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내가 바로 이 구역 주접킹!2021.07.14.
“단장님, 안 됩니다! 저희는 급한 볼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일부러 공작저의 연회도 마다한 건데…… 이 숙녀분께는 제가 따로 사람을 보낼 테니 지금은 그냥 가시지요.”
남자가 나를 부축해 일으키기가 무섭게 그의 곁을 지키던 또 다른 남자가 다가와 황급히 말을 던졌다. 하지만 곧장 떨어진 것은 칼 같은 대답이었다.
“아니.”
단박에 떨어진 거절에 당황한 호위의 시선이 주섬주섬 하이힐을 신던 내게로 향했다. 내 몰골을 위아래로 훑어본 그는 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다 괜한 일에 연루되시면…….”
걱정스러운 말에도 남자는 대답 없이 조심스럽게 나를 부축해 말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단번에 말 위로 훌쩍 올려 주었다.
“다친 사람을 모른 척하고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
자신도 말 위에 오르며 호위에게 차갑게 일갈한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상한 목소리로 내게 당부했다.
“꼭 잡으십시오.”
박차를 가하자 검은 말이 한 번 푸르르, 투레질하더니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빠르게, 그러나 매우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았다. 매서운 바람이 귓가에 윙윙 소리를 내며 얼굴을 할퀴었지만, 나는 돌이 된 것처럼 눈동자도 굴리지 못했다. 방금 그들이 나눈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급한 볼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일부러 공작저의 연회도 마다한 건데…….’
연회가 시작되기 전, 꼭 참석해서 자신의 격을 높여 주었어야 할 손님이 빠졌다며 투덜대던 엠마가 아직도 생생했다. 무척이나 중요한 손님이라고 2절, 3절도 모자라 4절까지 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 손님 중에 ‘단장’이라면……. 나는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미친! 레어넌 성기사단장이잖아!’
2년 동안 공작저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한 내게도 유명한 이름, 레어넌 베르하르트. 펠리어트가 참가한 전쟁이 2년간이나 이어졌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쟁의 주 무대가 되었던 지역이 춥고 음습한 걸로도 모자라, 각종 마물이 출몰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던 탓이다. 그래서 그에 대항하기 위해 성기사단이 나섰고, 그들의 활약이 굉장했다는 것은 온 제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물며 그 최전방에 섰던 성기사단장이라면 오죽할까. 심지어 틈만 나면 하녀들이 꺅꺅대며 입에 올린 이름인지라 더욱 귀에 익었다. 대륙 최고의 미남이자 신사인데, 사실은 인간이 아니고 금발의 천사라나 뭐라나. 그러고 보니 느슨하게 묶은 긴 금발 머리에, 흰색 제복을 무거울 정도로 수놓은 훈장들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했었지.
‘바로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펠리어트와 마찬가지로 2년간 전쟁터에만 묶여 있던 그가 나를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레어넌이 못 알아보더라도, 호위는 아닐지도 몰랐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나는 바람에 펄럭거리는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말의 발이 멈춘 곳은 커다란 철문 앞이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엔 높다란 담이 있었고, 그 너머로 둥그런 돔 모양의 꼭대기가 보였다.
“사설 기사 훈련소입니다. 성기사단의 지원을 받는 곳인데, 여기에 늘 상주 중인 의사가 있습니다.”
그 말에 호위는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체념한 듯 두꺼운 문고리를 잡고 철문을 쿵쿵 두드렸다. 레어넌 단장은 마치 나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나는 그 틈을 타 그의 얼굴을 보다 자세하게 살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느슨하게 묶어 넘긴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푸른 벽안과 조각처럼 날카로운 콧대 역시 차례차례 두 눈에 담겼다. 턱 근처에는 깊게 베인 흉터가 남아 있었는데도, 살벌하긴커녕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미남이었다. 아까는 도망치는 데 급급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몹시도 수려했다.
아, 이래서 하녀들이 그 난리였구나……. 남몰래 고개를 끄덕이는데, 기사 복장을 한 남자 서넛이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그들은 레어넌을 보자마자 즉시 검을 허리춤에 붙이더니 절도 있게 경례를 건넸다.
“연락도 없이 오시다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다친 사람이 있다.”
레어넌은 문 앞으로 쓰윽 말을 몰았다.
“당장 의사에게 안내하도록.”
숲에서와는 달리 문 위에 달린 수많은 램프 덕분에 사위가 밝았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도 엉망으로 찢기고 더럽혀진 드레스와 피투성이가 된 발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잘 훈련된 듯한 기사들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나는 발을 꼼지락대며 드레스 자락으로 어떻게든 가려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기사들의 시선은 좀처럼 내 발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정적 후, 기사 중에서도 직위가 높아 보이는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우선 환자분의 신분과 성함을 방문 명부에 작성해 주십시오.”
“아니. 방문 기록은 남기고 싶지 않군.”
단호하게 떨어진 대답에 기사들은 서로 난처하다는 듯 눈빛을 교환하더니 조심스레 덧붙였다.
“단장님. 정말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곳은 사유지입니다. 규칙을 따라 주십시오.”
무사히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지, 이런 일을 맞닥뜨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여기까지 도와주신 걸로 충분해요. 이제부터는 혼자 갈게요.”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지만, 레어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전부 책임지겠다.”
그저 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때,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말 한마디에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기사들에게 그의 명령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문을 통과하자 또다시 잘 정비된 널따란 길이 나타났다. 밤이슬을 잔뜩 머금은 축축한 길 위로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안개처럼 낮게 깔렸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이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야.’
고마움과 더불어 안도감이 차올랐다. 줄곧 그의 소맷부리를 쥐고 있었던 손의 힘도 비로소 천천히 풀렸다. 이윽고 눈앞에 훤히 불을 밝힌 작은 단층 건물이 나타났다.
“조심해서 내리십시오.”
먼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레어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안장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런데, 바닥을 딛자마자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졌다.
“아얏!”
발뒤꿈치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쓰라렸다. 걷는 것은 물론, 구두를 벗는 것조차 쉽지 않을 듯한 고통이었다. 한 발자국 내디뎠을 뿐인데도 온몸에 눈물이 찔끔 고일 만큼 아팠다. 결국 고통에 못 이기고 몸이 크게 휘청였다.
“이런.”
짧은 탄식과 함께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 두 발이 허공에 사뿐히 들렸다. 아니, 두 발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다.
“저, 저기……!”
당황한 나머지 팔을 허우적거리던 그때였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당신의 주식을 구매합니다. 100주, 200주…… 300주 돌파!」 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름이 갑자기 주식을 사기 시작했다. 띵동! 「악!! 공주님 안기는 못 참지! 다들 소리 벗고 빤쓰 질러!」 동시에 충격적인(?) 메시지가 화면을, 아니 두 눈을 가득 메웠다.
“악.”
민망한 나머지 내 입에서도 짧은 비명이 터졌다. 덕분에 오해를 샀는지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너무 힘을 준 겁니까?”
레어넌은 당황함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불편하신지요?”
“아, 아니요! 불편하긴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너무 편안해서 잠이 오려고 하는걸요!”
당황한 나머지 내 입에서도 주접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시다면 꼭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레어넌은 내 말이 민망하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신신당부했다. 띵동! 「100주가 추가로 판매되었습니다.」 「저런 자상한 남자 별로…… 내 마음의 별로★」 그만해, 그만하라고! 화끈거리는 얼굴로 소리 없이 외치는 와중에도 레어넌은 성큼성큼 걸었다. 기사들이 열어 준 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독특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리 이야기를 들은 건지 의사는 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환자는 이 여성분입니까? 어서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저, 저 걸을 수 있어요. 무거울 텐데 내려 주세요……!”
하지만 레어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상처가 심해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길게 하나로 묶은 부드러운 금발이 내 턱 언저리에서 사락거렸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그 근처를 문지르려던 찰나.
“……그리고 전혀 무겁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스민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띵동! 「주식 100주가 또 판매되었습니다!」 「전혀 무겁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드르륵 탁……. 전혀 무겁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드르륵 탁……. 전혀 무겁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드르륵 탁……. 전혀 무겁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 종소리 나만 들리는 거 맞겠지? 이 멘트 정말 나만 보이는 거 맞냐고! 들키기라도 하면 수치사 각이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어쩌다 이렇게 되신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때 레어넌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춘 채 얼른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 조금 민망했지만, 시선을 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했다.
“아, 그게…….”
띵동! 「눈 마주친 거 유죄임. 웃은 것도 유죄임. 둘이 결혼 안 하면 종신형임!!!!!」 ……뭐라고?! 하려던 대답이 그만 쑥 들어가 버렸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아, 저는 레어넌 베르하르트라고 합니다. 수상한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띵동! 「‘이 구역 주접킹’ 님이 또다시 주식 100주를 삽니다.」 레어넌 기사단장의 목소리조차 시끄러운 종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양손에 종 열 개를 쥐고 바로 옆에서 흔들어 대는 듯 점점 골이 아파 왔다.
“아까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쫓기고 계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띵동! 「단장님, 혹시 말 한 필 더 안 필요하세요? 저 건초 조금밖에 안 먹어요…….」 띵동! 「사랑님, 단장해…….」 띵동! 아, 이제 도저히 못 참겠다!
“시끄러워!”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니,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나도 말 좀 하자, 말 좀! ……지금 레어넌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게 생각난 건, 혀까지 차며 투덜대고 난 다음이었다.
‘아뿔싸.’
갑자기 거짓말처럼 침묵이 찾아왔다. 레어넌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나까지 당황해 말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단장님께 하는 말이 아니라! 제가 종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만……!”
안 돼. 이건 더 무덤을 파는 짓이야……! 뒤늦긴 했지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얼른 내 입을 틀어막았다. 하여, 또다시 침묵이었다.
“…….”
휘이잉. 열어 놓은 문에서 불어온 바람이 금빛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달아났다. 아까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몹시 침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살짝 처진 그의 눈매가, 더욱 아래를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