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거 먹는 거 아니야!2021.07.31.
“로렐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오랜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조차 깔끔하게 정돈해 뒤로 넘기던 흑발은 왜인지 엉망으로 흐트러져 여기저기 눌리고 뻗쳐 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고고한 빛을 잃지 않았던 눈도 퀭하고 핏발이 잔뜩 서 있어 이루 말할 수 없이 흉흉한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안색조차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옷은 또 왜 저렇게 엉망이람. 마치 며칠간 먹지도, 자지도 않은 사람의 몰골 같았다. 실제로 대면한 건 2년간 고작 두 번뿐이지만 공작저에 있으면서 펠리어트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왔다. 집무실에 있는 펜 한 자루조차 아무 데나 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칼 같은 성정인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그런 펠리어트가 저렇게까지 만신창이가 되어 여기 나타나다니. 어쩌면 내가 꿈을 꾸는 건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그가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허리에 찬 장검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덕분에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톡톡히 깨달았다. 그래, 사실 여긴 꿈이 아니라 지옥의 입구인 건 아닐까? 서늘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펠리어트의 등 뒤에서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가지가 마치 지옥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망자의 앙상한 팔처럼 느껴졌다. 아름답기만 했던 호수조차 건너면 돌아올 수 없는 망자의 늪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등줄기를 타고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설마 날 쫓아서 여기까지 온 건가? 대체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본 건데?! 방금까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고 나니, 온몸에 핏기가 사라진 듯 오한이 들었다.
‘미, 미수에 그쳐서 다행이다……!’
주식에 눈이 돌아서, 진짜로 입술을 가져다 눌렀으면 어쩔 뻔했냐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저세상 구경했겠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같다는 말 한마디에 사람을 곧장 가두는 저 저 사이코한테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테니까……!
“왜 말을 못 하지? 설마 실어증에라도 걸린 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펠리어트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던 그때.
“잠깐.”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섰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하얀색 정복 아래, 곧게 떨어진 긴 금발.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놀랍군. 자네 영지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데.”
가로막고 선 사람이 레어넌 단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설마 이분 때문에 그 먼 길을 온 건가?”
레어넌의 물음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우뚝 멈췄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이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한데. 보는 눈이 많아.”
원한을 가진 악령에라도 씐 듯한 몰골의 펠리어트를 눈앞에 두고도, 레어넌은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말을 건넸다. 펠리어트는 기가 차다는 듯 짧게 웃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그러나 곧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레어넌을 노려보았다.
“신임 성기사단장이 남의 아내를 데리고 지금 뭘 하는 거지?”
으드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잇새를 빠져나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뭐? 아내……?”
나를 천천히 돌아보는 레어넌의 눈동자 속에는 숨기지 못한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아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비록 그에게 말을 못 하고 숨기긴 했지만, 언젠가는 솔직히 털어놓고 사과하려 했다. 저 미친 북부 대공이 이렇게 다 말해 버리지만 않았다면!
“그래, 내 아내다.”
그때, 펠리어트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얘기했다. 비웃음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서. 이혼 서류를 들이밀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벌컥 화가 치밀었다.
“누가 당신 아내야, 누가!”
나는 레어넌 단장을 제치고 얼른 앞으로 후다닥 튀어 나갔다.
“내가 당신 아내라는 증거를 대 봐!”
“……뭐라고?”
펠리어트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너무 화가 나 두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가 증거를 보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린 결혼식만 올렸을 뿐, 함께 산 날은 하루도 채 되지 않는 데다가 가장 중요한 혼인 서약서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나라 법률상, 혼인 서약서가 없는 귀족들의 혼인은 무효로 처리된다. 어떻게든 지옥 같은 공작저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것저것 알아본 나로선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혼인 서약서 가져와 보라고, 이 사이코 자식아!”
* * * 어느새 날이 저물고 어둑한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다소 쌀쌀해진 바람이 호수 건너편에서 쉴 새 없이 불어왔다. 그 바람을 따라, 헝클어진 펠리어트의 머리칼도 흔들렸다.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펠리어트의 눈동자는 빛이라곤 조금도 들지 않는 깊은 동굴 같았다. 흑요석처럼 새카만 눈동자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어쩐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공작저에서 지내는 동안 고용인들이 그의 눈에 대해 수군대는 것을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뼈저리게 실감해 본 적이 없었다. 날카로운 기세로 나를 응시하는 펠리어트를 마주하고 있자니, 흥분이 점차 식으면서 미친 듯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석상처럼 버티고 선 남자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혼인 서약서는 이미 불에 타서 재가 되었으니 내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공작저와는 달리 보는 눈도 많고 레어넌도 있으니 나를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을 거다. 그러니 더 이상 무섭지 않아……!
“사이코 자식이라…….”
혼잣말을 작게 뇌까리던 펠리어트의 입가가 점점 더 호선을 그렸다. 냉정한 얼굴에 만들어 낸 게 분명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야, 솔직히 좀 무서워! 도대체 왜 웃는 거야? 내 말 어디에 웃음 포인트가 있길래 웃는 거냐고!
“그래, 당신 말대로 그걸 가지고 올 순 없어.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는 아주 천천히 레어넌과 나를 향해 다가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레어넌이 내 앞을 막아 주었지만, 펠리어트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똑바로 향해 있었다.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내 것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로렐라.”
“허…….”
여유롭게 속삭이는 그의 말에 황당해 말문이 막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뭐라고 반문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힐 지경이었다. 입이 떡 벌어져 펠리어트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다시 누군가가 내 앞으로 나섰다.
“잠깐.”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금발. 레어넌 단장이었다.
“방금 그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기 어렵군. 혼인 서약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정말 사실인가?”
그래, 너무 화가 나 잊고 말았지만 지금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침착한 그의 목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빛 한줄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반색해 얼른 입을 열었다.
“정말이에요, 단장님. 서약서는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고요!”
레어넌은 내가 혹시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지 살피려는 사람처럼 나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혼인 서약서가 사라지면 결혼이 무효가 되는 만큼, 모두가 갖가지 방법으로 보호하고 있으니까. 특히나 펠리어트 공작가 정도 되는 귀족들은 보통, 고급 신관을 데려와 성력으로 결계를 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로선 레어넌이 무조건 믿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도망친 그 날, 저택에서 불이 났어요. 공작저의 고용인들에게 물어보면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으실 거예요!”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거의 외치듯 말하며 그의 팔을 힘주어 덥석, 잡았다.
“그러니 펠리어트 공작님과 저는 더 이상…….”
“로렐라, 당신이 있을 자리는 거기가 아닐 텐데.”
그때,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내 말을 싹둑 끊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험악한 눈빛이 나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레어넌 단장의 팔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팔을 놓기는커녕 더욱 꽉 붙잡았다. 지금은 이것만이 유일한 구명줄이니까.
“내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인가?”
펠리어트는 마치 땅속에서 끌어올린 듯한 낮은 음성으로 한 자 한 자를 툭, 툭 씹어 먹듯 내뱉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표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무서웠다. 맹세하건대, 현생은 물론 전생까지 통틀어도 저렇게 흉흉하고 흉악한 얼굴은 처음 봤다.
“대체 뭐가 불만이기에 가출까지 감행한 건지 대화라도 해 볼까 했더니…….”
그러나 마냥 두려워하기에는, 공포보다 분노가 앞섰다. 뭐가 불만이냐니? 2년간 내가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모르는 인간의 입에서는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집에서 들어야겠군. 당장 돌아가지.”
“대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레어넌 단장의 뒤에 후다닥 숨어 얼굴만 빼꼼 내민 채로 들으란 듯이 외쳤다.
“전쟁터에 나간 2년 동안 편지 한 통 없던 인간이, 이제 와서 대화라고?!”
“로렐라.”
나지막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붙잡을 것 같았다.
“소리를 치든, 욕을 하든 내 곁에서 해.”
아니, 진짜로 날 잡으려는 듯,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이 내게로 거침없이 뻗어져 왔다.
“싫다니까! 내가 왜?!”
어떻게든 버텨 보려 자리에 냅다 주저앉으려던 그때였다.
“진정하지.”
레어넌 단장이 펠리어트의 팔을 낚아챘다. 손목을 강하게 붙든 그는 펠리어트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지금 겁에 질려 있지 않나.”
겁에 질린 게 아니라, 화가 나서 벌벌 떤 건데……. 그런데 화가 나 몸이 떨리는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펠리어트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목소리 또한 분노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레어넌 베르하르트. 분명 말했을 텐데.”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귓가를 얼어붙게 할 만한 싸늘한 음성이었다.
“내 아내라고.”
거칠게 손을 뿌리친 그는, 마치 모든 걸 베어 버릴 듯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레어넌을 노려보았다.
“제삼자인 네가 감히 이따위 주제넘은 짓을 해?”
흉흉한 눈빛만큼이나 펠리어트의 언사도 칼을 품은 듯했다. 그런데도 레어넌 단장은 그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돕고 싶을 뿐이야. 선의에 자격은 필요 없지. 그리고…….”
레어넌은 그저 꼿꼿하게 선 채로 나지막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조곤조곤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단호하게 느껴졌다.
“이따위 짓이라는 건, 힘으로 본인보다 약한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려는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닐까.”
“뭐……?”
“제대로 달리지도 못하는 사람을 개까지 풀어 쫓거나, 무장한 기사들을 시켜 마차를 습격하는 일도 포함되겠지.”
“하, 이거 재미있군.”
펠리어트는 피식 웃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펄럭인 망토 사이로 순간 검은색 장검이 위협적으로 드러났다.
“고귀하신 성기사단장님께 남의 아내한테 관심 갖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돌았군. 어떻게 그런 저급한!”
“마지막 경고야. 계속 내 아내 일에 참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순식간에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시퍼런 칼날이 머리 위에서 춤을 추며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꿀꺽. 섣불리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레어넌 단장의 등 뒤에 숨어서 마른침만 삼키던 그때.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키보드를 이마로 내리치며 주식을 500주 구매합니다!」 갑자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종소리가 들렸다. 띵동! 「왐ㄴ우'ㅜㄹ안ㅇㅁ;'ㅣ럼ㄴㅓㅇㄴㅂ';[email protected]ㅈㅇㄱㄹㄷㄴㅍ!」 그와 동시에, 시스템 창 위로 도저히 해독 불가능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도대체 이건 무슨 뜻이야? 하지만 덕분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야. 남의 집 불구경처럼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펠리어트, 이제 그만 좀 해요!”
내 의사를 확실히 전하고자,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제야 레어넌을 바라보던 펠리어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난 그 집구석으로 돌아갈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그럼 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지? 공작저 외에 갈 수 있는 곳이 없을 텐데.”
“뭐…… 뭐라고?”
황당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펠리어트는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말해 봐. 내 곁, 내 손이 닿는 곳이 아니라면 당신이 과연 어디 있을 건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음산하게 내려앉았다.
“지금 당장 부숴 버릴 테니까.”
뚜우욱! 그 순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머릿속에서 큰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대…….”
“로렐라?”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이 미친놈아아악!”
나는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큰 소리로 악을 썼다. 그 순간만큼은 주변의 수많은 구경꾼도, 레어넌 단장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눈에 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간 쌓였던 설움과 피로, 그리고 분노와 짜증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응어리가 결국 터져 나왔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그냥 꺼지란 말이야! 이제 우린 남남이잖아!”
“……뭐?”
그러자 펠리어트의 눈빛이 처음으로 거칠게 흔들렸다.
“지금 남남이라고 했나?”
“그래! 했다, 왜! 미친 싸패 설정도 정도가 있지! 왜 이렇게 사람을 피 말리게 해! 대체 왜!”
아오, 빡쳐! 내가 두 번 다시 북부 대공 키워드를 파나 봐라! 그럼 사람이 아니라 개다, 개!
“또 못 알아들을 말을 하는군. 그리고, 우리가 어째서 남남이지?”
하지만 갖은 욕설과 거친 언사를 들었음에도 펠리어트는 어느새 냉정함을 되찾은 듯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뭐, 뭐어?!”
나는 뻣뻣해져 오는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이 미친 새끼…… 말이 안 통하는구나! 너무 화가 나 하늘이 샛노랗게 변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통 속에 갇힌 듯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런 나를 구해 준 건, 곁에서 들려온 레어넌 단장의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이었다.
“공작 부인, 황궁에 정식으로 진정서를 보내십시오. 그럼 지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기꺼이 증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감사해요!”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그래, 황궁에서 확인하고 나면 아무리 펠리어트라 해도 우리가 아직도 부부라 우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레어넌은 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도망쳤는지 처음부터 지켜본 데다가,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의 단장이기까지 했다. 그의 증언이라면 누구보다 공신력 있을 게 분명했다.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릴게요!”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내게 부드럽게 웃어 주더니 다시 펠리어트를 바라보며 딱 잘라 말했다.
“두 번 다시 이런 폭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 모든 것을 걸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너무나 믿음직스러운 그의 발언에 반응이라도 하듯 시끄럽게 종소리가 울렸지만,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내 심정이나 주접킹의 심정이나 같을 테니까!
“……하.”
그런 우리를 말없이 바라보던 펠리어트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소리를 내뱉었다.
“좋아, 어디 한번 해 봐.”
그러고는 괴상하게 입매를 일그러뜨린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테니까.”
그 모습에 짧게 혀를 찬 레어넌 단장이 얼른 내 곁을 지켜 서며 작게 고갯짓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밤공기가 찹니다.”
“네, 그래요.”
나는 펠리어트 쪽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레어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자리를 뜨려던 그때였다. 띵동,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이마를 치며 추가로 500주를 구매했습니다.」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당신의 주식을 300주 구매했습니다.」 순간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두 개의 종소리가 동시에 울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띵동! 「‘집착광공 함 잡숴 봐.’ 님이 입맛을 다시며 200주를 추가 구매했습니다.」 「츄릅.」 믿을 수 없는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그런 걸 왜 먹어? ……그거 먹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