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사자도 굶으면 풀을 뜯는다.2021.08.18.
“억, 허윽…….”
맨몸으로 벽에 던져진 충격이 컸는지, 루이스는 다 죽어 가는 동물처럼 끙끙대며 바닥을 기었다. 하지만 펠리어트는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심히 옆을 지나쳤다. 펄럭이는 검은 망토가 내게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
나는 도망치긴커녕, 눈동자조차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저 못 박힌 듯 자리에 주저앉아 마른침만 삼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그의 발이 내 무릎 앞에 멈춘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기운이 내 몸을 짓눌렀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바로 졸도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혼하자고 얘기했을 때도, 호숫가에서 내가 폭언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진짜 열 받은 게 틀림없다. ‘북부 대공’이라는 키워드에 ‘진짜 열 받음’을 조합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등줄기에 소름까지 돋았다. 소설로 읽을 땐 제발 더 하라고 외쳤는데, 내가 미쳤지! 그때, 내 가까이에서 천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지만, 눈을 감고 있던 탓에 신경이 잔뜩 곤두서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볼품없이 날아가 벽에 처박히던 루이스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쩌면 나는 더 멀리 날아갈지도 몰라. 아니면 이대로 개처럼 끌려가거나……. 두 눈을 감고 있으니, 공포감은 점점 더 극대화되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슬며시 실눈을 떴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내 얼굴로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잘게 떨렸다. 두려움에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혹시 때리려고?! 그러나 펠리어트는 잔뜩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뒤로 넘겨 줄 뿐이었다. 손길은 조심스러웠으나,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여전히 형형했다. 잔뜩 성이 난 맹수 같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마치 탐색이라도 하듯 내 얼굴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한참이나 배회하던 눈길은 목 언저리에서 우뚝 멈추었다. 순간, 잔잔한 수면처럼 무표정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펠리어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작게 읊조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뚜벅, 뚜벅. 발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루이스가 있었다. 루이스는 펠리어트를 발견하고는 곧장 도망치려 했지만, 무용한 일이었다. 그의 머리는 또다시 큰 소리와 함께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으니까.
“아아악!”
“감히 내 아내에게 함부로 손을 대다니. 두려운 게 없는 모양이야, 메이레드 백작.”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짓눌렀다. 루이스는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죽은 벌레처럼 바닥에 바짝 엎드려 싹싹 빌었다.
“고, 공작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컥, 제발 살려 주십시오!”
“내 것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되는지, 이 기회에 똑똑히 알아 두는 편이 좋겠군.”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나는 이제 당신 아내가 아니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공작의 수하들마저 숨을 죽인 채 마른침만 삼킬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맴돌았다. 펠리어트는 루이스의 머리 위에 얹은 발에 힘을 주어 누르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이미 네 병사들은 잘 알고 있을 거야.”
“네……?”
“곧 만날 테니, 가서 물어봐.”
“자, 잠깐……!”
그 짧은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눈치챈 루이스는 기겁해 발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마구 발버둥 쳤다. 물론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펠리어트의 고갯짓 한 번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다가와 그의 양팔을 낚아챘으니까.
“공작! 공자아악!”
루이스는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끌려 나갔다. 멀리 사라져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내 고요함이 찾아왔다. 부서진 문 앞에 남은 사람은 이제 나와 펠리어트, 둘 뿐이었다. 그는 내 곁으로 다시 다가와 입술을 열었다.
“일어나.”
“…….”
“그러게 왜 도망을 쳐서 이런 꼴을 당해.”
아니, 지금 뭐라는 거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뾰로통하게 입술만 내민 채 말없이 웅크리고 있자, 펠리어트가 낮은 한숨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잡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히 다리가 저려 왔다. 나는 결국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자,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복도가 나타났다. 루이스와 그의 병사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숨 막히는 공기를 참아 가며 말없이 복도를 가로지른 것도 잠시. 저 멀리 고용인들이 겁먹은 얼굴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나와 펠리어트를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흩어졌다.
“아가씨……!”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온 사람은, 아까 나를 도와주려 했던 하녀 조이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내 곁에 선 펠리어트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덜덜 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곁에 서 있던 수하와 몇 마디 귓속말을 나눴다. 그러고는 날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메이레드 백작의 신변은 내가 맡도록 하지. 여기엔 두 번 다시 얼씬거리지 못할 테니 안심해.”
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펠리어트라고 해도 ‘백작’의 신분인 루이스를 함부로 할 수는 없을 텐데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펠리어트는 내가 뭘 물어보기도 전에 서늘한 눈빛으로 아직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눈치를 보고 있던 고용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무겁고 험악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만약 남몰래 그를 돕거나, 허락 없이 연락을 취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정면으로 거스르겠다는 뜻으로 간주하겠다.”
고용인들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지금 상황에서 말이라도 잘못했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탓이겠지. 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걸까. 물론 오빠 놈을 대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부터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건지 알고 싶을 뿐.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그 순간, 펠리어트가 갑자기 휙 몸을 돌려 버렸다.
“자, 잠깐만!”
나는 그대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그를 황급히 따라갔다. 그러나 그는 속도를 늦추지도,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걷기만 했다.
“펠리어트……!”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처음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조금씩 거리가 벌어졌다. 이러다가는 아예 놓쳐 버릴 것 같아 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자 그제야 비로소 발걸음이 멈췄다.
“왜 그러지?”
펠리어트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차가운 얼굴은 언제 분노했냐는 듯, 무표정해서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드디어 공작저로 돌아갈 마음이 생긴 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혹시라도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손을 마구 내젓자, 그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럼 대체 왜 부른 거지?”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줘야겠어. 당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오빠랑 협력했던 거 아니야? 근데 왜 갑자기…….”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펠리어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수하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들이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서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당신이 오빠를 시켜서 날 가두라고 지시한 거잖아!”
루이스가 한 말이나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펠리어트가 무슨 수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겠는가. 잠시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리어트는 어느새 표정을 지우고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어. 당신이 찾아오면 내게 알리라는 서신을 보냈을 뿐이야.”
“뭐?”
지금 나보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어이없는 변명에 기가 찼다. 나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도, 호숫가에서 봤던 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정교한 자수가 수 놓인 단정한 검은색 정복은 금욕적이면서도 묘하게 화려한 느낌을 주었다. 진짜 돌로 만들어진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단단해 보이는 넓은 어깨는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겁먹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시선을 좀 더 위로 올렸다. 그러자 날카로운 턱선, 선이 곧은 콧대, 그리고 오늘따라 유달리 깊은 듯한 검은색 눈동자가 들어왔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감탄했을 수려한 얼굴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일부러 적의를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눈을 맞춰도 보았지만, 펠리어트는 피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다시 눈을 돌려 주위를 살피니, 마침 나무로 만든 창을 들고 있는 실물 크기의 기사 상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하는 말은 못 믿어.”
나는 얼른 그쪽으로 달려가 창을 덥석 잡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대체 날 어떻게 할 셈이야? 억지로 데려갈 생각이라면 포기해!”
아니, 잠깐만. 그런데 이거 안 빠지잖아! 낭패다. 당혹감을 애써 감추며 창을 두 손으로 마구 흔들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
그렇게 낑낑대고 있는데,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더니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른세수를 한 차례 한 펠리어트가 이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생각 없으니 안심해, 로렐라.”
“……뭐?”
“물론 처음엔 강제로라도 데려갈까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어.”
“왜, 왜?!”
나는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예상했던 대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무지 믿지 못할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딱딱하게 다물렸던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분명 그린 듯한 미소였는데도 따뜻하기보다는 살얼음처럼 차갑게만 느껴졌다.
“당신 스스로 돌아오게 만드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뭐……?”
“그래야 만족스러울 것 같거든.”
“허!”
너무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와, 이거 미쳐도 완전 다각도로 미친놈이네. 왜 하필이면 이런 진성 사이코랑 엮여서……. 띵동! 그런데 그때, 어김없이 들리는 종소리가 상념을 끊어 냈다.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300주 구매했습니다.」 「존맛, 베리 딜리셔쓰, 하오츠.」 허공에 나타난 터무니없는 메시지에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니. 미쳤나 봐, 진짜.”
나는 기가 찬 나머지 그만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저게 뭐가 맛있어, 저게! 혹시 똑같이 다각도로 미친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저런 걸 먹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무, 물론 나도 맛있게 먹던 적은 있지만……. 아무튼, 주식이 팔렸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레어넌과 함께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리 급해도 이런 주식은 팔지 않을 거야. 나는…… 그러니까 사자는 배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다고!
“그래, 미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로렐라.”
내 혼잣말을 본인한테 한 말이라고 오해했는지 펠리어트가 한 발자국씩 내게로 다가오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은 필요 없어. 내 손길, 내 눈이 닿는 곳에 있을 아내가 필요한 거지.”
띵동, 띵동! 기다렸다는 듯 종소리가, 그것도 연달아 울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펠리어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린 탓이었다.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내 시야에 닿는 곳에 있길 바라. 그렇지 않으면…….”
마치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펠리어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나직하게 내려앉았다.
“역시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이 더 낫겠단 생각이 들지도 모르니까.”
“뭐, 뭐얏?!”
나는 그의 손을 탁, 쳐내며 말꼬리를 날카롭게 올렸다. 진짜 세포층부터 삐뚤어진 놈일세! 정말이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집착이었다. 여태 집착남이 나오는 소설을 읽으며 왜 그렇게 열광했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역시 배고파도 풀 따위는 절대 뜯…….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코피를 뿜으며 9,000주를 구매합니다! 신기록입니다!」
“뜨더어억!”
먹을지도 몰라!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9천?! 미친, 진짜 9천 주라고? ……이 선생님은 진심이셔! 나는 흥분한 나머지 펠리어트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발을 동동 굴렀다.
“로렐라?”
펠리어트가 또다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그가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그 손을 쳐 내지 않았다. 대신 마른침을 삼키며 더듬더듬 입술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사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고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 멋대로 내뱉어졌다.
“당신이 날 억지로 끌고 가려 해서…… 싫었던 거야. 함부로 대하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숨거나 사라질 일은 없을……지도.”
“뭐……?”
그래, 사자도 배고프면 별수 있나! 꽃도 먹고 풀도 먹고 할 수도 있지!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빠른 태세 전환이었지만, 나는 이미 주식의 노예였다. 이런 큰손을 그냥 놓칠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죽어도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펠리어트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아니, 눈동자뿐만이 아니었다. 내 턱을 살짝 잡은 그의 손에서도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어내는 나는 그저 죽을 맛이었다.
“어쩌면 다, 당신 곁이 싫은 게 아니라…… 그 집이 싫어서 이러는 걸지도오…….”
어쩜 대사 하나하나가 이렇게 조오…… 아니, 주옥같을까.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말끝이 저절로 기어들어 갔다. 손발이 오그라든 것은 물론, 차마 두 번은 입에 담지 못할 치욕스러운 말을 읊어 대자니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니, 억울하기도 했다.
“흡…….”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주식이 원수다. 즌쯔 즈슥믄 으느믄! 이를 악물고 버티던 그때, 눈물로 아롱진 눈가에 무언가 다가왔다. 장갑을 벗은 펠리어트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얼굴에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그저 망설이는 듯, 얼굴을 매만지는 대신 허공을 스칠 뿐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이내 먼저 손을 떼고 등을 돌린 건 펠리어트였다.
“……기억해 두지.”
뒤돌아선 그에게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싸늘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사람에게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목소리였다. 말을 끝낸 뒤, 빠르게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던 기사들 역시 그의 뒤를 쫓았다. 검은 망토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정 일색인 갑옷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편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 * * 메이레드 백작가의 하녀 조이는, 온종일 혼이 쏙 달아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도 제법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건만, 오늘처럼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처음이었다. 귀한 몸이 된 아가씨가 소식도 없이 찾아온 것에도 놀랐는데, 백작님이 그녀를 갑자기 지하 감옥에 가뒀을 때는 정말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것도 모자라 갑자기 들이닥친 체임버스 공작은 아가씨를 감옥에서 꺼내자마자 백작님과 병사들을 모두 잡아가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믿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놀란 건 조이만이 아니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저택의 고용인들은 잠자리에 들긴커녕 삼삼오오 모여 낮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쑥덕대었다. 체임버스 공작이 온 이유는 무엇일지, 대체 공작 부인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도대체 백작은 어디로 끌려간 건지 나눌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조이는 그 안에 끼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굳게 닫힌 침실의 문 앞. 그녀는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들고 한참 동안 서성였다. 체임버스 공작이 떠나자마자 로렐라 아가씨는 비척거리며 침실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힘없는 목소리로, 이제 그만 쉬고 싶다며 문을 닫았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누굴 부르지도 않았다. 피곤하셨을 게 당연하니, 푹 쉬게 해 드리고 싶지만…… 핏기라곤 하나도 없던 새하얀 얼굴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가여운 우리 아가씨.’
로렐라를 떠올리니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늘 허드렛일만 도맡아 하던 저를 처음으로 따듯하게 대해 준 사람이 바로 로렐라 아가씨였다. 친절한 그녀는 난폭한 백작과 달리 저택의 하인들에게도 항상 상냥했다.
“그랬던 아가씨가, 백작님의 머리를 몇 차례나 후려치다니.”
아무래도 북쪽 땅의 거친 기운에 영향을 받아 성격이 변하신 것 같다며 떠들던 집사의 말이 생각났다. 조이 역시 어느 정도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녀는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 믿었다. 마음이 여렸던 아가씨는 지금쯤 홀로 베개를 적시며 떨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가씨.”
조이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노크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주무시나 봐.’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린 찻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숙면에 도움이 된다며 로렐라가 제일 좋아하던 차였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따라 드리고, 곁에서 위로해 드릴 생각이었지만 차라리 잠들어 푹 쉬고 계신다면 다행이었다.
‘아가씨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들어가서, 침대 옆 테이블에 살짝 놓아 드리자.’
결심을 마친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아오! 씨바!”
열린 문틈 사이로 날 선 괴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저 멀리 침대 옆에서 실크 방석이 허공 위를 나는 게 보였다. ……로렐라 아가씨는 깨어 있었다. 오로지, 벽을 향해 미친 듯 방석을 집어 던지고 있을 뿐. 주위에 방석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자, 그녀는 이번엔 비싼 오리털 베개를 집어 들었다.
“씨바아아아!”
퍽! 퍽! 그러더니 욕을 퍼부으며 베개로 침대 기둥을 마구 내리치는 게 아닌가……?
“제발 집착광공 좀 그만 처먹어! 이딴 걸로 9천 주나 주지 말라고!”
조이는 그만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당신 곁이 싫어서가 아니라니. 싫어서가…… 아아악!”
산발이 된 붉은 머리와 핏발 선 두 눈, 그리고 쉴 새 없이 터지는 악다구니. 달달 떨리는 손 때문에 찻물이 결국 쟁반 위로 넘쳤다. 하지만 조이는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놈의 주둥이! 이 미친 자본주의 주둥이! 죽어 버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깃털들이 베개에서 터져 나와 함박눈처럼 허공을 수 놓았다. 조이는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입을 황급히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