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저는 주인공이 아닌데요?2021.07.17.
의사는 매의 눈으로 내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여러 약초를 으깨어 만든 연고를 잔뜩 들고 와 꼼꼼하고 재빠른 솜씨로 치료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함께 사는지, 그의 부인 또한 눈치가 몹시 빠른 사람이었다. 별말도 안 했는데 굽이 낮고 편한 신발을 준비해 준 걸 보면 말이다. 훈련이 일상인 기사들을 위해 고용된 사람답게 실력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안전하게 도주한 것으로도 충분히 다행스러운 일인데,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는 건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이쯤 되면 모든 게 순조롭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딱 하나, 내가 빈털터리 신세라는 것만 빼면.
‘이제 어떡하지?’
나는 새하얀 붕대를 둘둘 내 다리에 감아 대는 의사의 손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기사들의 주치의에게 이런 늦은 시간에 진료를 받았으니 보상을 해 줘야 할 텐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도망 나왔으니 치료비가 있을 리 없었다. 생각할수록 아깝다. 아, 돈을 챙길 때 펠리어트한테 걸리지만 않았어도! 어? 그런데 잠깐만. 나 분명 지금까지 뭔가를 엄청 팔지 않았나? 나는 주위를 조심스레 살핀 뒤,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창’ 하고 속삭여 보았다. 그러자 눈 부신 빛과 함께 시스템 창이 훅, 하고 떴다. 「총 판매 주식 : 1600주」
‘오오.’
레어넌 기사단장을 만나고부터 무려 600주나 늘어 있었다. 다른 존재와는 달리, 끊임없이 시끄러운 주접을 떨어 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주식이 이만큼이나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제발 한 번만 살려 달라는 염원을 담아 마음속으로 애타게 외쳤다.
‘돈, 돈!’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게 아닌가?
“교환, 현금 교환……!”
“네?”
최대한 작게 속삭여 본 건데, 치료에 전념하던 의사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지만, 마음속은 이미 짙은 실망감으로 가득했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소리 내어 말한 건데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으니까. 현물로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 결국 이렇게 되면 오늘 밤 거처는 자동으로 정해진 듯싶다. ……노숙으로. 물론 미친 공작이 있는 공작저로 다시 끌려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찬 바람에 입이 돌아가는 쪽이 낫긴 하다. 그래, 그렇긴 한데!
‘주식이고 나발이고 대책부터 세워야겠어.’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게 다 뭔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일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늘부터 노숙자 신세가 될까 봐 걱정해야 하는 처지인데, 주식이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돈도 안 되는 거.
‘아, 진짜 이제 어쩌면 좋지.’
남몰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던 찰나, 치료실 안쪽의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 한 명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동글동글한 눈망울이 귀여워 살짝 미소 짓는데, 곁에 서 있던 의사의 부인이 허둥지둥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니, 쟤들이 아직도 안 자고…….”
의사도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말을 거들었다.
“제 아이들입니다. 연년생 남매라 말썽도 늘 같이 피우곤 하죠.”
“세상에, 너무 귀엽네요…….”
그 순간 떠오른 생각에 아이들에게 우쭈쭈, 하려던 입술이 동그랗게 모아진 채로 굳고 말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내게도 소위 말하는 ‘친정’이 있었지! 루이스 메이레드, 그러니까 나의 친오빠를 바로 떠올리지 못한 건, 그가 내게 완벽한 타인처럼 여겨진 탓이었다. 빙의하자마자 바로 북쪽으로 유배…… 아니, 떠나 버린 탓에 백작과는 말 한마디 나누질 못했다. 공작저에 있던 2년 동안에도 고작해야 서신 몇 통 나눈 게 전부였다. 어쩌면 타인보다 먼 사이일지도 모른다. 오빠인 루이스에 대한 기억은 결혼식 내내 안쓰러울 정도로 펠리어트 공작의 눈치를 살피던 모습뿐이니까. 그래도 어쨌든 내 유일한 가족 아닌가!
‘마지막으로 받은 서신에 백작가가 아우레아 지역으로 이사했다고 쓰여 있었지.’
아우레아라면 공작의 영지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희망이 생긴 나는 땀나는 손으로 드레스를 말아 쥐었다. 2년간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여동생이 다짜고짜 찾아가면 무척이나 놀라겠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피붙이를 내치진 않을 것이다.
“자, 이제 됐습니다.”
내 마음이 믿음과 희망으로 차오르던 사이, 어느덧 치료가 끝났다.
“상처가 덧나지만 않으면 괜찮으실 겁니다. 혹시 모르니 여분의 약을 좀 챙겨 드리죠.”
의사는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내 손에 작은 약 봉투를 건네주었다.
“저기…….”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치, 치료비 말인데요…….”
“네?”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이야기를 꺼내려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저택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금화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려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지만, 이제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목에 걸고 있던 보석 박힌 목걸이를 말없이 만지작거리자, 의사가 점점 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제가 가진 게 이것뿐이라…….”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데, 갑자기 뒤에서 긴 팔이 불쑥 등장했다.
“늦은 시간에 환자를 받아주어서 고맙군. 이 정도면 될까?”
어느새 레어넌 기사단장이 곁에 와 있었다. 그는 나 대신 의사의 손에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건넸다. 세상에. 치료비의 수십 배는 족히 넘을 듯한 금화였다.
“아, 아닙니다! 다른 분도 아닌 단장님께 이런 걸 받을 순 없습니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눈이 동그래진 의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레어넌은 그의 손을 꾸욱 밀어 넣었다.
“치료비를 포함한 다른 것의 대가이니 받아 두도록.”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의사의 부인이 잽싸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아. 나는 그제야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고급스러운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산발 머리에 여기저기 찢긴 드레스 밑단,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맨발까지. 누가 봐도 수상쩍기 짝이 없는 모양새다. 레어넌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의사 부부에게 묵직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날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가실까요?”
다시 한번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두 발이 위로 두둥실 들렸다.
“꺅.”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 순간,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열광하며 당신의 주식을 200주 구매합니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주식이 팔리기 시작했다. 띵동! 「영 앤 리치, 톨 앤 핸섬……. 단점 없는 당신에게 나라는 오점을 남겨도 될까?」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100주를 추가로 구매합니다.」 「빨리 신고해 주세요. 이 사람 범죄자예요. 내 심장 폭행범♡」 또 시작이다, 또. 시끄럽게 울리는 종소리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괜찮으십니까?”
나를 살피고 있었는지 레어넌이 다정히 물었다.
“네, 그럼요.”
미친 주접들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쏟아졌지만, 나는 전부 무시한 채 생긋 미소 지었다. 마음속에는 오로지, 아까와 같은 실수는 죽어도 반복할 수는 없단 일념뿐이었다. * * *
“정말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레어넌의 호위가 기사들에게 맡겨 둔 말을 찾으러 간 동안, 나는 레어넌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매일 나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엠마 체임버스나, 뒤에서 온갖 입방아를 찧어 댄 하인들만 상대하다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니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치료비는 반드시 갚을게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보다 이제부터 가실 곳은 있습니까?”
“아, 그게…….”
레어넌은 다정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실은 아우레아에 가족이 있어서, 거기로 가려고요…….”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레아라면 지금부터 밤새 달리면 오전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숙녀분 혼자 떠나실 만한 길은 아니니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네? 아,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건 나만이 아니라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호위도 마찬가지였다.
“단장님, 기사단 지부 회의는 어쩌시려고요?”
그러고 보니 급한 일이 있어 공작저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지.
“수고스럽겠지만 회의에는 혼자 다녀와야겠군. 대리인 임명서를 작성해 줄 테니, 발언권에 차별은 없을 거다.”
나는 너무 놀라 손사래 쳤다. 이미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이보다 더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안 그러면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레어넌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뭐지? 왜 이러지? 너무 친절하니 되레 갑자기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방에 적뿐이던 삭막한 저택에서 2년간 눈칫밥으로 버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럴 땐 보통 꿍꿍이가 있을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혹시 내 정체를 눈치챘다거나…….
“기사들에게 부탁해 마차를 구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마부의 신원까지 알아보기엔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 상황에 숙녀분을 혼자 보낼 수는 없지요.”
“그건 그렇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얼른 마차를 수소문해 오라고 하겠습니다.”
응? 나는 생각을 멈춘 채 벌써 멀리 뛰어간 호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금 천천히 시선을 돌리니, 따듯한 눈빛이 날 마주하고 있었다.
“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곤경에 빠진 이를 돕는 것은, 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도리 아닙니까.”
티 없이 맑고 선한 미소가 쏟아졌다. 아, 눈부셔……. 터무니없는 의심을 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결국 나는 한없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럼 정말 염치없지만, 감사……합니다.”
비로소 자신이 원하던 말을 들었다는 듯 레어넌 단장은 또다시 입술 끝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300주를 구매합니다!」 「어? 우리 단장님은 어디 가셨나요? 제 눈에는 빛밖에 안 보여서요.」 어김없이 주접 멘트가 달렸지만, 지금만큼은 나 역시 깊이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늦은 밤이지만, 기사들은 금세 마차를 구해 왔다. 호위를 비롯한 그들은 거수경례를 한 채로 나와 레어넌 기사단장이 마차에 오르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기까지 했다. 레어넌 기사단장이 타고 갈 것을 의식했는지, 무척이나 크고 쾌적한 마차였다. 좌석은 넓고 푹신했으며, 깨끗하게 세탁된 방석이 여러 개 놓여 있어 이대로 한숨 자도 될 것 같았다. 이게 웬 호사냐. 너무 좋다…….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노숙을 불사했건만, 지금은 안락한 지붕 아래 두 다리 쭉 펴고 편히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이제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커다란 덩치를 일부러 한껏 구석에 몰아넣은 채 비좁게 앉아 있는 레어넌 단장 말이다.
“왜 그러고 계세요? 편히 앉으세요.”
“편합니다.”
그는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더니 얼른 덧붙였다.
“갈 길이 머니 편히 계십시오. 눈을 좀 붙이셔도 좋고요.”
참 고마운 배려였다. 거기다 맞은편에 앉아 있어 시야에 꽉 차게 들어오는 저 잘생긴 외모도 내 눈에는 너무나 고마우니, 그야말로 배려의 화신이라도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레어넌 성기사단장은 천사라고 떠들어 댔던 하녀들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간증할 것이다. 정말 천사 맞았노라고……. 그나저나.
‘펠리어트랑 가까운 사이는 아닌 모양이야.’
나는 속으로 남몰래 안도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토록 성대했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레어넌 기사단장을 본 기억이 없으니까. 올 수 없는 피치 못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행여 둘이 가까운 친우 사이였다면 저택의 하녀들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만큼이나 날 도와준 사람에게 내가 누군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이 됐다. 그러나 이 일이 행여 세간에 드러날 경우, 내가 공작 부인인 걸 모른 채 도주를 도운 것과 알면서도 도와준 것은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내게 아낌없는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지.
“저기…….”
나는 소리 없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죄송해서 어쩌죠? 연회를 마다하고 참석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회의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
“정말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부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요. 사실 연회 자리를 썩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회의에 따라나선 것도 있습니다.”
“북부에서 연회가 열리는 건 드문 일인데, 호, 혹시 공작저에서 연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와아, 분명 엄청 호화로웠겠지요?”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건만, 그저 뻔뻔하게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랬을 겁니다. 가주가 무사히 돌아왔으니까요.”
“그 가문과…… 많이 친하신가 봐요?”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자리에 초대를 받으신 걸 보면요.”
“가주인 펠리어트 공작과는 어린 시절 기사 학교 동급생이었습니다만…….”
잠시 생각하던 레어넌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다지 교류는 없던 사이입니다.”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열심히 리액션까지 해 주고 싶었다. 그럼요, 그럼요. 그러셨어야죠. 햇살 같고 천사 같은 단장님께서, 그런 미친 북부 공작 따위와 어찌 교류를 할 수 있으시겠어요!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참석은 못 했지만요.”
바로 그 부인을 수갑이 가득한 방에 가뒀다고요! 아주 정신이 회까닥해서는!
“그러셨군요.”
하지만 속마음을 들킬 수는 없으니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이 화제를 마무리 지었다. 마음 한편에 깊은 안도감을 느끼며. 그 후에도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상대가 나에 대해 노골적으로 캐내려 한다거나, 불쾌한 호기심도 전혀 없었기에 더욱 편했다.
덕분에 나도 레어넌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에크레투스 성기사단의 관저에서 자랐다는 것과 그 관저는 레어넌의 가문인 베르하르트가의 소유라는 것 등등.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화목하고 밝은 가정에서 번듯하게 잘 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있으셨군요. 저도 결혼한 누님이 한 분 계십니다. 작년에 자비에르 자작과 혼인을 올렸지요.”
“네? 아, 그, 그러셨군요.”
“놀라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예상하시는 대로 정략혼은 아니었습니다. 누님께서 워낙 고집이 세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셨거든요. 그래도 자비에르 자작님처럼 좋은 배필을 만나 부모님께서도 아주 흐뭇해하십니다.”
더군다나 이 얘기를 듣고는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베르하르트 가문의 장녀가 자작과 혼인을 하다니.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귀족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부모님이 어떤 심성의 소유자인지, 절로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건지 쭉 의문이었는데,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토록 올곧은 부모님 아래에서 컸으니, 약자에게 아낌없는 친절을 베푸는 건 숨을 쉬듯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역시 성기사단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안락하고 편안한 분위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사르르 감은 그때였다.
‘아, 지루해.’
“앗.”
나는 당황하여 눈꺼풀을 황급히 들어 올렸다.
“지루하세요? 죄송해요. 저 안 자요.”
“네?”
레어넌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헉!”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까지 내지를 것 같았던 탓이다. 너무 놀라 몸까지 벌벌 떨렸다. 분명 목소리가 들렸는데…… 레어넌의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그럼 이 목소리는 대체 누구야!
“왜 그러십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생각한 건지, 레어넌이 내 쪽으로 상체를 쓱 기울였다. 그런데.
‘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미안, 너무 놀라진 말고.’
콰앙! 갑자기 큰 굉음이 들리더니 눈앞에서 빛이 번쩍 터졌다.
“꺄아악!”
나는 눈을 꽉 감고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싼 채 냅다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단장님, 괜찮으세요?!”
휘이잉. 사방은 그저 고요했다.
“단, 단장님?”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조심스레 눈을 뜨자,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어넌 단장님……!”
나는 방금까지만 해도 내 앞에 앉아 있었던, 아니 응당 앉아 있어야 할 남자를 계속해서 목 놓아 불렀다. 그러나 대답 대신 스산한 바람 소리만이 지붕 위를 스쳤다. 쉴 새 없이 달리던 마차의 바퀴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온 사방을 뒤덮은 건 그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뿐이었다. 은은하게 창문으로 비쳐 오던 달빛도, 차장 밖에 달린 램프의 빛도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허읍…….”
겁에 질린 나머지, 크게 들이마신 숨을 내뱉는 것조차 잊은 그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문에서 가장 먼 곳까지 몸을 물렸다. 당장에라도 누군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와 날 해칠 것 같아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안녕, 로렐라.”
젊은 남자의 것인 듯한 낮은 목소리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여 캄캄한 어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워, 내가 선택한 주인공.”
마치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빠르게 몸이 굳어 갔다. 누, 누구세요? 난 주인공 같은 거 하겠다고 말한 적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