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2021.08.07.
관저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레어넌 단장은 아우레아에 있는 백작가까지 동행해 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단장님. 이 빚을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나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리고 문제가 생기거든……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목덜미를 문지르는 그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쑥스러울 때마다 하는 버릇인 것 같았다. 레어넌은 민망함을 지우려는 사람처럼 얼른 말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외부에 나가 있을 때면 서신을 전달받는 게 좀 늦어지긴 하겠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하루를 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네, 말씀하세요.”
“저 역시 종종 안부를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조금 감동했다. 레어넌은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이후 처음 만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줄곧 공작저에만 갇혀 있던 내게는 믿고 마음을 줄 만한 친구가 없었으니까. 비록 주식 판매를 위해서였다곤 하지만 함께 있는 동안 그를 다른 사람보다 가깝게 여긴 것도 사실이었다. 주식 판매와는 별개로, 그와 헤어지는 것 또한 아쉬웠고. 그런데 그가 던진 말은, 그렇게 느낀 게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었다. 가슴 한편이 좀 뭉클했다. 나는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서 있던 레어넌의 입가에도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그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겨우 마차에 올랐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나는,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걸음을 뗐다. 그리고 높이 솟은 화려한 금빛 대문 앞에 섰다.
‘여기가 진짜 메이레드 백작가인가……?’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이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맞다고? 담장 너머로 얼핏 보이는 건물은 펠리어트 공작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빙의해서 처음 눈 떴을 때 봤던 메이레드 백작 저택은 낡다 못해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시중을 들어 주던 하녀의 옷도 무척이나 남루했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대리석으로 된 명판에 새겨진 건 분명 ‘메이레드’였다. 애초에 레어넌이 안내해 준 거니 다른 곳에 찾아왔을 리도 없었다.
“그동안 집안 사정이 나아졌나 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문 앞을 괜히 기웃거리는데, 문지기처럼 보이는 사람이 두 명 나왔다. 혹시 수상한 사람처럼 보였으려나? 그렇게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 얼른 변명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는…….”
“아,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말해야 덜 수상해 보일지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크게 외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반사적, 아니. 거의 기계적인 행동 같았다. 내 얼굴을 바로 알아본 건가? 나도 이 사람이 누군지 기억하고 있었다면 일이 좀 쉬웠을 텐데. 백작저를 금방 떠났던 게 이렇게 아쉽게 느껴지는 건 처음인 듯하다. 문지기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가자, 저택의 정경이 한눈에 담겼다. 3층짜리 저택의 창문에는 어마어마한 고가로 보이는 정교한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아름다운 무늬를 뽐냈다.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에는 크고 작은 분수가 세워져 있었다.
‘좀 이상한데?’
메이레드 가문은 세금도 매해 쥐꼬리밖에 못 낸다며 비웃던 펠리어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렇게 번듯한 저택으로 이사할 정도인데, 세금을 못 낸다니?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 가까이에 도달하자, 하녀 한 명이 쪼그려 앉아 맨손으로 장미를 꺾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살짝 고갯짓해 문지기들을 보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가시에 찔렸는지 거친 손끝에는 핏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하지만 하녀는 조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그 광경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흠, 흐음.”
시선을 끌어 보려 괜히 헛기침하니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물로 젖은 눈동자에 서서히 경악과 충격이 퍼지는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아, 아가씨!”
몹시도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가씨가 여기에 오시면……! 아니, 아니에요. 어, 어서 오십시오!”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바닥에 납작 엎드리다시피 했다. 그녀 역시 나를 한 번에 알아보는 걸 보니, 잘 아는 사람인 듯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기, 누구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보는 얼굴인지라 눈을 가늘게 뜬 채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저예요! 조이라고요!”
하녀가 목소리를 높여 이름을 말한 그때였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가 저택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야?!”
짙은 그림자가 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나와 똑같은 붉은색 머리카락만큼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마 저 사람이 내 친오빠, 루이스 메이레드 백작이겠지.
“어?”
아니나 다를까. 소리를 치며 나온 남자는 잠시 자리에 멍하니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반색하며 외쳤다.
“로렐라! 정말 너구나!”
그는 빠르게 달려와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누가 봐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 혹은 가족을 반기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뵈어요, 오라버니.”
“대체 이게 얼마 만이냐, 응?!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남자는 반가움을 주체할 수 없는 듯 심지어는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살짝 올라간 콧날과 유독 동그란 턱, 그리고 붉은 눈동자까지. 나와 무척이나 비슷하게 생겼다. 굳이 이름을 확인하지 않아도 내 오빠임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그런데…… 이렇게까지 반길 정도로 우리가 가까운 사이였나? 간혹 보내 오던 편지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나는 혹시 몰라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놀랐죠……?”
“여긴 네 집인데 연락은 무슨!”
루이스 메이레드는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은 사람처럼 펄쩍 뛰더니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구나. 이 오라버니 마음 아프게……! 잠깐, 발에 이 붕대는 뭐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저, 사실은 긴히 할 이야기가…….”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서 편히 이야기하자꾸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백작이 환히 웃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무슨 사정으로 연락도 없이 왔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네가 무사한 걸 보니 한시름 놓아도 되겠어.”
솔직히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살갑게 대해 주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생각해 보면, 편지에는 사이가 나쁠 거라 여길 만한 내용도 없긴 했지. 나는 머쓱하게 코끝을 긁으며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루이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응접실 안에 들어선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바깥에서 바라본 외관도 눈이 부셨는데 안쪽은 더욱 호화로웠다. 복도 역시 곳곳에 고가로 보이는 장식품들이 놓여 있었지만, 응접실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가격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비싼 가구와 장식들이 곳곳에 있었다. 이 태피스트리에 달린 건 진주인가? 아니, 벽에도 무슨 보석이 박혀 있어?
“이사하는 김에 장식을 전부 다 새 걸로 바꿨단다. 마음에 들어?”
응접실을 둘러보는 내 표정에서 티가 났는지, 그가 빙긋 미소 지으며 돌아보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공단으로 장식된 소파는 팔걸이에도 보석이 박혀 있어 앉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제 말해 봐라, 로렐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난 거야?”
루이스는 맞은편에 앉아 내 쪽으로 몸을 잔뜩 기울였다.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태도였다. 그의 질문에 나는 지금껏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물론 주식이니 쿠키니 하는 말은 쏙 빼고, 사실만을 아주 간략하게 함축해서 말이다. 내가 말을 마치자 충격을 받았는지 달라붙어 있던 루이스의 입술이 한참 만에야 다시 움직였다.
“저, 정말로 혼인 서약서가 다 타 버렸단 말이지?”
“네, 맞아요.”
“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성력의 보호가 걸려 있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는 당혹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루이스가 이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혼인 서약서가 갑자기 불타다니, 어디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얘기였을 테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력의 보호가 약해진 것 같아요.”
“아무리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관리에 소홀했단 말이냐?”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더 의심을 사기 전에 대충 적당한 말로 둘러대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이 돌아오면, 바로 신관을 불러야겠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는 듯도 하고…….”
시선을 피한 채 슬쩍 얼버무리는데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이스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아까 정원에서 꽃을 꺾던 조이라는 하녀와 또 다른 하녀가 티 세트가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그녀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찻잔끼리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렇게 굼떠서야……. 쯧.”
들으란 듯 루이스가 혀를 차니, 하녀들은 더더욱 고개를 깊게 조아렸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숙인 그녀들의 유독 거친 손끝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둘 다 손이 부르트고, 여기저기 아물지 않은 상처가 가득해 보기만 해도 내 손톱 밑이 다 아려 올 지경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루이스에게 의사를 불러 달라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잠깐.’
문득 공작가 사람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인색했던 시어머니 엠마와 춥고 어두운 저택에서 항상 자잘한 감기 따위를 달고 다니던 고용인들이. 그들도 엠마를 무서워하긴 했지만, 이렇게 눈도 못 마주칠 정도는 아니었다. 엠마 역시 고용인들에게 넉넉한 씀씀이를 베푸는 위인은 못되었으나, 병들고 다친 모습을 모르는 척할 정도로 악독하진 않았다.
‘역시…… 이상해.’
아까부터 내 몸을 스멀스멀 휘감는 알 수 없는 위화감. 왜인지는 몰라도 비슷한 장면을 어디선가 본 듯한 알 수 없는 기시감조차 느껴졌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냐. 빨리 놓고 나가!”
조심스러운 하녀들의 손길이 갑갑했는지, 루이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매섭게 명령했다. 날카로운 고함에 하녀들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재빨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루이스가 계속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로렐라. 하지만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하녀들이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언제 성질을 냈냐는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조용한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분명 다정한 목소리인데도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이제부터 이 오빠가 다 알아서 책임져 줄 테니까.”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온 루이스가 내 어깨를 잡고는 나를 직접 일으켜 세웠다.
“아, 아니. 잠깐만요. 이제부터 황실에 넣을 진정서를 작성해야…….”
“그래, 급한 일이지. 하지만 먼 길을 달려왔잖니. 많이 피곤할 테니 우선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거라. 가장 크고 좋은 방을 내어 주마.”
나는 결국 그의 손에 의해 떠밀리듯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갓 따른 홍차는 단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 * * 나는 꽤 넓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하지만 그 안은 가장 크고 좋은 방을 내어주겠다는 루이스의 말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장식품으로 가득했던 응접실이나 복도와는 달리, 방에는 침대와 작은 테이블, 그리고 의자밖에 없어 살풍경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기분은 더더욱 뒤숭숭해졌다. 저택에 들어오면서부터 느껴졌던 위화감이 자꾸만 크기를 부풀렸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의자에 앉아 혼잣말을 중얼대던 나는 결국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이스가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게 확실해.”
한번 부풀어 오른 의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대로는 편히 쉴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백작 몰래, 저택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만나 봐야겠다. 깊은 얘기를 듣는 건 어렵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도움이 되겠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당연히 ‘조이’라는 하녀였다.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한테 호의도 있는 듯했으니까. 거기다가 처음 봤을 때 보였던 이상한 반응 또한 계속 신경이 쓰였다. 역시 그 애를 만나 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문 쪽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은 그때.
“……지켜.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하도록.”
“네, 백작님.”
문 너머에서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는 듯한 루이스 백작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뭐지?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나는 숨을 참으며 문 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조그마한 틈을 만들었다. 실처럼 가느다랗게 벌어진 틈새 사이로 음흉한 목소리가 좀 더 명확하게 흘러들어 왔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진 하녀들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 알겠나? 혹시라도 외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창문 밑에도 보초를 세우고.”
“예, 알겠습니다.”
“잡으러 갈 것도 없이 제 발로 나타나 줬는데,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지.”
“걱정 마십시오, 백작님.”
……내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는 게 느껴졌다. 고동 소리가 어찌나 큰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날 가둔 거야? 설마 펠리어트와 한통속인 건가?
‘뭐가 됐든 여기서 나가야 해!’
왜 이러는 건지 알아보는 건 빠져나간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나는 양 볼을 찰싹찰싹 두드려 잔뜩 굳어 버린 표정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풀려 애썼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열었다. 깜짝 놀라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루이스가 보였다.
“어머, 오라버니! 왜 여기 계세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무, 무슨 일이냐, 로렐라?”
“그게…….”
루이스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혹시 들었는지 눈치를 살피는 듯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두 눈을 굴리다 활짝 웃으며 답했다.
“저택 구경을 좀 하고 싶어서요. 필요한 것도 있고…….”
“그건 다음에 시켜 주마. 아직 정리를 못 해 어수선한 곳이 꽤 있거든. 오랜만에 찾아온 여동생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지.”
두 눈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뻔뻔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놈도 시치미를 떼는 데는 선수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필요한 게 있다면 내게 이야기하렴.”
“하지만…….”
보통 방법으로는 넘어가 주지 않을 것 같다.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옆에 서 있는 병사를 흘끔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께 말씀드리는 건 상관없지만…….”
“뭐?”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들려주고 싶지 않은 거라서요.”
눈치를 보며 한참을 머뭇거리자 루이스는 그제야 마지못해 몸을 기울였다. 성가시다는 듯 미간에 주름 하나를 얹은 채. 그리고 그의 귀가 입술 근처로 다가온 순간, 나는 그것을 있는 힘껏 콱! 하고 깨물었다.
“으헉!”
그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귀를 감싼 순간, 잽싸게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저, 저년을 당장 잡아!”
복도가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루이스를 뒤로한 채 구르듯 달려 나갔다. 거친 호흡이 내뱉어질 때마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왜 자꾸 기시감이 들었는지 알겠다. 그래, 수도 없이 봐 온 설정이니까. 전남편은 개사이코 북부 공작에, 믿었던 가족마저 핵폐기물이라니! 이게 무슨 클리셰 쌈 싸 먹는 소설 같은 상황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