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데이트를 하라고?2021.07.24.
문 바깥쪽에서 스르릉, 칼이 뽑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또렷한지, 마차 안에 있는 나에게조차 위협적이었다. 창밖을 살펴봐도 어둠 때문에 상황을 쉽게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저 얼굴을 가린 대여섯 명의 괴한이 레어넌 단장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아, 안 돼……!”
이게 무슨 일인지,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를 도와준 사람이 다치게 둘 수는 없었다. 그 일념 하나로 문을 박차고 나가려 했는데.
“나오지 마십시오.”
아무리 힘주어 밀어도 문은 덜컹거리는 소리만 날 뿐 열리지 않았다. 레어넌 단장이 무언가로 마차 문이 열리지 않도록 고정한 듯했다.
“너희들은 누구지?”
나직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레어넌이 들고 있던 검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 마차 안의 여자를 넘겨라!”
괴한들은 그렇게 외치면서도 당황한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무래도 검에서 뿜어져 나온 빛 때문인 듯했다.
“신분을 밝혀라. 그전까진 응할 수 없다.”
“저분만 넘겨주면 소란 피우지 않겠다……!”
머릿수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한껏 위축된 목소리였다. 아니, 오히려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잠깐만. ‘저분’이라고? 설마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보낸 사람은 명확했으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 이 미친 사이코 새끼가 진짜.”
펠리어트의 기사들이 틀림없다. 치료를 받느라 시간을 지체한 사이 따라잡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펠리어트의 영지를 벗어났다. 무장까지 한 채로 다른 이의 영지를 지나가는 마차를 세울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러니 섣불리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겠지. 아무리 명령을 받았다 해도, 남의 땅에서 이런 짓을 벌인 게 알려지면 저들에게도 분명 문제가 생길 테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레어넌 단장이 마차에서 내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테고. 가만있어 봐,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검 쥐는 방법을 보니 잘 훈련된 기사들인 것 같은데.”
레어넌은 짧게 코웃음을 치더니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숙녀와 마찬가지로 신분을 알 수 없는 여러 명의 괴한. 심지어 무장까지 했다면 이런 경우 어느 쪽이 약자인지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어차피 그쪽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수상쩍은 사람과 괜히 연루되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제법 절도 있고 칼 같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레어넌은 주눅 들기는커녕 오히려 검을 든 팔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이런 광경은 난생처음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한 검이 괴한들의 코앞에서 위협적으로 빛났다.
“정말 수상한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은 내가 할 일이다.”
나는 다급히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열어 주세요!”
저자들은 혼인 서약서가 불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줄행랑을 칠 것이 뻔했다. 펠리어트가 그런 것까지 말해 주진 않았을 테니까! 그 서류가 불탔다는 건, 나를 강제할 권리가 그들에게는 아예 없다는 걸 뜻했다. 그러니 굳이 싸움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제가 해결하겠……!”
여전히 꿈적도 하지 않는 마차 문을 온 힘을 다해 밀어 대던 그때였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두근두근하며 100주를 구매합니다.」 「당신 때문에 비가 와요. 심장마비ㅠㅠ」
“어……?”
예고조차 없이 갑자기 울린 종소리와 함께 제멋대로 켜진 시스템 창. 어째서인지 그 순간, 위너드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반드시 기억해. 살아남으려면 그 누구보다 많은 주식을 팔아야 한다는 걸.’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주인공이 못되면 ‘소멸’된다고 했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의 사고는 빠르게 다른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의 패턴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구역 주접킹’은 레어넌 단장이 멋있어 보일 때마다 주식을 사 대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 이거지……. 나는 재빠르게 볼이 빵빵해지도록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앞뒤 잴 것도 없이 마차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기사라는 칭호조차 아까운 놈들.”
내 비명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분노를 담은 레어넌의 음성이 나직하게 울렸다. 괴한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자, 잠깐……!”
그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매서운 칼날이 재빨리 움직였다.
“마, 막아라!”
누군가의 신호를 시작으로 당황한 괴한들이 우르르 달려들었지만, 그 누구도 레어넌을 막지 못했다. 빛나는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여기저기서 고통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흙먼지가 요란하게 일어났고, 누군가가 부딪히기라도 한 듯 마차 벽이 거칠게 흔들리기도 했다. 수적 열세에도 레어넌은 아무렇지 않은 듯, 능숙하게 공격을 피하며 적을 하나씩 쓰러트려 나갔다. 힘든 기색조차 없었다. 동작 하나하나가 어찌나 우아한지,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했다. 그때, 또다시 요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주식이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띵동. 띵동. 띵동.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창문에 바짝 몸을 붙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 레어넌 단장의 활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담으려 했으나, 어찌나 빠른지 이젠 눈으로 좇기조차 힘들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커다란 검이 우아하게 궤적을 그릴 때마다 성스러운 은빛이 어둠 위를 수놓는다는 사실뿐이었다.
“크……흑.”
결국, 여기저기에 나자빠진 괴한들이 신음을 삼키며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에 올랐다.
“이럇!”
새벽이슬을 머금은 길 위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다투어 바삐 줄행랑친 괴한들의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이제 괜찮습니다.”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음을 내딛자, 커다란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있는 레어넌이 보였다. 숨이 거칠어지기는커녕, 묶은 머리조차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검에 붙은 먼지를 잠깐 털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띵동! 「400주 판매 완료. 총 누적 2,600주 달성.」 좋았어!
“단장니임!”
나는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팔았다! 성공이다! 처음으로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호흡까지 벅차올랐다. 나는 두 주먹을 꼭 쥔 채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안전하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그 모습을 오해라도 한 건지 레어넌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왜 쫓기고 계신 건지…… 괜찮으시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유를 물어볼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아직 뭐라 답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사실대로 말하기도 망설여졌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그게 그러니까…….”
할 말을 찾느라 꽤 뜸을 들였는데도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거짓 따위는 바로 꿰뚫어 볼 것만 같은 맑은 눈동자로 나를 흔들림 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저, 저는 절대로 수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나는 팔을 마구 휘젓기까지 하며 온몸으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밝힐 수 없지만, 나중에 반드시 설명드리겠어요!”
레어넌 단장은 내 도주를 도운 것도 모자라, 북부 공작의 수하들까지 물리쳐 버렸다. 이 사실이 펠리어트의 귀에 들어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끝까지 내 정체를 모르는 것이 그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몰랐다. 내 소중한 주식 줄, 절대 지켜!
“사정이 있으시다니 더 이상 묻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고는 뒤늦게 마차 밑에서 벌벌 떨며 기어 나온 마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물었다.
“아우레아에 가면 안전한 거처가 있다고 하셨지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레어넌이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까 그자들이 도망친 방향입니다. 우리를 쫓아온 방향과 정반대이지요.”
“그, 그렇다면…….”
“이 길로 쭉 가면 아우레아가 나옵니다. 그들이 여기 있던 것도, 아마 이 길을 지나갈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여쭤보는 겁니다.”
“…….”
“정말 안전한 거처가 맞습니까?”
나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괴한들이 향한 곳은 어쩌면 내 오빠가 살고 있는 메이레드 백작가일지도 모른다. 속이 뒤틀렸을 펠리어트가 그곳을 뒤집어 놓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게다가 내 기억에, 친오빠인 메이레드 백작은 펠리어트가 기침 한 번만 해도 기절해 버릴 것 같은 개복치였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러나 레어넌 단장은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한 듯했다.
“아우레아와 멀지 않은 곳에 성기사단 관저가 있습니다. 그 근처의 신전으로 가시죠. 제 생각에는 그곳이 더 안전할 것 같군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에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전……이요?”
“네, 에크레투스 성기사단 휘하에 있는 신전입니다. 제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출입할 수 없고, 주위는 온통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지요.”
“하, 하지만…….”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사제들 또한 입이 무거운 자들이니, 우선은 그곳으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깜짝 놀랄 만큼 고마운 이야기였으나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가는 건 좋지만, 그다음에는 어쩌지? 펠리어트의 마수가 뻗치기 전에 일단은 내가 먼저 나서서 손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을…….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기뻐하며 100주를 구매합니다.」 「신.혼.집.」
“네!”
종소리를 들으면 먹이 생각에 침 흘리는 강아지라도 되어 버린 것일까. 나는 시스템 창을 확인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계획은 수정하라고 있는 거죠!”
내 대답을 듣자 안심이 되었는지, 레어넌 단장의 눈매가 그제야 부드럽게 휘었다.
“그럼 관저 쪽으로 마차를 돌리겠습니다.”
“네! 염치 불고하고 신세 지겠습니다!”
“이런 건 신세 축에도 끼지 못하니 염려 마십시오.”
상냥하게 미소 짓는 단장님을 보며, 내 마음에도 야망의 꽃이 가득 피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주접킹의 통장을 텅장으로 만들어 본다! * * *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건물이 여명 사이로 우뚝 솟아 있었다.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한 주홍빛과 부드러운 남빛이 높다란 탑에 스며드는 장면은 아름답다는 수식어조차 부족할 정도로 장관이었다.
“우와아…….”
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가 바로 제국 제일의 기사단이라고 칭송받는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의 본부구나.
“이쪽으로.”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열을 맞춰 서 있는 기사들 사이로 레어넌 단장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고개를 돌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곁눈질로 나를 훑는 수많은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곧게 편 등에서 부드럽게 흔들리는 금발 머리카락에 시선을 맞춘 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커다란 본관의 내부는 외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정신없이 안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또 다른 문이 나왔다. 본관 뒤쪽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밖으로 나서니 자그마한 흰색 단층 건물이 보였다. 규모는 본관보다 작지만, 디테일하게 세공된 벽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니 이곳이 신전인 듯했다. 신전 앞에 작게 조성된 정원에는 사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단장님. 이쪽입니다.”
그중 흰색 로브를 두른, 아마도 대사제인 듯한 노인이 안쪽으로 안내해 주었다. 신전은 본관만큼이나 아름다웠고, 또 성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공작가에서 내가 쓰던 방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고 깨끗한 방이었다. 레어넌은 방 안쪽까지 나를 에스코트해 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는 물론이고 신전 안의 모든 것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도록 말해 두겠습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은 푹 쉬십시오. 갈아입으실 옷도 곧 가져다드릴 겁니다.”
그러고는 내게 깍듯하게 인사하고 사제들과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사제 한 명이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쟁반 위에는 푸짐하고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도망친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나는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뜨거운 물과 좋은 향기로 가득 채워진 욕탕과 깨끗한 새 옷이었다.
“아아아.”
말끔해진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고 잘 정돈된 침대에 누우니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하아, 이제 어떡하지?”
머릿속은 온통 걱정뿐이었다. 주식인지 뭔지에 내 목숨이 달렸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졌다.
‘다른 후보들이 아무리 주식을 팔아도 1위를 이길 수 없다고 판정될 때, 비로소 ‘주인공’이 결정된다’는 규칙이 너무 애매하지 않나?
“대체 얼마나 팔라는 거야?”
수도 없이 자문해 보았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용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점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얼마나 팔아야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주식에 목숨이 걸려 있다니! 게다가 주인공이 못되면 소멸한다니!
“아니, 후보에서 탈락하면 나중에 엑스트라라도 시켜 주면 되잖아! 주인공만 사람이냐고, 어?!”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외쳐 보기도 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쉬고 싶어도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근심 걱정 때문에 쉬이 잠 못 이룰 것 같았지만, 몸은 피로를 이기지 못했다. 펠리어트에게 이혼하자 말하고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있지 못했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다음 날도 기절한 듯이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끼니마다 푸짐한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찾아오는 사제를 맞이할 때 외에는, 줄곧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산길을 헤매느라 이리저리 뛰고 구르고 했던 여파가 그제야 온 듯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어느새 늦은 오후였다. 창가로 긴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몸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해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고 또 쥐어뜯던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네.”
노크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니 레어넌 기사단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제 본 것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단정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흰색 정복 차림이었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푹 쉬셨는지요?”
“그, 그럼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지만, 힘없는 목소리까지 감출 순 없었다.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셨거나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니에요. 아주 좋았는걸요! 그게 아니라…….”
얼른 변명하려 했지만, 세심한 시선은 어느새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간 뒤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레어넌 단장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날씨가 무척이나 좋은데, 바람이라도 좀 쐬시겠습니까?”
“아…….”
“이 근처에 호숫가가 있는데, 마침 주변의 정비를 모두 마친 참입니다. 꽃들이 만발한 길을 산책이라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실 겁니다. 제가 동행하면 위험한 일도 없을 거고요.”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 암울한 신세에 비하면 지금은 길가에 핀 잡초마저도 부러울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싫은 티를 내지 않고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매우 설레어 1,000주를 구매합니다.」 「아, 데이트 신청은 못 참지!!!! (대충 내 돈 가져가라는 짤)」 뭐라고! 1,000주!
“감사합니닼!”
나는 벼락처럼 외치며 고개를 넙죽 숙였다.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레어넌 단장이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뻐서 방방 뛰기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너무 좋아요!”
1,000이라니, 1,000이라니! 여태껏 찔끔찔끔 사 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숫자잖아!
“빨리 나가죠……!”
너무 흥분된 나머지 입술을 꽉 깨문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던 레어넌 단장이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기운을 차리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 순진해 보이는 미소에 또 요란스러운 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웃음을 꾹 참으려 노력했다. 엄밀히 말하면 데이트가 아니라 순수한 산책 제의였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내가 오늘 끝내주는 데이트를 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