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저승으로 보내 버리겠다2021.08.11.
“헉, 헉……!”
금세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달렸다. 험악한 구둣발 소리가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었다. 심지어 발소리는 점점 더 늘어나기까지 했다.
“아가씨, 거기 서십시오!”
너 같음 서겠냐? 잽싸게 복도의 코너를 돌자 계단이 나타났다. 어디로 이어진 건진 모르지만, 일단은 아래를 향해 구르듯 내려갔다.
“후, 하아……!”
숲길을 달리느라 다친 발은 아직도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있어 달릴 때마다 쓰라렸다. 게다가 백작의 저택은 무식하리만치 넓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조금씩 지쳐 갔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아 멈출 수도 없었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사람들을 몸으로 밀쳐 가며 1층까지는 내려갔지만,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여긴 대체 어디지? 어디로 가야 할까? 불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아가씨, 여기예요! 이쪽이라고요!”
그녀의 어깨너머로, 활짝 꽃이 핀 정원이 보였다. 아무래도 외부로 나가는 출구인 듯싶었다. 나는 그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반대편에서도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역시 조이의 목소리를 듣고,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드레스에 높은 구두까지 신은 내가 잘 훈련된 병사들보다 빨리 달릴 순 없었다. 결국 내 앞을 막고 시간을 벌어 주려던 조이는 결국 병사들에 의해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꺄아악!”
조이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서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아서려 했지만, 깡마른 하녀 한 명이 건장한 장정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 안 돼!”
바깥 공기를 마셔 보기도 전에 쿵, 하고 문이 닫혔다. 동시에 내 어깨도 단단히 잡히고 말았다.
“이거 놔!”
온 힘을 다해 마구 저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빠져나가려 애쓰는 사이, 내 뒤에서 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뒤늦게 등장한 건 루이스였다.
“이 배은망덕한 년……!”
나와 조이를 번갈아 노려보던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조이의 고개가 거칠게 돌아갔다.
“오갈 데 없는 걸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감히 날 배신해?”
조이는 비명도 내지 못하고 얼굴을 감싼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
“뭐 하는 짓거리야! 또 손찌검했다간 봐!”
나는 소리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그녀를 걱정할 틈도 없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힘은 점점 더 거세졌다.
“놔! 놓으라고!”
“이봐, 너희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동생은 살살 다뤄라.”
루이스가 이죽거리며 명령했다.
“아직 공사 대금을 다 지불하지 못했는데 우리 공작 부인께서 다치시면 큰일이지. 크게 다쳤다는 소문이라도 돌았다간, 체임버스의 이름을 믿고 돈을 빌려주던 곳들도 사라질 거라고.”
그제야 나를 짓누르던 병사들의 손이 떨어졌다.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뭐, 뭐라고?”
나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설마 내 이름을 팔았어……?”
“오빠로서 그 정도는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거 아니냐. 게다가 이젠 제국의 영웅까지 되었으니, 펠리어트 공작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어.”
루이스가 다시금 히죽거리며 턱을 매만졌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가난했던 메이레드 백작가가 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나 화려한 저택을 샀는지, 왜 나를 방에 가두고 나가지 못하게 하려 했는지 전부.
“그보다, 로렐라. 목숨보다도 소중한 혼인 서약서가 타 버린 와중에 가출을 하다니…….”
경박하게 헤실거리던 입가가 순식간에 무섭게 굳었다. 표독스러운 눈초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대체 정신이 있는 거냐? 분수에 맞지도 않은 결혼을 하게 됐으면 죽을 때까지 감사하며 살 것이지, 감히 그따위 일을 벌여?”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에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새끼…… 펠리어트 앞에서는 찍 소리도 못 하기에 개복치인 줄 알았더니, 약한 사람 앞에서만 큰소리치는 쓰레기였잖아? 삼켜지지 않는 분노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심지어 크게 휘청이기까지 했지만, 고풍스러운 도자기가 줄지어 놓여 있는 장식 테이블을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호숫가에서의 그 추문은 또 뭐냐. 펠리어트 공작에게 온갖 욕을 하는 널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데. 내 얼굴에 그런 먹칠까지 하다니…….”
루이스는 나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서류에 다시 도장을 찍기 전까진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아라. 공작이 아니었으면 어느 늙은이의 후처 자리에나 들어갔을 계집애가 주제도 모르고…… 쯧.”
아, 이젠 한계다. 내겐 이런 더러운 말을 계속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닥쳐! 이 개쓰레기 새끼야!”
나는 손톱자국이 남도록 주먹을 꽉 쥔 채,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소리를 질렀다.
“저런 폐기물을 가족이라고 믿었다니. 내가 미쳤지!”
“뭐, 뭐라고……?”
루이스는 주제에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손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양손의 손가락에는 커다란 보석들이 박힌 반지가 줄줄이 끼워져 있었다. 그걸 보니 더욱 거센 분노가 일렁였다.
“오냐오냐해 줬더니, 네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구나. 곱게 넘어가려고 했더니, 건방진 게 주제도 모르고……!”
잔뜩 흥분한 루이스가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몹시도 위협적인 태도였다.
“개처럼 무릎을 꿇고 싹싹 빌도록 만들어 주마!”
그리고, 커다란 손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으려는 듯 뻗어 왔다. 나는 잽싸게 그 손을 피하며, 장식 테이블 위에 놓인 도자기 중에 손잡이가 달린 것을 덥석 집어 들었다.
“웃기고 자빠졌네!”
“어서 빌지 못하아악!”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루이스의 입에서도 커다란 비명이 터졌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도기가 그의 정수리 위에서 볼품없이 부서져 내렸다.
“으, 으윽……!”
놈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나 대신 양 무릎을 털썩 꿇었다. 순간 병사들이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내 양팔을 잡았다. 하지만 살살 다루라던 명령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내 분노 덕분인지는 몰라도 쉽게 뿌리칠 수 있었다.
“너…… 너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음 무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내 눈에 들어온 건 대리석을 깎아 만든 커다란 화병이었다.
“흡……!”
낑낑거리며 그것을 집어 들자, 놈이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 다들 뭣들 하는 거냐!”
루이스 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가린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외쳤다.
“이년을 어서 방으로 돌려보내…… 아니, 그냥 지하 감옥에 가둬 버려!”
아까보다 배는 많은 숫자의 병사들이 내게 다시금 우르르 몰려들었다. 붙잡히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지만, 무거운 화병을 들고 있어 여의치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화병을 내동댕이쳤다. 던져서라도 루이스의 머리를 깰 작정이었지만, 너무 무거워 멀리 날아가지는 못했다. 두꺼운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내 외침이 그 뒤를 따랐다.
“내가…… 내가 주인공만 되면, 너 같은 놈은 땅에 발 못 붙이고 살게 만들 거야!”
“……뭐?”
저택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놈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년…… 머리가 완전 돈 거 아니야?”
“설령 소멸되어 버려도, 네놈 새끼만큼은 내가 저승으로 보내고 말 거라고오오!”
울분을 담은 목소리가 넓은 복도에 메아리쳤다. * * * 병사들은 나를 쇠창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닥에는 더러운 물이 군데군데 고여 있었고, 한쪽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축축한 짚 더미가 쌓여 있었다. 빛이라고는 벽에 달린 램프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이곳은 누가 보아도 훌륭한 감옥이었다. 휘황찬란하고 고급스러운 저택 내부에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감옥이 있었다니. 철창으로 된 문에 쇠사슬을 칭칭 감은 뒤 커다란 자물쇠까지 채운 병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잽싸게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되자 감옥에는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간혹 들리는 거라고 해 봐야 어디선가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두고 보자, 망할 빨간 머리 백작 놈. 루이스의 머리를 깰 수십 가지 방법을 생각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들어 왔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더라니…….”
나는 애꿎은 이마를 벽에 박아 가며 분을 삭였다. 독자로서 소설을 읽을 땐, 주인공의 오빠가 조금만 이상해도 저 새끼 수상하다고 댓글을 수십 개도 넘게 달았는데. 사람은 왜 직접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할까? 주인공 멍청하다고 댓글 달았던 온갖 소설과 만화가 떠올랐다. 작가님들 죄송합니다. 그 여주인공들은 다 똑똑했어요…… 저보다 훨씬. 그러나 후회해 봤자 일은 이미 벌어졌다. 이러고 있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감옥에 적응이 되었는지, 비로소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틈새에서 꼭 뭐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더러운 벽에는, 거미줄이 잔뜩 쳐진 횃대가 걸려 있었다. 그마저도 절반은 다 삭아서, 스치기만 해도 떨어질 것 같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저택의 어느 쪽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끌려올 때 좀 자세히 보는 거였는데.
“쯧.”
나는 혀를 차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쇠창살을 손으로 쓸자, 거칠거칠하고 차가운 쇠의 촉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예전에 부순 철문에 비하면 이건 뭐, 거의 애들 장난이네.”
물론 그때는 쿠키의 힘이긴 했지만. 지금은 쿠키도 없고, 그걸 얻기 위해 주식을 팔 수 있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 입가는 어느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나는 숨을 한껏 크게 들이마신 뒤,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위너드!”
비록 보너스 쿠키는 없지만, 그 대신 나에게는 시공간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안내자가 있다고!
“위너드 벨드리안!”
안내자라는 건 분명 이럴 때를 위해 배정해 준 걸 거야, 틀림없이! 나는 그런 믿음을 담아 다시 한번 목청껏 소리쳤다.
“도움! 안내자!”
“……귀청 떨어지겠네.”
그때,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자, 예의 그 고급스러운 케인을 들고 벽 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장신의 남자가 보였다.
“역시 와 줬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그의 앞에 섰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사방이 막힌 감옥 안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내 부름에 응답해 줬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나 좀 도와줘, 응?”
처음 봤을 때 좀 얄밉다고 생각했던,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도와 달라니? 뭘?”
“농담하지 말고. 나 지금 그럴 기분 아니거든?”
나는 얼른 시스템 창을 켰다. 「총 판매 주식 : 8,600주.」
“자, 이것 좀 봐.”
그리고 두 눈을 빛내며 창 위로 시선을 고정시킨 위너드를 향해, 보란 듯이 으스댔다.
“이 놀라운 성과 좀 보라고.”
“그래, 네 활약은 나도 잘 봤지.”
위너드는 만족스러운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주 잘했어.”
그의 칭찬에 더욱 의기양양해진 나는 들뜬 마음으로 부탁했다. 아니, 말이 부탁이지 거의 통보나 다름없었다.
“일단 당장 여기에서 나가야겠어. 나 꺼내 줄 수 있지? 그리고 말도 준비해 줘. 저택 뒤편에 사람이 없으니까, 거기로…… 아니, 아니다.”
나는 얼른 정정했다. 괜히 말을 타고 나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지금 당장 나를 성기사단의 신전으로 보내 줄래?”
그곳으로 가면 날 도와줄 사람이 있으니까. 바로 레어넌 기사단장! 전남편뿐만 아니라, 친오빠 놈 또한 상종 못 할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퍽 창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라면 나를 편견 없이 대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한 거처가 확보되면, 고심해서 계획을 짤 예정이다. 나를 감쪽같이 속인 루이스 놈을 어떻게 하면 처절하게, 효과적으로 조질지. 놈을 치워 버리면, 자연스럽게 백작가도 내 손에 들어올 테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어?
“음.”
하지만 위너드는 멀뚱하게 선 채로 애매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뭐 해? 빨리 꺼내 달라니까.”
“물론 나도 꺼내 주고야 싶지. 그래, 그러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같은데…….”
그는 곤란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안내자가 후보의 상황에 직접 개입하는 건 엄격히 금지된 사항이라서.”
“어?”
“스스로 탈출하는 수밖엔 없어. 보상을 받든, 그도 아니면 힘을 써서 나가든 자력으로 해결해야 해.”
“뭐? 아니, 지금 그게 안 되니까 널 부른 거잖아!”
“아, 이제 그만 가 봐야겠다. 바쁜 일이 있어서.”
“야, 자, 잠깐만……!”
“잘해 낼 거라고 믿어, 로렐라.”
위너드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린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파이팅.”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앞에 휙,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어느새 감옥 안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컴컴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위너드는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었던 사람이 또다시 감쪽같이 사라진 거다.
“허……!”
황당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바쁜 일이라니? 아니, 나를 여기서 꺼내 주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이 어디 있다고!? 쇠창살 사이로 억지로 얼굴을 끼운 채 바깥을 샅샅이 살폈지만, 역시나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위너드! 아니, 뭐야. 진짜로 간 거야?!”
마치 거대한 동굴처럼, 어두운 감옥 안에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오, 그냥 가면 어떡해! 다시 좀 와 보라고!”
나는 급기야 철창을 잡고 마구 흔들며 소리쳤다.
“야, 이 개새꺄!!”
몇 번이고 소리쳐도 주위는 적막했고,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돌바닥 위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간혹 그 정적을 깰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