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우리 계속 만나!2021.08.04.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공작님.”
“…….”
마부가 조심스럽다 못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펠리어트는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석한 검은 투구를 쓴 기사는 그 순간 공작이 눈을 살짝 깜빡인 것을 눈치챘다. 타인에게 곁을 쉽게 내어 주지 않는 펠리어트 공작이 신임하는 몇 안 되는 수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출발하라신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부가 천천히 마차를 움직였다. 그러자 옆을 지키던 기사들도 즉시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공작의 호위를 위해 제법 많은 기사가 마차를 지켰으나,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거친 흙길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작은 돌멩이들이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마차 안에 있는 펠리어트 공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몇 년째 그의 곁에서 일한 부하들도 감히 눈동자조차 마음대로 굴리지 못할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었다. 펠리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문 밖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북쪽과는 달리, 푸르른 신록들로 가득한 잎사귀들이 검은 눈동자 안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내가 당신 아내라는 증거를 대 봐. 혼인 서약서 가져와 보라고, 이 사이코 자식아!’
순간, 로렐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 외에도 많은 말들을 쏟아 냈던 것 같은데, 그 말만이 자꾸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혼인 서약서가 불탄 것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도망치는 와중이라 확인할 수도 없었을 텐데. 생각할 수 있는 정답은 딱 하나뿐이었다.
‘불태운 장본인이 직접 얘기해 줬겠지.’
신경 쓰이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녀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레어넌 기사단장의 걱정스러운 눈길. 그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반듯하게 다물려 있던 턱에 움찔, 짧은 경련이 일었다.
“……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덕분에 맞은편에 앉은 그의 수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각상처럼 굳은 채 오로지 입술 끝만을 위로 들어 올린 공작의 얼굴은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펠리어트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온갖 끔찍한 장면을 수차례나 목격했건만, 이렇게까지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는 반질반질하게 손질된 검집을 계속해서 닦아 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무거운 공기에 깔려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무심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성력의 보호를 깰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그 질문이 혼인 서약서에 걸려 있던 성력을 가리키는 것임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수하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성력에 반하는 강한 흑마법이 작용하거나, 혹은 보호 계약이 끝나서 스스로 소멸되거나…….”
수하는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펠리어트 공작 역시 알면서도 물어본 것이 확실했기에, 끝까지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강한 신력을 지닌 물건으로 깨트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검이라든지…….”
어렵사리 얘기를 마친 수하는 황급히 입술을 다물었다. 긴장으로 마른침 삼키는 소리만 고요한 마차 안에 가득 울렸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거겠지.”
“예. 엄중히 관리하고 있으니 다른 방법이 있다면 이미 알려졌을 겁니다.”
“……그래, 그렇다면 확인은 금방 끝나겠군.”
펠리어트의 고개가 그제야 천천히 정면으로 향했다.
“로렐라가 새로운 방법을 찾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수하는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목이 아프도록 고개를 수그렸다. 밀려오는 싸늘한 한기에, 소름이 돋은 팔을 가만히 문지르면서. * * * 펠리어트가 돌아간 후, 나는 차마 레어넌 단장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명하신 기사단장님을 말도 안 되는 일에 말려들게 한 것도 모자라, 그 앞에서 이성을 잃고 욕지거리를 했던 흑역사까지 생성하고 말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부끄러워졌다.
‘그간 사정을 밝히지 않으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하지만 레어넌은 못난 모습을 보인 날 비난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이 무사히 마무리될 때까지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아니, 비난은커녕 오히려 위로까지 해 주었다. 덕분에 내 마음에도 위안이 차올랐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미치겠네, 정말!”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시스템 창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대체 왜 그런 남자한테 입맛을 다시냐고!”
거, 취향 참!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황궁에 진정서를 내는 일은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들었다. 거기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부족한데, 이런 시련까지 떠안아야 한다니.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맨 마지막에 뜬 메시지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당신의 주식을 300주 구매했습니다.」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입맛을 다시며 200주를 추가 구매했습니다.」 「츄릅.」
“500주라…….”
어떡하지? 눈이 돌아갈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는 어려운 판매량이었다. 마음속에서 수많은 갈등이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끙끙대던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 혼자서 결정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 보는 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 상담할 수 있단 말인가. 미친 사람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이지. 가능한 사람이 있다면 오직 한 명뿐이었다. 안내자라며 날 찾아왔던 위너드 벨드리안.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못 하면 죽는 거니 고민할 시간에 한 주라도 더 팔라고 하겠지. 딱 한 번 봤을 뿐인 사이지만 어쩐지 그럴 거란 확신이 들었다.
“후우…….”
깊은 한숨만 내쉬기를 몇 차례. 나는 결국 주먹을 불끈 쥔 채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아, 결심했어.”
그리고 마치 선포하듯 외쳤다.
“사자는 굶어도 풀을 뜯지 않아!”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깟 몇백 주쯤, 다른 데서 벌면 그만이다. 내 주식을 사 줄 사람이 집착광공 어쩌구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미친 북부 공작이랑은 두 번 다시 상종하지 말자! 그래, 그게 나을 거야. 아니 근데, 잠깐만. 생각해 보면 또 몇백 주가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아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미련 때문에 또다시 머리를 감싸 쥔 채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뒤이어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한달음에 달려가 얼른 문을 열었다.
“단장님……!”
반짝반짝 찰랑거리는 금발과 강아지처럼 선한 두 눈을 보니 마음이 저절로 정화되는 것만 같았다.
“사제에게 물었더니 방에서 쉬고 계신다고 해서……. 혹시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니에요, 방해는요. 마침 갑갑해서 산책이라도 나가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러셨군요. 마침 저도 시간이 비는데, 함께 나가시겠습니까?”
나는 긍정의 의미로 활짝 웃어 보였다. 그래, 이럴 때일수록 주접킹한테 더욱 열심히 팔아야 해. 사실 펠리어트가 돌아간 후, 나는 며칠 더 신전에 머물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였다. 그러는 동안 레어넌은 틈만 나면 직접 찾아와 내 안부를 살피고는 했다. 아무래도 호숫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내가 충격을 받은 건 아닐까 걱정하는 듯했다. 물론 충격을 받기는 했다. 펠리어트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그런 것이긴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흰 백합이 가득 핀 후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사제들은 물론이고, 성기사단원들도 여럿 마주쳤다. 기사들은 모두 레어넌과 나를 보자마자 절도 있는 자세로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레어넌의 걸음걸이, 손짓 하나하나를 좇는 눈길에는 존경과 충성심이 가득했으며, 어쩌다 멈춰 서서 안부를 물어보기라도 하면 들뜬 소년처럼 기뻐했다. 이제 3년 차인 신임 기사단장의 인기가 이 정도라니. 레어넌이 얼마나 신뢰받고 사랑받는 지도자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 착한 단장님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에 말려들게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밀려온 탓이었다. 혹시 이러다 기사단원들에게 민폐녀로 낙인찍히는 건 아닐까? 다들 이를 악물고 ‘으르 든증님 근들즈 므르!’ 하면서 날 손가락질하는 거 아니냐고!
“공작 부인.”
그런 생각을 하며 걷던 중, 옆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레어넌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정정했다.
“아,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이라는 호칭이 달갑지 않으실 텐데.”
“괜찮아요, 단장님. 그래도 기왕이면 로렐라라고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로렐라 님. 다름이 아니라…….”
“님 자도 빼고요.”
“……네.”
레어넌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살짝 낮은 목소리로 로렐라, 라고 속삭이듯 내 이름을 불렀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주식이 팔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선은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우레아에 가족이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메이레드 백작가를 말씀하셨던 거지요?”
갑작스러운 물음이긴 했지만, 이제 와서 숨길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어트와 결혼했었단 사실이 알려진 이상,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 정도는 레어넌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혹시 몰라 개인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펠리어트 공작은 아우레아를 지나쳐 곧장 영지로 돌아갔고, 메이레드 백작의 신변에도 아무 이상 없다더군요.”
“네?”
“죄송합니다, 멋대로 행동해서. 하지만 줄곧 우울해하시는 것 같아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에…….”
레어넌은 민망한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이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틀림없이 가족분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셨겠지요. 백작님도, 저택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안전합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그렇군요……!”
나는 위로 매끄럽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고 모두 드러내었다. 가문의 안위는 물론, 한 번밖에 못 본 오빠를 걱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레어넌이 전해 준 소식은 목마른 자에게 쏟아진 시원한 폭포수나 다름없었다. 펠리어트가 곧장 영지로 돌아갔다니! 안 그래도 그가 혹여나 백작가를 뒤집어 놔 계속 신전에 눌러앉아야 하는 상황이 될까 걱정했었다. 물론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곳이고, 모두가 내게 친절했지만 그래도 평생 신세를 질 순 없으니까. 특히나 기억 속의 메이레드 백작, 그러니까 내 오빠는 펠리어트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유약한 인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빙의 후에 고작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결혼식 내내 벌벌 떨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니 더 생각할 것도 없겠지.
‘행여 오빠가 자초지종을 듣고 날 설득하려고 해도 황궁에 진정서를 넣을 때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야.’
그 이후에는 펠리어트도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다.
“저…… 오빠가 잘 계신지 보러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생각을 마친 나는 최대한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며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레어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말씀만 해 주십시오. 바로 마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부탁드리고 싶다는 말을 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잠깐만. 만약 상황을 보러 갔다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면? 물론 백작가에 그대로 눌러앉는 건 나 역시 바라는 일이지만, 문제는 다신 이곳에 올 명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훌륭한 주식 자판기……인 레어넌 단장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다니, 그건 안 돼!
“……단장님.”
나는 천연덕스럽게 두 눈을 깜빡이면서 그를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깊은 바다처럼 새파랗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따듯해 보이는 눈동자가 나를 마주했다.
“에크레투스 기사단 관저는 아무런 용건도 없이 마음대로 놀러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걸 잘 알아요. 하지만…… 또 찾아와도 될까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모두들 로렐라 님이라면 언제든 환영해 줄 겁니다.”
레어넌 단장이 상냥하게 웃으며 시원스레 답해 주었지만, 나는 속으로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그가 없는 기사단에는 볼일이 없다. 게다가 그는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기 때문에 기사단에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어도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차라리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 게 좋겠어.
“그러니까 제 말은…… 단장님을 지금처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울적해서요…….”
“저를요?”
“네, 그러니까…….”
나는 괜히 울먹거리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 눈물이 딱 한 방울이라도 흘렀으면 좋겠는데, 영 나오지 않아 눈을 내리깔며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단장님을 뵙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순간 레어넌 단장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게 보였다.
“언제든지 원하신다면 연락을…… 아, 아닙니다. 저도 종종 연락을 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다소 딱딱해진 말투가 신경 쓰였지만, 다행히 불쾌하거나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단지 내 말에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정말요? 그럼 계속해서 만날 수 있나요?”
“……네.”
“특별한 용건이 없어도, 만나 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아, 다행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내숭을 떨던 것도 잊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크게 외쳤다.
“그러면 저와 약속해 주세요.”
나는 활짝 웃으며 얼른 그의 눈앞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레어넌이 내 손을 잠시간 말없이 바라보다 살며시 자신의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은 불타는 것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띵동! 띵동! 띵동! 커다란 종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빠르게 숫자가 올라가는 화면 너머로, 하늘하늘 흔들리는 백합 사이에서 서서 얼굴을 붉힌 레어넌 단장이 보였다. 참으로 아름답고 흐뭇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