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주인공이 되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구나2021.08.21.
두껍게 얼어붙은 강 건너편에선 매서운 북풍이 끊임없이 불어닥쳤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창가의 덧문을 두드려 댈 때마다 마치 불청객이 문이라도 두드리듯 거세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다. 이 으스스한 저택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는 바로 큰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이었다. 어린아이 예닐곱 정도는 나란히 누울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벽난로에, 쉴 새 없이 장작이 넣어졌다. 펠리어트 공작은 그 앞의 크고 안락한 가죽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댄 채 두꺼운 서류 뭉치를 말없이 넘겼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늘 목까지 채우던 셔츠 단추까지 두어 개 풀어 헤친 모습은 평소와는 달리 조금 나른해 보였다. 항상 곁을 지키는 그의 수하는 덕분에 지금 펠리어트의 기분이 제법 좋다는 걸 눈치챘지만, 건너편에 머리를 조아리고 선 방문객은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 드문 공작저에 발을 들인 방문객은 인테리어 업자였다. 그는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쳐 대었다. 자꾸만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난 탓이었다. 그는 아무리 오래된 저택이라 해도, 마치 새 저택처럼 싹 탈바꿈시키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덕분에 제국 최고라 알려져 내로라하는 온갖 귀족들을 상대해 봤지만, 살면서 이렇게 긴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그저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목소리까지 떨리다니. 그건 전부 지금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펠리어트 공작 때문일 테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인 것보다 악명으로 더 유명한 공작의 출장 의뢰를 받았을 때도 놀라긴 했지만, 그가 떠맡긴 기상천외한 의뢰를 확인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방치했던 공작저의 내부 장식을 바꿔 달라는 얼핏 보면 평범한 의뢰. 문제는 그 안의 상세 내용에 있었다.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저택을 만들어 달라니.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호했다. 여하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안전이라고 허투루 하겠는가. 업자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다. 일단은 외관부터 시작해 창문 밖에서 흘깃 스치는 내부까지 아름답고 호화롭게 꾸미기로 했다. 슬쩍 눈동자를 굴리기만 해도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살풍경한 북부 영지의 분위기를 누를 수 있는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으로 저택을 채우는 데에도 꽤 많은 공을 들였다. 그뿐이랴. 다음에는 앉기만 해도 몸이 녹는다는 평 덕분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소파, 하늘의 구름을 떼어다 만든 것처럼 푹신하다고 칭송이 자자한 침대, 눕는 순간 제아무리 지독한 불면증 환자라도 코를 골게 만든다는 전설의 베개 등으로 온 집안의 침구를 교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어디든 몸을 기대기만 하면, 절대로 일어서고 싶지 않도록……! 그 결과 가히 황궁에 견줄 만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더불어, 세상에 둘도 없는 편안한 요람 같은 집이 탄생했다. 물론, 가격도 상상 이상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오랜 침묵에 업자는 불안했다. 중압감에 짓눌려 어깨도 자꾸만 굽어 갔다.
“공작님……?”
조심스레 불러 봤지만, 여전히 펠리어트의 시선은 서류 위에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공작의 지시를 그대로 따른 건데……. 침묵이 길어질수록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좋아.”
그때, 한참 만에 펠리어트의 입술이 열렸다.
“이 소파가, 여기 적힌 바로 그 소파인가?”
그제야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던 인테리어 업자가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 그렇습니다!”
“확실히 편하군. 좋아, 이대로 진행해.”
“네! 맡겨 주십시오!”
허리를 넙죽 굽힌 업자는 그대로 도망치듯 물러갔다. 응접실 문이 닫힌 뒤, 무심한 손길로 두꺼운 서류 뭉치를 한쪽으로 치운 펠리어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택 정비는 이 정도면 된 듯하고……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인가?”
그의 혼잣말에 답이라도 하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짧은 허락을 내리자마자 벌컥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기사들은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그들의 발치 아래에는 한 여인이 주저앉아 있었다.
“펠리어트!”
그녀의 새된 비명 같은 목소리가 조용한 응접실 안에 메아리쳤다.
“어떻게, 어떻게 네가 내게 이런 짓을……!”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울부짖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 엠마 체임버스였다. 펠리어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소름 끼치도록 잔잔하고 무심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나는 그저 우리 가문을 위해서……!”
“로렐라가 다른 남자와 내통했다는 거짓말을 한 것이 가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네가 좀 더 잘되길 바랐으니까. 자식을 가진 어미라면 모두 나를 이해할……!”
“게다가 공작저의 재산까지 마음대로 착복하셨더군요. 고용인들을 이유 없이 쫓아내고 바꾸신 것까지. 굳이 더 말씀드려야 합니까?”
그 말에 엠마의 입이 거짓말처럼 다물렸다. 얼음처럼 얼어붙어 버린 응접실 안에서 세차게 움직이는 것이라곤 오로지 그녀의 눈동자와, 미친 듯이 뛰는 심장뿐이었다. 전쟁터에 나갔다 돌아온 아들이 대체 언제 그것까지……? 하지만 엠마 체임버스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펠리어트가 짧게 고갯짓하자 기사들이 그녀를 억지로 잡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놓아라! 감히 내게 이런 짓을……! 펠리어트, 펠리어트!”
엠마는 끌려가는 내내 애처로운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러 댔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목소리 같은 건 이미 들리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의 귓가에 맴도는 건, 오직 단 한 사람의 음성뿐이었다.
‘어쩌면 다, 당신 곁이 싫은 게 아니라…… 그 집이 싫어서 이러는 걸지도오…….’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제법 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는지, 괜히 발끝으로 땅을 툭툭 걷어차던 동작 하나하나까지 생생히 떠올랐다. 공작저를 대대적으로 바꾸기로 한 것도 전부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탓이었다. 펠리어트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무감한 표정으로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언덕 위에 있는 저택인지라, 유달리 살풍경한 영토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저 땅을 밟아야 한다는 걸 잊을 뻔했군. 그는 자신의 수하에게 케튼 남작을 당장 호출할 것을 명했다. 북부 영토의 전반적인 시설과 그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관리급 귀족이었다. 수하는 바로 모셔오겠다는 대답과 함께 물러갔다. 전쟁터에 묶여 있던 탓에 영지 관리에 소홀했었다. 그러나 여러 군데를 손보고 나면 황폐한 북부에도 생기가 돌아올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뀐 저택에 스스로 돌아온 로렐라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
정말 성가시게 하는군. 순간 굳게 닫힌 입술을 비집고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멀찍이 서 있던 수하는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펠리어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부인.”
그의 입가에는 실로 오랜만에 엷은 미소가 스며 있었다. * * * 펠리어트가 다녀간 이후,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결혼식 때 신부 측 하객으로 참석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척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모조리 연락을 취했다. 펠리어트가 루이스를 어떻게 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빠가 없는 동안에는 내가 메이레드 가문의 일을 책임져야 한다. 그것에 반감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확인해야 했다. 혹시 그들 중 루이스와 한통속인 사람이 있다면 나를 해코지할 수도 있단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모두 루이스의 ‘루’ 자도 꺼내지 않았고, 그간 딱히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지금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잘 지내자는 말이 정중하게 포장되어 돌아왔다.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다들 나를 불편해하는…… 아니, 조금 무서워하는 느낌이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짐을 조금 덜어 낸 듯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암울했다. 그 뒤에 찾아온 두 번째 시련 때문이었다. 루이스가 쓰던 서재에 앉아 명단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앞에 선 집사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나…… 많아요?”
“죄송합니다, 로렐라 님.”
집사는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그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바짝 끌어올렸다.
“괜찮아요. 예상했던 바예요.”
……젠장!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울고 싶다! 내가 들고 있던 건, 저택 고용인 중 퇴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이제부터 나 혼자 지낼 저택에 쓸데없이 많은 인력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럴 돈도 없었고. 그래서 혹시나 그만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는데……. 대다수가 그만두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지! 퇴직금 주다가 파산하는 거 아냐?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앞길이 막막해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손으로 수십 장의 퇴직서에 차례차례 인장을 찍어 나갔다. 퇴직 사유는 대부분 비슷했다. 상습적인 임금 체납, 너무 과도한 업무, 예전 고용주의 지나친 인격 모독……. 이 개똥 같은 루이스 놈, 죽여도 시원찮을 루이스 놈! 도장을 찍는 내내 입에선 계속 중얼중얼 욕설이 튀어나왔다. 지급해야 할 퇴직금 금액이 커질수록 욕의 수위는 점점 더 높아졌다. 나는 결국 옆에서 열심히 서류 정리를 돕던 집사를 조심스레 불렀다.
“저기, 집사…….”
“네, 로렐라 님. 왜 그러시는지요?”
“저거, 전부 팔아 줘요.”
벽을 가리키는 내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노집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벽의 장식들을 말입니까? 하지만 저만한 보석들은 두 번 다시 구하기 힘드실 텐데요. 게다가 모조리 떼어 내고 나면, 그 자리에 보기 흉한 구멍이 생길 텐데…….”
“돈이 모자라서요…….”
울먹이며 말하자 집사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곧 하얀 눈썹을 축, 아래로 늘어트린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용인들 서류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집사가 불러들인 업자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마치 초원을 휩쓰는 메뚜기 떼처럼, 빛나는 모든 것을 찾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 갔다.
“하, 하핫…….”
순식간에 색채를 잃어버린 내부를 둘러보며 나는 시큰해져 오는 눈가를 문질렀다. 그래도 억지로나마 웃을 수 있었던 건, 응접실 한쪽을 차지한 커다란 장식장 덕분이었다. 그 안에는 비싼 도자기부터 크리스털 만년필, 심지어는 금 식기까지 그득 들어차 있었다. 그래, 이거라도 남은 게 어디냐! 구멍 뚫린 벽은 벽지로 가려 버리면 그만이다. 정 보기 흉한 곳은 화가를 불러 벽화라도 그리지, 뭐. 제목은 ‘탐욕의 결과’ 혹은 ‘분수에 맞는 소비’ 같은 게 어떨까. 심란한 마음을 감추며 괜한 잡생각을 이어 가던 그때였다. 또다시 불길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렐라 님…….”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죽을상을 한 집사가 또다시 날 찾아왔다.
“왜, 왜 그래요?”
“저택을 공사한 업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네?”
“밀린 대금을 달라고…….”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내게 조용히 서류를 내밀었다. 저택 공사 견적서였다. 아래에 있는 숫자의 0을 세어 나가던 내 입이 떡 벌어졌다. 저번 생에서도, 부유했던 공작저에 있을 때조차 본 적 없는 금액이었다.
“이런 개……!”
콰앙! 거친 욕설의 뒷부분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것으로 대신했다. 손날부터 시작해서 팔꿈치까지 저릿한 느낌이 퍼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결국 졸도하듯 소파 구석에 쓰러져 누웠다.
“꺼으윽.”
“로, 로렐라 님……!”
깜짝 놀라 허겁지겁 다가온 집사의 얼굴이 마치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세상에, 공사 대금을 반도 다 치르지 않았다니. 저택 공사 대금을 갚기도 전에 인테리어 공사부터 시작하는 미친놈이 여기 있었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분노의 눈물이 차올랐다. 빌어먹을 루이스 놈. 뚝배기를 수십 차례 두들긴 뒤 마지막으로 목을 비틀어 버려야 했는데! 너무 순순히 펠리어트에게 넘겨 준 건 아닐까 하는 후회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은 이미 벌어졌고, 수습은 내 몫인데.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장식장을 가리켰다.
“저것도 전부 팔죠…….”
“네…….”
집사는 이번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장식장 문을 열고,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그 안의 사치품들을 상자에 조심스레 담아 응접실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어느새 아름답게 진 노을이 빈 장식장 안에 쓸쓸히 스며들었다. 텅 빈 유리 위로 조용히 번지는 황금빛 햇살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흡.”
하지만 나는 짧게 침음을 삼키고는 곧바로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그리고 부러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괜찮아!”
아직 내겐 많은 게 남아 있으니까! 예를 들면 응접실에 놓인 이 화려한 소파!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다는 고가구! 고풍스러운 앤티크! 그래, 벽에 번쩍번쩍한 황금 칠갑이 되어 있거나 장식장에 온갖 보석을 줄지어 놓은 건 너무 졸부처럼 보인다. 비록 장식은 없지만, 누가 봐도 우아한 맛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저택이 주인공에겐 훨씬 더 어울릴 거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때, 또다시 노크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 문밖으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또 뭐야!”
이젠 문 두드리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생길 지경이라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치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문 앞에는 창백한 표정의 조이가 서 있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버릴 듯한 얼굴로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계속 일하기로 한 하녀들이 밀린 6개월 치 급여가 언제쯤 지급될지 궁금해해서…….”
아차.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얼른 조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용인들의 퇴직이 줄줄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몇몇 사람들은 나를 위해 퇴직금이라는 목돈도 마다하고 저택에 남겠다는 선택을 해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암담한 현실에 막막하기만 했던 내게 그들의 말은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감동에 취해 버린 나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던 약속을 해 버리고 말았다. 바로 6개월 치 임금을 한꺼번에 지불하겠다는 화끈한 공약을!
“아가씨. 저희는 그저 아가씨 곁에 있는 게 좋아서 남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살풍경하게 바뀌어 버린 응접실 안을 둘러보던 조이가 조심스럽게 제의했다. 하지만 내가 한 약속을 공수표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아니야, 조이. 약속은 지켜야지. 괜찮아.”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가구 팔면 돼.”
말을 끝낸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세게 이를 악물었다. 아니, 세상에! 주인공이 알거지라니! 하지만 나를 믿고 함께해 주겠다는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특히나 나를 도와주기 위해 험한 꼴까지 당한 조이 앞에서는 더더욱. * * * 저택 앞에 줄지어 선 마차에 포장된 가구들이 차례로 실렸다. 비싼 가구에 혹여나 상처가 생길까 조심조심 짐을 나르던 인부들은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 되어서야 모두 돌아갔다. 고풍스러운 가구와 값비싼 서적이 잔뜩 놓여 있던 서재에 남은 건, 다리 하나가 흔들리는 테이블 하나와 조이가 옛날에 어디선가 주워 왔다는 낡은 의자 하나뿐이었다.
“이런 거지 같은 세상!”
나는 씩씩거리며 재빠르게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 격분을 담아내기 좋은 일이 마침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펠리어트와의 혼인 무효를 주장하는 서신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듯한 분노가 가득 담긴 진정서가 완성되었다. 여왕 자리를 이어받기 직전 폐위된 왕녀도 이보다 더 분노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아…….”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을 끝내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이제 남은 건 레어넌 단장의 증언을 받는 것뿐이었다. 레어넌. 그 이름을 떠올리니 다급한 상황에 미뤄 놨던 또 다른 시름이 생각났다. 나는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슬그머니 시스템 창을 켰다. 「총 판매 주식 : 12,900주」 그동안 애쓰며 노력한 덕분인지, 주식은 벌써 1만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펠리어트가 돌아가고 나 혼자 저택에서 고군분투할 동안에 시스템 창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나는 투명한 창과 하얀 편지지를 번갈아 바라보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단장님께…… 만나자고 해 볼까?”
그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하소연도 할 겸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정한 그라면 틀림없이 날 위로해 줄 것이다. 더불어 그때를 놓치지 말고 주식도 팔아야지! 그렇게 결심하고선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다시금 펜을 쥔 그때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의자는 새 걸로 하나 장만하는 게 어때?”
갑자기 등 뒤에서 측은함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들으면 다정하게 느껴지지만, 어딘지 장난기 섞인 목소리는 무척이나 낯익은 것이었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본 것도 잠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잘 만났다!”
그러고는 역시나 아무도 없던 내 뒤에 갑자기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던 위너드에게 달려가 덥석 멱살을 잡았다.
“갇혀 있는 날 모른 척하고 그냥 가 버렸겠다?! 내가 그렇게 애원했는데, 그걸 무시해?”
“자, 잠깐. 로렐라. 규정상 어쩔 수 없…….”
“닥쳐! 이 나쁜 새끼야!”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갈색 머리를 보니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안내자라면서! 날 돕겠다면서!”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었다.
“컥, 흡……! 그, 그래서 내가…….”
위너드는 연신 쿨럭거리며 띄엄띄엄 말문을 열었다.
“너를 도와……주려고, 윽……. 이렇게 왔는데…….”
“도와주긴 뭘 도와줘! 이제 와서!”
“네 라이벌이 누군지…… 궁금할 것 같아서…….”
아예 목을 졸라 버릴 기세였던 손이, 그 순간 우뚝 멈췄다.
“라이벌……?”
나도 모르게 되뇌는 사이, 위너드가 잽싸게 내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그래, 라이벌.”
화려한 실크 크라바트를 다시 고쳐 맨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능글맞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동양의 어느 나라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며? 다른 주인공 후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면 네게도 도움이 될 거야. 나랑 같이 보러 갈까?”
마음 같아선 얄미운 그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한 번 휘둘러 주고 싶었지만, 몸은 멋대로 움직였다. 나는 내게로 내밀어진 그의 손을 맞잡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