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감히 누가 이랬지?2021.08.14.
“흐으읍!”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창살을 양쪽으로 벌렸다.
“끄으으윽!”
어찌나 힘을 줬는지 뿌드득, 이 가는 소리까지 들렸다. 머리로 순식간에 뜨거운 피가 몰렸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갖은 애를 썼지만…… 역시 무리였다. 무식하게 단단한 쇠창살은 벌어지긴커녕,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돼, 못 하겠어!”
결국 나는 격한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두 다리에 힘이 빠져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마저도 바닥에 끈적한 오물들이 군데군데 묻어 있어 맘 편히 앉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나가란 말이야!”
나 홀로 갇혀 있는 상황이라 주식을 팔 수조차 없는데! 쿠키를 얻으려면 주식이든 뭐든 팔아야 할 거 아냐! 그런데 뭐? 믿는다? 파이티잉?!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안내자라는 놈이 뭐 그따위야!?”
도움이 하나도 안 되잖아, 도움이!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어깨를 웅크렸다. 벽 틈 사이로 느껴지는 한기에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대체 여기에 얼마 동안 갇혀 있었던 걸까.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으니 시간관념 자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 홀로 고립되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듯했다.
“……쿠키만 있었더라도.”
갑자기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코를 훌쩍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상가상으로 쿠키를 떠올리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까지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는 발소리도 이어졌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뭐지?’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내가 갇혀 있는 곳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딱 한 사람뿐일지도 모르겠다. 만나면 제일 달갑지 않을 그 사람. 어둠뿐이었던 지하에 빛 그림자가 아롱졌다. 빛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이윽고 발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예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촛불과 어두운 램프의 빛이 붉은 머리카락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도자기로 내려친 정수리에 동그란 얼음주머니를 얹은 꼴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쯧. 이게 무슨 꼴이냐, 로렐라.”
촛불을 들고 철창 가까이에 다가선 루이스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혀를 찼다. 굳이 코앞까지 다가와 얄밉게 이죽대는 놈의 면상을 보니 또다시 분노로 손끝이 떨려 왔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너도 깨닫는 게 있었겠지.”
“무슨 깨달음. 하나뿐인 가족이 쓰레기라는 깨달음?”
기다렸다는 듯 쏘아붙이자, 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반성을 좀 했을까 싶었는데, 아직도 그딴 말을 지껄이다니……!”
루이스는 삿대질까지 해 가며 목청을 높였다.
“넌 배가 부른 거냐, 아니면 생각이 없는 게냐?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공작가에 시집 보내 줬더니, 그 행운을 걷어차려고 해? 그 머린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모양이구나.”
“호의호식이라니, 지금 장난해? 겨우 그따위 생각밖에 못 하는 대가리를 달고 다니는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장식 운운하는 거야!”
이제는 화가 나기보다도 짙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예 처음부터 돌로 내려칠 걸 그랬어. 아니, 차라리 두 다리를 분질러 버릴걸! 그랬다면 최소한 저 낯짝을 들고 돌아다니진 못했을 텐데! 그때 루이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음산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네게 이용 가치만 없었어도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이것도 장난 같으냐?”
“어디 한번 해 보시지.”
서로를 잡아 죽일 듯한 시선이 공중에서 매섭게 부딪쳤다. 이쯤 되면 남매가 아니라 원수보다 못한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루이스였다.
“그동안 호화롭고 으리으리한 공작 저택에서 안락하게 지낸 주제에, 뭐가 그리 불만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
그는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근엄한 말투로 꾸짖었다.
“우는 소리도 한두 번이지, 정말로 길거리에 나앉게 되어서야 정신을 차릴 셈이냐?”
“뭐……? 안락?”
너무 황당한 탓에 눈꺼풀과 목소리가 함께 파르르 떨려 왔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내가 그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지냈는지?”
물론 여동생에게 관심이 없을 수 있다. 나 역시 딱히 놈을 가족이라고 여기진 않았으니까.
“설령 네가 푸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그게 뭐가 대수라고. 너 하나만 참으면, 한몫 단단히 잡을 기회가 생기는 건데.”
하지만 이 미친 돼지 새끼가 제멋대로 헛된 망상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잘 생각해 봐라, 펠리어트 공작이 전장에서 공을 세운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호기라고. 이 좋은 기회를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다 놓칠 셈이냐?”
루이스는 내 행동이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그저 네, 네 하고 인형처럼 웃어 주면 그만인데, 이처럼 쉬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어? 별것도 아닌 일, 나라면 평생토록 하고도 남겠다.”
듣고만 있다간 내 어금니가 먼저 부서질 것 같았다. 이런 개소리를 듣고도 죽빵을 날리지 못한다니. 이를 득득 갈다 못해 화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인형처럼 웃어? 평생 할 수 있는 쉬운 일? 공작저에서 지낸 나날들이 떠올랐다. 엠마 체임버스는 나를 볼 때면 항상 못마땅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녀는 이마와 콧잔등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질까 봐 평소엔 억지로나마 표정을 관리하면서도, 나를 대할 때만큼은 아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훑어 내리는 시선에는 늘 멸시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마치 하찮은 벌레를 보듯이. 2년 내내 그런 눈초리를 받은 것도 모자라,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당했다. 입고 먹는 모든 것에도 간섭했고, 심지어 본인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엔 왜 홍차가 아닌 커피를 마시냐며 몇 시간씩 사람을 세워 놓고 들들 볶았다. 차 한 잔도 마음 편히 마시지 못했던 지옥 같은 나날들. 만약 이혼하겠다는 목표마저 없었다면, 아마도 미쳐 버렸을 것이다.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하여튼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그런 네게 딱 맞는 장소니 그 안에서 좀 더 반성하도록 해라!”
“잠깐!”
나는 혀를 쯧, 차며 돌아서려는 루이스를 황급히 잡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좋은 기회라니,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왜 목숨을 걸고 그 집안에서 도망친 건지 모르겠어? 누군 떵떵거리며 살고 싶지 않은 줄 알아?”
그래, 일단은 내 힘으로 감옥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이 자식은…… 그다음에 죽이자! 그 생각만으로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빠르게 말을 내던졌다.
“어서 혼인 무효에 관한 진정서를 황궁에 제출하지 않으면 메이레드 가문까지 끝이라고! 증인도 있으니까,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돼.”
“뭐……?”
루이스의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뭐, 뭐야? 증인이라니, 그게 누구냐. 대체 누가 감히 공작가 일에 간섭을……!”
저 멍청한 게 짜증 나게 말귀를 못 알아먹네! 포인트는 그게 아니라고!
“그게 뭐가 중요해! 체임버스 공작가는 이제 폭삭 망할 일만 남았어. 빨리 손절 하지 않으면 나는 물론이고 너도 같이 끝이라니까!”
나는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문을 걷어찼다. 루이스가 순간 뒤로 물러설 정도로 거센 발길질이었다. 홧김에 찬 거긴 하지만, 덕분에 제법 그럴듯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
루이스는 혼란스러운 듯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코웃음을 쳤다.
“공작이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건 온 제국민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공작가가 폭삭 망한다고? 같잖은 수작 말아라!”
“제국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나보다 그 집안 속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철장을 꽉 쥔 채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그가 공을 세운 건 맞아. 그런데 그걸로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게 문제야. 그것도 황실을 상대로…….”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호숫가에서 내가 욕하는 걸 본 게 한둘이 아니라며? 그 사람들이 그때 펠리어트의 꼴이 어땠는지는 말 안 해 줬나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이 왜 그렇게까지 날 찾아 헤맸을까?”
루이스가 호숫가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다는 건, 그날 일이 사교계에 이미 퍼졌다는 걸 뜻했다. 레어넌 기사단장의 이야기도 분명 나왔겠지만 루이스의 관심은 아마 나와 펠리어트뿐이었겠지. 사교계 소식통들은 내가 했던 말만큼이나, 펠리어트의 차림새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떠들어 댔을 것이다. 그날 그는, 내가 봐도 깜짝 놀랄 만한 거지꼴을 하고 있었으니까. 역시나, 내 예상은 적중한 듯싶었다. 루이스의 동공이 잠깐이지만 분명하게 흔들렸다.
“지금까지 이 난리를 친 건 오라버니가 완전히 펠리어트 쪽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서……요.”
나는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슬쩍 존대를 붙였다. 누가 봐도 어색한 변화였지만, 루이스는 생각이 많은 탓인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가 날 쫓는 건 단순히 가출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이게 다 내가 그 인간의 ‘약점’을 쥔 탓에…….”
그리고 일부러 특정 단어에 힘을 주며 말을 잇다가, 짐짓 놀란 척 입을 막았다. 그러자…….
“약점……? 그게 뭔데?”
루이스가 미끼를 물었다. 미간 사이는 여전히 구겨져 있었지만,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 것이 아니라 답답한 마음에 그러는 듯했다.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일단 어서 말해 보거라! 뭔지 알아야 내가 이용…… 아니, 도와줄 수가 있지!”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감옥의 자물쇠를 가리켰다.
“절 풀어주시면 전부 털어놓을게요.”
“뭐……?”
“조건이 대등하지 않잖아요. 정말로 펠리어트와 작당해서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캐내려는 거 아녜요? 만약 정보만 쏙 빼먹고 계속 가둬두기라도 하면 전 어떡하냐고요!”
내 말에 루이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어딘가를 눈짓하며 경고했다. 멀기도 하고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문이 있는 쪽일 것이다.
“행여나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라. 병사들이 앞을 지키고 있으니 어차피 도망가는 건 무리야.”
“그런 생각 안 해요.”
자물쇠를 풀고 쇠사슬을 걷어 내는 소리가 정적 속에 조용히 울렸다. 이윽고 철컹, 문이 열렸다. 루이스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다가왔다.
“자, 이제 말해 봐라.”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한쪽 무릎을 직각으로 세웠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뭘 하는 거야? 어서 말해 보래두.”
“아, 잠깐만. 위치만 좀 잡고.”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루이스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귀를 깨무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여기엔 머리를 후려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러니 남은 건…… 오로지 딱 하나뿐이었다.
“위치라니, 무슨 위치?”
놈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진 그때였다.
“여기인 것…… 같은데!”
제발 빗맞지 않기를 바라며, 무릎을 쳐올려 놈의 중심부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루이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흐…… 흡……!”
기대했던 단말마의 비명은 아니었지만, 파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루이스가 앞으로 쓰러지며 쿵!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커……헉.”
루이스는 마치 엎드려 비는 사람처럼 양손과 양 무릎을 바닥에 얌전히 붙이고선 가쁜 숨을 토해 냈다. 나는 그 틈을 타 뾰족한 하이힐 앞코를 세워 다시 한번 놈의 옆구리를 세게 걷어찼다. 퍼억!
“헉!”
“오빠라는 새끼가! 뭐? 팔자를 펴? 인형처럼 웃고만 있으라고?!”
퍽!
“공작가가 그렇게 좋으면 니가 펠리어트랑 살든지!”
연달아 걷어찼으나 루이스는 쥐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길질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보아도 작은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그를 뒤로한 채 재빨리 몸을 돌려 감옥 밖으로 뛰쳐나갔다. 분이 풀리려면 한참은 더 때려야겠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탈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내겐 관문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바로 문 앞에 있는 병사들이다.
“멈추십시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자마자 당황하여 우악스럽게 외쳤다. 그러고는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어디다 손을 올려.”
나는 손이 닿기도 전에 싸늘하게 말했다.
“감히 네까짓 것들이 공작 부인인 내게 손을 대? 좋아, 어차피 곧 펠리어트가 올 거고, 그러면 내 가출도 끝나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못다 한 분이라도 풀어야겠어.”
공작 부인. 그 한 마디에 병사들의 몸짓도 멈췄다. 루이스의 명에 따르느라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너희들 얼굴은 전부 기억해 놨으니까 기대해. 공작저로 돌아가기만 하면 바로 불러들여서 대가를 치르게 만들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썩 비켜!”
병사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숨긴 채 최대한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재빨리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밖으로 향하는 문손잡이를 잡은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괴물처럼 달려오는 사나운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려고……!”
문을 열고 나가려 했으나, 갑자기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내 목을 난폭하게 움켜쥐었다.
“악!”
생각지도 못한 봉변에 놀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이 반대쪽으로 거칠게 돌려졌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쫓아온 건지 루이스가 내 눈앞에서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 이거 놔!”
“내게 두 번이나 손대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응?”
루이스는 위험한 미소를 띤 채 손아귀를 더욱 옥죄었다. 목을 거세게 누르는 힘에 점점 숨이 막혀 왔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는 그다지 체구가 크지 않았고, 손도 작은 편이었으나 온 힘을 다해 짓누르는 남자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아깐 나더러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오빠라는 새끼가……. 흡, 그렇게 좋으면 니가 펠리어트랑 살아…….”
비록 목이 졸려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그가 요구한 대로 내가 했던 말을 또박또박 읊어 주었다.
“네년이 정말 한번 해 보자는 거구나.”
사납게 내뱉는 말만큼이나 거친 힘이 덮쳐 왔다. 하지만 이미 진이 다 빠져 버려 발길질조차 할 수 없었다.
“백작님……!”
혼비백산한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의 팔을 잡는 게 보였다. 그래, 쟤들이 있으니까 적어도 죽진…… 않겠지? 하지만 내 목을 쥔 손아귀에서는 힘이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학…….”
또다시 숨이 막혀 와,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 그때였다. 쾅!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나무 문이 부서져라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니, 정말로 부서졌다. 그제야 날 거칠게 붙잡고 있던 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좁은 목구멍이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캑캑거리던 내 눈앞에 부서진 나무 조각이 보였다. 그것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절도 있는 발소리가 귀를 잡아끌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린 순간, 커다랗고 위협적인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누구…….’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빛을 등진 채 서 있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양옆으로 늘어선 기사들 사이로 남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왔을 때.
“펠리어트 공작!”
그를 반기는 루이스의 외침과는 달리, 내 두 눈은 절망과 비관, 그리고 체념으로 질끈 감기고 말았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놈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펠리어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자리에 서서 바닥에 꿇어앉은 나와 루이스를 번갈아 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루이스를 향해 가볍게 검지를 까딱거렸다. 몹시도 고압적인 태도였는데도 루이스는 마치 은혜라도 입은 사람처럼 헐레벌떡 그의 곁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어떻습니까. 제 활약이……!”
그때였다.
“큭! 왜, 왜…… 이러는……!”
괴로운 듯 억눌린 신음을 내뱉는 루이스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저절로?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나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다시 살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인 펠리어트가, 루이스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다. 무겁지도 않은지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은 채. 지면을 딛지 못한 루이스의 두 발이 허공에서 애처롭게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으아악!”
놈의 몸이 마치 허수아비처럼 붕 날아가 그대로 벽에 꽂혔다. 쿵! 하는 둔탁한 소음 뒤로, 싸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감히 내 아내를 이따위 곳에 억지로 감금해?”
으득, 이를 가는 익숙한 소리가 귓가에 스며들고,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저기요, 너도 그랬잖아! ……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