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왜 니가 여기서 나와? (8/173)

8화. 왜 니가 여기서 나와?2021.07.28.

16550612266549.jpg

  호숫가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나는 멋대로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입술 끝을 끌어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1,000주. 히죽. 또다시 소리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숫자인가. 0이 세 개라니. 무려 세 개나 있다니! 생각할수록 꿈만 같았다. 게다가 데이트는 이제 겨우 시작됐을 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고무시켰다.

16550612266553.jpg‘분명히 더 팔 수 있어. 아니, 더 팔아야만 해!’

주접킹은 레어넌에게 진심이니까.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을 보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목적지를 신전으로 변경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단둘이서 보내면 주식은 더 많이 팔릴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16550612266557.jpg“도착했습니다.”

나직한 레어넌 단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제법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관저 근처에 있는 호수라더니, 멀리 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금방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자 레어넌이 먼저 내리고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허울뿐인 공작 부인 신세로 저택 안에서만 생활했던지라, 이런 에스코트가 괜히 쑥스러웠다.

16550612266557.jpg“발밑을 조심하십시오.”

16550612266553.jpg“아,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안에서 마주 보고 있을 때보다 레어넌의 얼굴이 훨씬 가까워졌다.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다른 것이었다. 「총 판매 주식 : 3,700주.」 상냥한 얼굴 위에 띄워진 시스템 창. 정확하게는 레어넌의 눈 부근에서 반짝거리는 빛을 내며 떠 있는 ‘3700’이라는 숫자만이 온 신경을 빼앗아 갔다.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그 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얼마나 더 팔 수 있을까?

16550612266557.jpg“혹시…….”

1,000? 2,000? 아니면 5,000……주는 너무 큰가? 아니야, 목표는 클수록 좋지.

16550612266557.jpg“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헛기침 섞인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시스템 창을 닫고 레어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그의 귀 끝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왜인지 웃음이 나서 얼른 고개를 젓고 활짝 웃었다.

16550612266553.jpg“아니에요. 너무 기대되어서요.”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주식을 팔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팔고, 팔고, 또 팔아 치워 주마!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힘주어 잡았다. 그것이 레어넌 단장의 손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 * * 저녁노을이 시시각각 색을 바꿀 때마다 마치 물감을 푼 것처럼 호수의 수면엔 연한 파스텔 톤의 분홍빛이 천천히 번졌다. 건너편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딱 알맞게 서늘했으며, 둥지로 바쁘게 돌아가는 새들이 날갯짓하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군데군데 놓인 벤치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는 이들도 있었고 호숫가에 가까이 붙어 낚싯대를 물에 드리운 채 한가로이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 그림 같은 풍경을 앞에 두고도 내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16550612266553.jpg‘데이트다. 지금부터 난…… 데이트를 하는 거야!’

비장한 마음으로 남몰래 주먹을 꽉 쥐던 그 순간.

16550612266557.jpg“마음에 드십니까?”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노을을 등진 채 부드럽게 웃음 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은 미소였다. 더불어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이마도, 분홍빛으로 물든 햇살 속에서 유달리 더 파랗게 보이는 선한 눈동자도, 날카롭게 뻗은 콧대도 차례차례 시선에 담겼다. 왜인지……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16550612266553.jpg‘아, 아니야. 이건 진짜 데이트가 아니라고!’

방금 한 결심이 무색할 정도로 속으로 연신 이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치도 없이 쿵쿵 울려 대는 이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16550612266553.jpg“좀 걸어도 될까요?”

나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써 시선을 피한 채 제의했다. 천천히 걸으며 바람을 좀 쐬면 나을 것도 같았다. 그러자 레어넌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16550612266557.jpg“물론입니다.”

우리는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도 내 생각과는 달리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16550612266557.jpg“잡으십시오.”

얼마 걷지도 않아 내게 정중히 팔을 내민 레어넌 탓이었다. 아무래도 다친 발을 걱정해 주는 듯했다.

16550612266553.jpg“감사……합니다.”

살며시 팔짱을 끼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손바닥에 닿은 얇은 천 아래로 그의 단단한 팔 근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6550612266557.jpg“괜찮으니 편히 기대십시오.”

레어넌은 어설프게 살짝 올렸을 뿐인 내 손을 잡고는, 제대로 잡을 수 있도록 손의 위치를 고쳐 주었다. 덕분에 몸이 조금 더 가깝게 붙었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벽을 부수며 주식을 300주 삽니다.」 「여기서 신랑 신부 행진 중이라고 해서 왔는데요???」 때마침 등장한 주접에, 내 고개는 점점 더 아래를 향했다. 여전히 세차게 울리는 박동 소리를 무시한 채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고 있을 때였다. 어쩐지 뒤통수가 점점 따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삼삼오오 모여 근처를 거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해 있었다. 근처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노골적인 호기심이 어린 눈길만 보낸다. 심지어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피하기도 했다.

16550612266553.jpg‘레어넌 때문인가?’

성기사단 관저 근처에 있는 호수이니,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레어넌의 긴 금발 머리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흰색 정복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으니까. 게다가 한 번 보면 쉽게 잊히지 않는 잘생긴 얼굴도 한몫했고. 나는 주변 눈치를 보다 조용히 물었다.

16550612266553.jpg“단장님, 괜찮으시겠어요?”

16550612266557.jpg“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16550612266553.jpg“그…… 사교계에 괜한 소문이라도 나면…….”

나야 어차피 2년간 북부에 갇혀 있던,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허수아비 공작 부인이지만 단장님은 아니니까. 그러나 레어넌 단장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50612266557.jpg“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늘 험한 기사들하고만 지내는 터라 그런 자리와도 워낙 거리가 멀어서요. 제 이름이 오르내릴 일도 없을 겁니다.”

16550612266553.jpg“네? 그럴 리가요. 모두 단장님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궁금해하는데요.”

16550612266557.jpg“하하, 설마요. 저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제 부하들뿐일 겁니다.”

무척이나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터라 나는 그냥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계속 얘기해 봐야 이해를 못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 인기 있는데 본인만 그걸 모르는 타입이구나.

16550612266557.jpg“그나저나 걷기 힘들진 않으십니까?”

16550612266553.jpg“아뇨, 전혀요.”

뭐, 상대가 소문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나 또한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보란 듯 더욱 씩씩하게 걸었다.

16550612266553.jpg“너무 멀쩡해서 이제는 뛸 수도 있을 것 같은걸요.”

뛰는 시늉까지 하자 그게 재미있었는지, 레어넌의 또다시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졌다.

16550612266557.jpg“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나도 그를 따라 해맑게 웃었다.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걷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던가. 소소하고 평범한 일이지만, 공작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더욱 행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 마음속은 점점 조바심이 차올랐다. 「총 판매 주식 : 4,000주」 시간은 점점 흘러가는데, 아까 딱 한 번 울린 이후로 시스템 창이 그저 쥐 죽은 듯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비관할 수는 없다.

16550612266553.jpg‘단순히 산책을 같이하는 것만으로는 주접 떨기가 애매하긴 하지.’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식을 팔려면, ‘주접킹’을 만족시키려면 대체 뭘 해야 하지? 나는 다소 막막한 기분이 되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별다른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 오는 호숫가 근처에 뭐가 있는지 알 리도 없었고, 빙의한 세계에서 데이트 같은 건 해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는 새 태양은 어느덧 저 멀리 뉘엿뉘엿 넘어가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쉽게 주식을 사 주기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보다. 예상보다 수확이 미미한 탓에 자꾸만 초조해졌다. 레어넌 단장이라면 밤이 되기 전에 돌아가자고 할 거고, 그럼 주식을 팔 수가 없는데!

16550612266557.jpg“걱정 마십시오. 다 잘될 겁니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얼굴을 구긴 나와 시선을 맞춰 주는 레어넌이 보였다.

16550612266557.jpg“갑자기 죄송합니다. 고민이 많아 보이셔서요.”

16550612266553.jpg“아, 그게…….”

16550612266557.jpg“혼자 해결하기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면 부디 주저하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한 번 인연이 닿은 사람을 마지막까지 돕는 것은 성기사단의 신조이자, 제 신조이기도 하니까요.”

실은 제가 주접킹한테 주식을 좀 팔아야 하는데요. 괜찮으시다면 협조 좀 해 주시겠어요?

16550612266553.jpg‘……라고 말을 할 수는 없잖아. 미친 사람으로 볼 게 뻔한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사리물고 있는데, 레어넌이 다시 말을 이었다.

16550612266557.jpg“무엇 때문에 신분을 감추고 계시는 건지, 어떤 사정이 있으신 건지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호수보다 더욱 맑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붉은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살랑거리는 것까지 그 안에 전부 다 비쳐서 마치 거울 같았다.

16550612266557.jpg“당신은 나쁜 분이 아닐 거라 믿습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솔직하게 표정이 다 드러나진 않겠지요. 그리고 행여 그렇다고 해도, 제가 멋대로 믿은 것뿐이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16550612266553.jpg“……가, 감사합니다.”

아니, 단장님. 너무 사람을 잘 믿으시는 것 같은데요……. 저를 얼마나 봤다고 그렇게 믿어 주시는 거냐고요.

16550612266557.jpg“언제든 좋으니 준비되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 압니까. 제가 정말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요.”

순간 나도 모르게 주식 걱정을 잊을 만큼 잔잔하면서도 편안한 음악 같은 목소리였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검사, 그리고 황실도 어쩌지 못한다는 에크레투스 기사단의 단장이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정함으로 빚어진 듯한 남자였다니.

16550612266553.jpg“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또다시 얼굴이 뜨거워진 나는, 황급히 묵례를 건넸다.

16550612266553.jpg“아.”

그 순간 발을 헛디디며 나도 모르게 몸이 비틀거렸다. 딴생각에 빠진 탓에 바로 앞에 있던 돌부리를 못 본 탓이었다. 그러자 레어넌의 커다란 손이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16550612266557.jpg“조심하십시오.”

바로 그때였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주먹 울음과 함께 당신의 주식을 300주 구매합니다!」 「선생님…… 손등의 핏줄 좀 클로즈업해 주세요. 제발요…….」 드디어 주접킹이 주식을 샀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종소리건만, 내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느 포인트에 꽂힌 거지? 혹시 도울 수 있는 건 뭐든지 돕겠다는 다정한 말 때문인가? 하지만 그 말을 하고 실제로 주식이 팔리기까지는 짧긴 해도 분명한 텀이 있었다. 나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시스템 창을 흘끗거렸다.

16550612266553.jpg‘어쩌면 멘트에 힌트가 있을지도 몰라. 선생님, 손등의 핏줄…….’

잠깐. ……설마 어깨를 잡아 줘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나도 남주가 여주에게 스킨십하기라도 하면 속으로 더 하라고 소리쳤던 때가 있으니까. 그럼, 한 번 시험해…… 볼까?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조금 전보다 더욱 크게 몸을 비틀었다.

16550612266553.jpg“어멋! 여기 돌부리가 또!”

발연기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대사를 날리면서.

16550612266557.jpg“괜찮으십니까?”

몸이 휘청이기가 무섭게 단단한 팔이 내 허리께를 감았다. 멀쩡한 땅에서 나 혼자 비틀거려서 그런지, 레어넌의 얼굴에도 깜짝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이 또다시 500주를 구매했습니다.」 「미친미친미친. 미쳤다, 미쳤어. 어떻게 미쳤냐면 아무튼 미쳤다. 허리에 감은 손 미쳤다. 진짜 미쳤다.」 진짜로 샀다! 이제야 비로소 세일즈 포인트를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단장님이랑 스킨십 할 때마다 사는 거구나.

16550612266557.jpg“이쪽 길은 정비가 덜된 모양입니다. 미처 몰랐군요. 어서 저쪽으로 가시죠.”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사과를 건넨 레어넌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기던 내 머릿속에도, 주접킹이 남긴 메시지와 같은 단어가 메아리쳤다. 미친! 미친, 미친, 미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스킨십을 해야 한다니! 지금껏 한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인데! 하지만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주식을 팔아야만 하니까! 나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두 주먹을 꼭 쥐고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16550612266557.jpg“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레어넌 또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 걱정이 어린 그때였다.

16550612266553.jpg“아흡.”

나는 반쯤은 진심인 신음을 내뱉으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16550612266553.jpg“죄, 죄송해요. 갑자기 머리가…….”

팔자에도 없는 연약한 척을 하려니 수치심이 솟구쳐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 모습이 더 걱정을 샀는지 레어넌이 팔을 뻗는 게 보였다. 정말 창피하지만, 기회는 지금뿐이다. 기사단이 관리하는 신전에서 머물고는 있어도 이렇게 레어넌과 또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니까. 나는 결국 두 눈을 꼭 감은 채…….

16550612266553.jpg“……어지러워서!”

그의 어깨를 향해 돌진했다.

16550612266557.jpg“이런……!”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길고 단단한 팔이 내 등을 받치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따듯한 체온을 타고 두근두근하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16550612266553.jpg‘어, 어라?’

덕분에 깨달았다. 내가 부딪친 곳은 레어넌의 어깨가 아니라, 단단하고 넓은 가슴팍이었다는 걸.

16550612266553.jpg“아, 아니. 잠깐…….”

이러려던 건 아닌데! 그냥 어깨에 꿍하고 주식이나 조금 팔아 보려고 했던 건데!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보려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러나 나를 품에 안은 채 지탱한 팔은 꿈쩍하지 않았다. 너무 놀라 입술을 뻐끔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6550612266557.jpg“갑자기 움직이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니 편히 기대십시오.”

16550612340682.jpg

  띵동! 「‘이 구역 주접킹’이 눈물을 왈칵 흘리며 당신의 주식을 1,000주 구매합니다!」 헉, 해냈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1,000주를 팔았다. 염원하던 대로 0이 하나 더 붙은 것이다. 덕분에 부끄러움 따위는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종소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띵동! 「키.스.해! 짝! 키.스.해! 짝! 키.스.해! 짝!」 뭐, 뭘 하라고? 키스?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에 나는 숨이 가빠질 정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키스라니, 그게 말이나 되냐고요! 거친 호흡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몸 때문일까, 조용히 나를 안고 있던 레어넌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12266557.jpg“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어서 관저로 돌아가시죠.”

아, 안 돼! 어떻게 판 주식인데! 고작 이만큼 팔려고 쪽팔린 것도 참고 병약한 척 연기한 게 아니란 말이야!

16550612266553.jpg“아니에요, 괜찮아요. 늘 있는 가벼운 빈혈이에요!”

나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려는 레어넌을 잡고 억지로 버텼다. 사실 산책을 나오기 직전 식사로 소고기 스테이크를 양껏 먹어치웠다는 걸 그가 영원히 모르길 바라면서.

16550612266553.jpg“조금만 쉬면 괜찮아져요…….”

그러는 동안에도 아무도 모르는 나의 내적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다. 손도 잡았고, 팔짱도 꼈고 심지어 포옹까지 했다. 이미 단계를 밟아 버린 스킨십에 ‘주접킹’이 정말 주식을 사 줄까? 실제로 레어넌이 날 부축해 주기 위해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도 시스템창은 조용하기만 했다. 진짜로…… 키스 말고 남은 게 없는 거 아냐? 그런 거라면 어떡하지? 다른 사람에게 주식을 파는 방법은 아예 모르는데. 해, 해 버릴까? 감히 단장님의 입술을 훔친 파렴치한이 되어 기사단 법정에 서는 한이 있더라도 미친 척하고 해 버려? 뭐가 됐든 죽는 것보단 낫잖아!

16550612266557.jpg“그럼 우선 마차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앉아서 조금 쉬시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레어넌 단장은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자세를 낮췄다. 또다시 나를 안아 들려는 모양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해 버리는 거야! 나중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결심을 마친 나는 손을 들어 가까이 다가온 레어넌 단장의 옷깃을 잡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멱살을 틀어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런 것까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으니까.

16550612266553.jpg‘5,000주 가즈아!’

16550612266557.jpg“자, 잠깐…….”

당황한 듯한 그의 얼굴을 애써 모른 척하며 눈을 꽉 감고 내게로 잡아당기려던 그때.

16550612340708.jpg“그 손 놔.”

내게 내려앉은 것은 따듯하고 부드러운 입술도,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도 아닌 음산한 목소리였다.

16550612340708.jpg“……지금 뭐 하는 거지?”

북풍 한파가 몰아치는 듯한 사나운 기세. 그리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얼려 버릴 듯한 목소리는, 어딘지 익숙한 것이었다. 나는 제발 아니길 빌며,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버린 고개를 억지로 뒤로 돌렸다. 그리고 이마 위로 잔뜩 흐트러진 흑발과 새파랗게 날이 선 눈매를 마주한 순간…….

16550612354367.jpg“어서 말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나도 모르게 또다시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16550612354367.jpg“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어째서 성기사단장과 같이 있는 건지 전부 설명해야 할 거야.”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었다. 왜 펠리어트 니가 여기서 나오는 건데! 왜!

16550612354381.jpg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