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주인공의 주식을 팔아라! (6/173)

6화. 주인공의 주식을 팔아라!2021.07.21.

막을 틈도 없이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이윽고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갈색 곱슬머리의 남자였다.

16550611744766.jpg“사람 살려……!”

나는 본능적으로 최대한 반대쪽에 몸을 붙인 채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 좌석에 털썩 앉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16550611744772.jpg“출발해.”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차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부석은 여전히 텅 비어 있는데도. 순간 목과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16550611744766.jpg“뭐, 뭐야? 유령이야?!”

16550611744772.jpg“하하, 유령?”

무섭고 놀라운 상황에서도 이 불청객은 그저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16550611744766.jpg“……당신 누구야.”

여전히 겁이 났지만 나는 지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16550611744766.jpg“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한 거야!”

정확히는 쏘아 보려고 노력한 것에 가깝긴 하지만.

16550611744772.jpg“누구긴, 네 안내자이지.”

16550611744766.jpg“뭐?”

16550611744772.jpg“기사단장과 마부는 잠시 다른 세계에 있어. 우리 이야기가 끝나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채로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

애써 버티던 이성의 벽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안내자? 다른 세계라고?

16550611744772.jpg“아, 내 이름은 위너드 벨드리안이야. 위너드라고 불러.”

혼란스럽기만 한 나와는 달리 남자의 입가엔 눈부시도록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16550611744772.jpg“주인공 후보로 발탁되자마자 쿠키까지 굽게 하다니. 정말 잘했어, 로렐라.”

신이 난 듯 들뜬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꽥 소리를 지르듯 물었다.

16550611744766.jpg“무, 무슨 소리야? 그보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16550611744772.jpg“안내자니까.”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무표정했다.

16550611744772.jpg“하지만 아직 어림도 없어. 300만, 500만…… 아니, 셀 수도 없이 많은 주식을 팔아야 해. 그 정도는 되어야 주인공 자격을 논할 수 있으니까. 알겠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16550611744766.jpg“……모르겠는데.”

그런데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여전히 웃음기 없는 진지한 태도였다.

16550611744772.jpg“상관없어. 곧 알게 될 테니까.”

……혹시 이 사람, 정신이 살짝 어떻게 된 건가? 아니 그보다 정말 사람이긴 한 거야?! 의구심과 불안감은 한데 뒤섞여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나는 마차 구석에 찰싹 등을 붙이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이 수상한 남자를 살폈다. 마차가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긴 다리와 각진 어깨가 돋보이는 날렵한 몸매, 그리고 어디서 마주치든 간에 눈에 뜨일 만큼 잘생긴 얼굴. 이런 상황에서 만난 것만 아니었다면 넋을 놓고 구경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가죽장갑부터 시작해서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가죽 부츠까지, 그가 몸에 걸친 것들은 죄다 값비싼 고급품이었다. 그야말로 지체 높은 귀족의 표본이라 해도 손색없는 모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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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611744766.jpg‘안내자라고?’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16550611744772.jpg“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고…….”

16550611744766.jpg“잠깐.”

그리고 한 손을 들어 다시금 말문을 연 위너드를 막았다.

16550611744766.jpg“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우선 그것부터 알아야겠어.”

16550611744772.jpg“뭐?”

알 수 없는 상황에 두렵기는 했지만, 내가 대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낼 유일한 기회였다. 나는 있는 용기, 없는 용기 전부 쥐어짜 최대한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16550611744766.jpg“네가 정말 안내자라면 전부 설명해 봐. 갑자기 내가 주인공 후보가 됐다는 건 무슨 소리고, 주식이라는 건 또 뭔지!”

내 말에 위너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11744772.jpg“좋아.”

그러고는 줄곧 손에 쥐고 있던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케인(cane)을 무릎에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16550611744772.jpg“네가 처음으로 이목을 끈 건, 남편이었던 펠리어트 공작이 이혼 서류를 찢은 덕분이야. 그 순간 ‘그들’ 중 하나가 흥분해서 주식을 샀지. 덕분에 주인공 후보가 된 거고.”

16550611744766.jpg“그들……이라니?”

16550611744772.jpg“이 세계를 보고 있는 분들 말이야. 끌려가서 감금당했을 때는 그야말로 모두의 이목이 쏠렸지. 네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고 쿠키까지 구워 댈 정도였으니까.”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까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누군가가 주식을 산 덕분에 내가 주인공 후보가 되었고, 뭘 더 보고 싶어서 쿠키를 구웠다……는 건가? ……그런데 왜 하필 쿠키지? 하지만 일단 이런 자잘한 의문은 마음속에 밀어 둔 채 다시 재빨리 물었다.

16550611744766.jpg“그럼 쿠키가 구워지면, 그게 나한테 보상으로 돌아오는 거야?”

16550611744772.jpg“이해가 빨라서 좋네. 맞아. 주식을 팔아 네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굳히면 굳힐수록, 쿠키를 굽는 사람들 또한 늘어나. 즉, 더욱더 좋은 보상을 듬뿍 받을 수 있는 거지.”

16550611744766.jpg“더 좋은 게 있어?”

순간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거렸다.

16550611744772.jpg“당연하지. 철문을 부수거나 혼인서약서를 불태운 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16550611744766.jpg“뭐……!”

쿠웅!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자마자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눈앞에 불이 번쩍 일었다.

16550611744766.jpg“악!”

지금 마차에 앉아 있다는 것도 모르고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천장에 냅다 머리를 박아 버린 것이다. 나는 비명과 함께 다시 주저앉았다. 위너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 정수리 위를 살폈다.

16550611744772.jpg“아무래도 혹이 생기겠는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16550611744766.jpg“진짜야? 진짜로 혼인서약서가 불탔어?!”

16550611744772.jpg“응, 아주 완벽하게 전소했어. 저택의 고용인들이 다 동원되어서 미친 듯이 물을 쏟아부었지만 헛수고였지.”

16550611744766.jpg“그럼 그때 그 연기가……!”

16550611744772.jpg“이혼 동의서를 받아 낼 필요가 없어졌으니 잘됐네. 상대가 상대인지라 쉽지 않아 보였는데.”

큭큭, 소리 내어 웃던 위너드는 슬쩍 윙크하며 덧붙였다.

16550611744772.jpg“어때, 이제 이해가 좀 됐어?”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양 뺨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철썩! 철썩!

16550611744766.jpg“아얏, 악!”

너무 세게 때린 나머지 또다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얼얼한 아픔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가슴 깊이 차올랐다. 꿈이 아니구나, 꿈이! 이곳에서 혼인서약서는 일종의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있는 이상 나는 펠리어트 가문에 귀속된 신세나 다름없었다. 대주교와 황제의 인장까지 찍어 공증한 서류라 쉽게 파기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걸 태워 버렸다니. 그 재수 없는 집구석에 그런 빅 엿을 선사했다니! 아, 그 장면을 내 눈으로 봤어야 하는데. 원통하다, 원통해!

16550611744766.jpg“드디어 진짜, 진짜로 자유다 이거지!”

마차 벽까지 퍽퍽 때려 가며 마구 웃어젖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위너드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무언가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6550611744766.jpg“왜! 뭐!”

16550611744772.jpg“……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마저 이야기해도 될까?”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0611744772.jpg“가장 중요한 건 사실 이거야. 쿠키처럼 달콤한 보상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너는 누구보다 많은 주식을 팔아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는 걸 목표로 해야 해.”

16550611744766.jpg“왜?”

16550611744772.jpg“지금부터 그 이유를 알려 줄게.”

말을 끝낸 위너드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띵동, 하는 종소리와 함께 갑자기 창이 떠올랐다.

16550611744766.jpg“어? 이게 왜 멋대로…….”

당황해하면서도 내 시선은 창 위에 적힌 글자를 읽고 있었다. 「로렐라 메이레드 님, 안내자를 만나셨군요! 든든한 조력자를 만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서바이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주인공’은 주식을 가장 많이 판매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다른 후보들이 아무리 주식을 팔아도 1위를 이길 수 없다고 판정될 때, 비로소 ‘주인공’이 결정됩니다. 그 후에는 <주인공 보호 조치>가 즉시 발동됩니다. 주인공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는 전부 소멸될 것이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완벽하게 지워질 것입니다. 자, 살아남아 영광의 자리에 오르느냐, 아니면 소멸되느냐. 모든 건 당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뭐야. 뭔 소리야, 이게. 혹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그런 믿음으로 아프도록 두 눈을 비벼 보았지만, 화면 속 메시지는 변함이 없었다.

16550611744766.jpg“지, 지금…… 뭐라는 거야?”

굳어 버린 입술을 겨우 움직이자, 내 것이 아닌 듯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16550611744766.jpg“소멸이라니……? 주인공이 되지 못하면, 전부 사라져 버린다는 소리야?!”

16550611744772.jpg“불만을 지닌 후보들이 주인공에게 반역이라도 일으키면 안 되잖아.”

패닉 상태에 빠지기 일보 직전인 나와는 달리 위너드는 마냥 태연자약했다.

16550611744772.jpg“뭐,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꽁꽁 언 정수리 위를 누군가 힘껏 내려친 듯 순간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동시에 온몸이 파스스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16550611744772.jpg“걱정 마. 해결 방법은 아주 간단하니까.”

그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16550611744772.jpg“네가 주인공이 되면 돼.”

아니,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냐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석고처럼 굳어 버린 눈꺼풀이, 입술이, 그리고 어깨가 차례대로 부들부들 떨려 왔다.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이 새하얀 연기로 변해 전부 사라지는 듯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딱 하나밖에 없었다.

16550611744766.jpg“……안 할래!”

나는 흥건한 땀으로 가득한 손을 쓱쓱 아무렇게나 드레스에 문지르며 목청 높여 외쳤다.

16550611744772.jpg“뭘 안 해?”

16550611744766.jpg“주인공 같은 건 관심 없으니까 후보에서 내 이름 지워 줘. 쿠키 보상도 필요 없어. 그냥 엑스트라로 조용히 살 테니까……!”

그래, 그러면 된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무슨 부귀영화를 얻겠다고 목숨까지 걸어?!

16550611744772.jpg“고작 엑스트라가 되겠다고?”

그러나 위너드는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대더니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16550611744772.jpg“미안하지만 어차피 한 번 후보가 된 이상 무를 수는 없어.”

16550611744766.jpg“아니. 내가, 본인이 하기 싫다는데……!”

16550611744772.jpg“한번 발탁된 이상 네 의사는 아무 효력이 없어.”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귓가에는 정체불명의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16550611744766.jpg“그래도 찾아보면 어떻게든 방법이…….”

이를 꽉 문 채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16550611744772.jpg“없어.”

돌아온 건 여지조차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분명 좋은 일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16550611744766.jpg“허으윽.”

목구멍 안쪽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에 가라앉으면 이런 기분일까.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아득한 어둠 속을 헤매는 것처럼 앞이 캄캄했다. 나는 입에 거품까지 물 기세로 소리 높여 항변했다.

16550611744766.jpg“어떻게 얻은 새 인생인데, 이대로 허무하게 개죽음당하라고?!”

그것만으로도 억울해 미칠 지경인데, 심지어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니!

16550611744766.jpg“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안 해! 아니, 죽어도 못 해!”

절규하며 머리카락까지 연신 쥐어뜯었지만, 시스템 화면은 조용했다. 그저 어둠뿐인 사방의 풍경도 변함이 없었다.

16550611744772.jpg“바로 그거야.”

그때 한가롭게 케인 손잡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던 위너드가 슬쩍 말문을 열었다.

16550611744772.jpg“못 하면 어차피 죽는다고.”

16550611744766.jpg“……뭐?”

자칭 안내자 놈의 얄미울 정도로 태평한 목소리에 씩씩대던 호흡이 나도 모르게 멈췄다.

16550611744772.jpg“그런데도 못 하겠다는 건, 결국 죽어도 괜찮다는 거네?”

16550611744766.jpg“아, 아니? 어?”

16550611744772.jpg“그렇다면 할 수 있잖아.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데 뭘 못 해.”

위너드는 믿음직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16550611744766.jpg“그게 아니라……!”

16550611744772.jpg“과연 내가 택한 후보답네. 역시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어.”

16550611744766.jpg“야! 사람 말을 좀…….”

들으라고! 그러나 나의 말은 또다시 가로막히고 말았다.

16550611744772.jpg“그런 기세라면 주인공은 싫어도 네 차지가 될 거야.”

심지어 그는 장하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기까지 했다. 아니, 이 미친놈이 지 일 아니라고……. 이성을 잃은 머릿속엔 많고 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결국 나오는 건 이것뿐이었다.

16550611744766.jpg“하아.”

나는 기나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일까.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더니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그런 내 얼굴을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살폈다. 위너드는 그렇게 날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16550611744772.jpg“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반드시 기억해.”

그러고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케인으로 바닥을 짚었다.

16550611744772.jpg“살아남으려면 그 누구보다 많은 주식을 팔아야 한다는 걸.”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딱,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살랑.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눈앞에서 살짝 흔들린 순간.

16550611744772.jpg‘그럼 또 봐, 내 주인공.’

  낮은 음성이 마치 꿈결처럼 아스라이 흩어졌다.

16550611744766.jpg“어?”

고작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마차에는 이미 나 혼자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 눈앞에 있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나는 당황하여 두 눈가를 아프도록 쓱쓱 비볐다.

16550611744766.jpg“뭐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천장을 뚫고 사라진 것도, 좌석 밑으로 빨려 들어간 것도 아닐 텐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상하좌우로 마구 휘두르던 그때였다.

165506119715.jpg“푹 쉬셨습니까?”

맞은편에서 다정한 음색이 들려왔다. 동시에 갑자기 밝은 빛이 쏟아지며 눈앞을 뒤덮었다.

16550611744766.jpg“읏.”

눈부심을 견디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165506119715.jpg“많이 피곤하셨는지 한 번도 깨지 않으시더군요. 험한 산길을 헤맨 직후니, 무리도 아닙니다.”

염려로 가득한 상냥한 목소리. 조심스럽게 눈을 뜨니, 흰 정복을 입고 있는 레어넌 기사단장이 보였다.

16550611744766.jpg“다, 단장님!”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을 겪고 나서 그를 다시 마주하니 괜히 반가움이 샘솟았다. 그다음에 몰려온 것은 걱정이었다. 갑자기 사라졌었는데,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걸까? 나는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 물었다.

16550611744766.jpg“그, 단장님은…… 정말 괜찮으신가요?”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상냥하게 대답했다.

165506119715.jpg“물론 괜찮습니다. 밤새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니까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아우레아에 도착할 겁니다.”

16550611744766.jpg“네……?”

그 말에 내 시선은 재빨리 창밖으로 향했다. 맙소사. 어두컴컴했던 하늘 한 자락이 어느새 희끄무레한 남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리 많이 쳐줘 봐야, 위너드와 이야기 나눈 시간은 고작 몇십 분 남짓이다. 그런데 벌써 목적지에 다 와 간다고? 시간을 건너뛰는 것도 설마 안내자의 능력 중 하나인 건가? 기가 막힌 상황에 그저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입술만을 벙긋거리고 있는데…….

16550611971534.jpg“으헉!”

갑자기 마부가 비명을 지르더니 동시에 마차가 급히 멈췄다.

16550611744766.jpg“앗!”

그 때문에 좌석 끝에 걸터앉아 있던 내 몸은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했다. 험한 꼴을 면한 것은 재빨리 나를 잡아 준 레어넌 단장 덕분이었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을 텐데도, 민첩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65506119715.jpg“괜찮으십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커다란 손을 꾸욱 맞잡은 채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16550611744766.jpg“네, 그런데 대, 대체 무슨 일…….”

그때였다.

16550611971534.jpg“으헉! 사, 살려 주십시오!”

바깥에서 마부의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막을 틈도 없이 벌컥, 마차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흉흉할 정도로 시퍼렇게 번뜩이는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들어왔다.

16550611971534.jpg“얌전히 내려.”

검 끝이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바로 나였다.

16550611744766.jpg“흐읍…….”

겁에 질린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간 그 순간.

165506119715.jpg“좋아.”

뜻밖에 흔쾌히 대답을 건넨 건, 다름 아닌 레어넌 기사단장이었다.

165506119715.jpg“그러지.”

그는 입가에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성큼 마차 밖으로 나섰다. 닫히기 직전, 마차 문 틈새로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슬쩍 드러났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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