg“로렐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일부러 울먹거리며, 고개를 더 푹 숙였다.

16550614198582.jpg“갑자기 숨이, 숨이 안 쉬어져서……!”

16550614198573.jpg“뭐……?”

16550614198582.jpg“나한테 경쟁을 하라니.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랑! 흐윽……!”

아니나 다를까, 시종일관 여유롭던 그가 놀라서 조심스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몸을 일으켜 얼굴을 보려는 듯했지만, 나는 힘을 줘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16550614198573.jpg“이, 이봐. 괜찮아?!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16550614198582.jpg“만약 라이벌이 엄청 좋은 사람이면 어떡해? 드디어 내 영혼의 단짝을 만났는데, 그게 하필 라이벌이면 어떡하냐고……!”

16550614198573.jpg“갑자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그래, 로렐라.”

16550614198582.jpg“할 수도 있지! 난 인프피(INFP)란 말이야, 어헝……!”

16550614198573.jpg“그건 또 뭔데? 안 되겠다. 일단 고개 좀 들어 봐, 응?”

16550614198582.jpg“인프피 몰라, 인프피? 소심한 관종!”

나는 전생에서 푹 빠져 있던 MBTI까지 끌어와 마음대로 떠들었다.

16550614198582.jpg“흐윽, 꼭 직접 만나야 해? 네가…… 흐읍, 딱 한 번만 도와줄 수는…… 없는 거야?”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펠리어트의 앞에서도 낯부끄러운 대사를 읊어 댄 나다.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러자 위너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16550614198573.jpg“내 말 잘 들어, 로렐라. 이미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건 안 돼. 안내자가 후보의 행동에 직접 개입하면 징계를 받게 된다고.”

16550614198582.jpg“그, 그래?”

……규칙이 존재한다는 건 적어도 진짜인가 보군. 나는 눈물 콧물을 찍어 내는 와중에도 그의 말을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16550614198573.jpg“그래. 안 그래도 지금 보러 가는 후보의 안내자가 규정을 어겨서 근신 중이야. 덕분에 이렇게 몰래 보러 갈 수도 있는 거고. 안내자가 없으면 후보는 여러 위험에 노출돼, 로렐라.”

16550614198582.jpg“뭐?”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차. 눈물, 눈물! 나는 얼른 손바닥에 다시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마구 들썩였다.

16550614198582.jpg“그런 말도 안 되는…….”

16550614198573.jpg“그러니까 규칙에 따를 수밖에 없어. 나에게는 너를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16550614198582.jpg“하…… 하지만 나같이 평범한 후보한테는 누구도 신경 안 쓸 텐데…….”

위너드는 내 어깨까지 토닥여 주며 나를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6550614198573.jpg“평범하다니, 그럴 리가. 정말 그랬다면 내가 네 안내자로 왔을 것 같아? 주식을 팔자마자 쿠키 보상까지 받아 낸 건 네가 처음이었어.”

16550614198582.jpg“그래……? 몇백 명의 후보 중에, 정말 내가…… 처음이야?”

16550614198573.jpg“정말이고말고. 그리고 몇백 명이라니, 후보가 그렇게 많을 리 없잖아.”

16550614198582.jpg“그럼 몇 명이나 있는데?”

16550614198573.jpg“그건 나도 잘 모르지만, 확실한 건…….”

그때였다. 그가 말을 멈춤과 동시에 내 어깨를 토닥이던 손길 또한 우뚝 멈췄다.

16550614198582.jpg‘벌써 들켰나?’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고 뻔뻔하게 우는 시늉을 이어 갔다. 그러나 위너드는 더 이상 달래 주지도, 어깨를 토닥여 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16550614198573.jpg“……하.”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50614198573.jpg“로렐라.”

하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음성은 어쩐지 한층 낮아져 있었다. 설마 화난 건…… 아니겠지?

16550614198573.jpg“……머리 좋은데.”

역시 들켰구나. 그러게 진작 말해 줬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했겠어? 거, 눈치는 진짜 기가 막히게 빠르네!

16550614198573.jpg“그 우수한 두뇌를 주식 파는 데에도 아낌없이 활용하길 기대할게.”

평소처럼 능글거리는 말 속에 은근한 가시가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16550614198573.jpg“어차피 다 들켰는데 이제 고개 좀 들지?”

16550614198582.jpg“…….”

16550614198573.jpg“싫으면 뭐, 어쩔 수 없고.”

위너드가 빈정거리듯 말했지만, 나는 손에 얼굴을 묻고 꿋꿋하게 버텼다. 진한 아쉬움만이 목구멍까지 가득 차올랐다. 그래서 그 확실한 게 대체 뭔데! 하려던 말은 끝까지 해 주면 안 되겠니?! 조르고 싶은 마음에 입술이 절로 벙긋거렸다. 손 틈새로는 안타까운 한숨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 * * 어색하고 뻘쭘한 시간은 다행히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춘 덕분이었다.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위너드는 말없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동시에 커다란 마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놀라움도 잠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16550614198582.jpg“여기가 어디야?”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숲속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스산한 부엉이 울음소리만이 귓가를 스쳤다. 우거진 수풀 속에서는 꼭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16550614198573.jpg“쉿, 이쪽으로.”

검지를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해 보인 위너드가 나를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신중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작은 수풀을 헤치며 얼마쯤 걸었을까. 눈앞에 다 쓰러져 가는 작은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나는 희끄무레한 달빛에 의존해 그곳을 자세히 살폈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 둥근 지붕과 무너진 벽, 그리고 말라붙은 담쟁이넝쿨이 흉하게 늘어진 아치형의 문까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가 틀림없었다. 이런 곳에 내 라이벌이 있다고? 폐허가 된 건물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16550614198573.jpg“드디어 등장하셨군.”

위너드가 조용히 속삭였다. 또다시 긴장감이 차올랐다. 나는 덤불 뒤에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마른침을 삼켰다. 때마침 구름이 걷혀 달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아래, 커다란 망토를 뒤집어쓴 자그마한 체구의 누군가가 보였다.

16550614198582.jpg‘저 여자가 내 라이벌인가 봐…….’

망토 덕분에 몸의 실루엣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발을 옮길 때마다, 땅에 아슬아슬하게 끌릴 정도로 긴 망토 자락 아래로 붉은색 하이힐 코가 슬쩍 드러났으니까.

16550614309977.jpg“일찍 왔군, 세이블.”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내 근처의 덤불에서 누군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더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입을 부드럽게 막은 커다란 손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16550614198573.jpg“쉿.”

위너드가 나지막하게 경고하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 역시 천천히 몸을 돌렸다.

16550614309977.jpg“후작님.”

커다란 후드 사이로 새초롬한 미소를 머금은 붉은 입술이 얼핏 보인 그때였다. 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16550614198582.jpg“……!”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16550614309995.jpg

  가장 먼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탐스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이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물결쳤다. 눈동자는 신비로운 보랏빛이었다. 마치 자수정을 그대로 가져다 박은 것처럼 영롱한 이채가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이…… 아니, 순식간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청초한 분위기와는 달리 그녀는 화려한 루비가 잔뜩 달린, 몸에 딱 달라붙는 고혹적인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자태에 여자인 나조차 넋을 잃어버렸다.

16550614198582.jpg‘와…….’

소리 없는 감탄사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여자의 앞에 선 젊은 후작의 눈에도 뜨거운 욕망이 적나라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6550614309977.jpg“그대와 약속한 대로 모든 것을 완벽히 처리했다.”

16550614309977.jpg“전부…… 말인가요?”

16550614309977.jpg“그래, 전부 불태웠어.”

후작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든 채 거들먹거렸다.

16550614309977.jpg“잿더미만 남았지. 아무리 헤집어도 그 무엇도 찾지 못할 거다.”

16550614309977.jpg“……그렇군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여자의 입가에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서서히 피었다. 때마침 어두운 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긴 검은 머리칼을 가느다란 목에 칭칭 감아 놓고는 사라졌다. 하얀 피부 위로 짙은 멍 자국이 그어진 것 같았다. 마치 잘린 머리를 다시 이어 붙인 흔적처럼 보여,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16550614309977.jpg“세이블, 그대는 이제 내 것이다.”

그녀의 미소에 홀린 듯, 후작은 성큼 다가가 거만한 손길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다.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마주 닿으려던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나, 후작의 목에 커다란 검을 겨누었다. 날카로운 검은 찌르거나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움직이면 그대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위치에서 그를 위협했다. 당황해 뻣뻣하게 몸을 굳힌 후작과 달리, 여자는 표정 변화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16550614309977.jpg“세이블……?”

16550614309977.jpg“수고하셨어요, 후작님.”

조용히 미소 짓던 그녀는 이제 아예 새하얀 치아를 드러낸 채 활짝 웃었다. 하지만 후작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만큼은 어쩐지 무심해 보였다. 나는 위너드의 팔을 꼭 잡은 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줄곧 궁금했던 공포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 무서운데 결말이 궁금해서 눈을 돌리지 못하는!

16550614309977.jpg“세이블! 네가 감히……!”

분노에 찬 고함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16550614309977.jpg“나는 약속대로 그들을 모두 죽였다! 네가 바라던 대로, 가장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서!”

16550614309977.jpg“제가…… 그런 약속을 했던가요?”

16550614309977.jpg“뭐, 뭐라고?”

16550614309977.jpg“그 모든 건, 후작님께서 직접 행하신 일인걸요.”

16550614309977.jpg“지금 날 배신하겠다는 거냐, 세이블! 네 모든 걸 알고 있는 내게……!”

그 순간, 내내 가라앉아 있던 여자의 두 눈에 광채가 돌았다. 마치 그것이 신호인 양, 칼을 겨누고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후작을 제압해 그녀의 앞에 무릎 꿇렸다. 반항할 시간조차 없었다. 다시 자신의 목에 드리운 칼날에, 후작이 떨리는 입술을 피나도록 짓쳐 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자는 여전히 무감한 시선으로 후작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후작은 바닥에 이마를 대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후작이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16550614309977.jpg“네가, 네가 날 배신한다 해도 상관없다. 세이블, 널 사랑해서 모든 걸 바쳤어. 그러니 제발…….”

16550614309977.jpg“…….”

16550614309977.jpg“날 사랑한다고 해 줘…….”

언제 분노에 휩싸였냐는 듯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애절했다. 듣고 있는 나까지 가슴이 찡해질 만큼 절절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앞에 선 여자는 그 애원에 웃음으로 답했다.

16550614309977.jpg“죄송해요.”

그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후작과 눈높이를 맞춘 후, 그림처럼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16550614309977.jpg“단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16550614309977.jpg“세이블…….”

16550614309977.jpg“안녕히 가세요, 후작님.”

마지막 인사와 함께 덧붙인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악! 뭐야! 저 여자 뭐야! 나는 손을 들어 귀 전체를 벅벅 문질렀다. 오늘 밤 가위눌릴 것 같아! 그러는 새 그녀가 몸을 돌렸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일정한 하이힐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머리를 연신 땅에 찧으며 울부짖던 후작도, 그를 포박해 억지로 끌고 간 남자도 어느새 모두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밤하늘에는 부엉이가 우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울려 퍼질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16550614198573.jpg“라이벌을 본 소감이 어때?”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웃음기가 스민 위너드의 목소리에 고개가 스르르 움직였다.

16550614198573.jpg“우리 아가씨께선 여전히 나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번만 특별히 보여 줄게.”

이건 네 행동에 직접 관여하는 건 아니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띵동! 그리고 낯익은 종소리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은……. 「‘저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손뼉 치며 세이블 릴리 님의 주식을 1만 주 구매합니다!」 「‘사이다 만수르’ 님이 사이다를 흔들어 따 젖히며 세이블 릴리 님의 주식을 2만 주 구매합니다!」 「‘이 구역 주접킹’ 님이 가산을 탕진해 세이블 릴리 님의 주식을 2만 주 구매합니다!」 내 것이 아니었다.

16550614198582.jpg“……뭐, 뭐야?!”

처음 보는 숫자에 순간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은 그때였다. 띵동! 또다시 종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수줍어하며 시를 한 수 읊습니다.」 「우리언니(于里言尼) 개간지나(槪幹支拿) 하고풍거(河鼓風去) 삭다해라(削多海蘿) 좌로인정(左虜人正) 우로인정(右虜人正) 압구루기(狎鷗漏器) 대굴대굴(大窟大窟).」  

16550614198582.jpg“이, 이…….”

나도 모르게 양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추운 곳에서 헐벗고 있는 사람처럼, 어금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16550614198582.jpg“배신자들아아아아!”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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