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2021.07.10.
“으, 아이고…….”
너무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시큰한 무릎을 후들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발치에는 문짝이 떨어지며 부서져 내린 돌들이 여기저기 채였다. 뒤를 돌아보니 아까 전만 해도 문이 있던 자리가 휑하니 비어 있었다.
“헉.”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다시 입술이 스르륵 벌어졌다. 문을 마구잡이로 내리쳤던 손은 아직도 얼얼했다. 내 손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꼼짝 않던 무식한 철문이, 고작 밀친 것만으로 통째로 떨어져 나가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혹시라도 누가 꺼내 준 건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걸 진짜 내가 했다고?
“아니, 이런 미친.”
나는 감탄을 흘리며 양 볼을 아프게 꼬집어 보았다. 얼얼한 통각이 느껴지는 걸 보니, 현실이 맞긴 했다. 설마 무슨 쿠키…… 덕분인 건가? 보너스 쿠키? 보상……?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은 단어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대관절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확실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철문이 부서지며 꽤 큰 소리가 나는 바람에 좀 걱정했지만, 근처를 지키고 있지는 않았는지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내가 설마 저 두꺼운 철문을 부수고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을 테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사람의 왕래도 없는 곳이라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내가 갇혀 있던 안쪽은 그 흔한 촛불조차 없어 몹시도 음산해 보였다.
“뭔 이따위 방을 만들어 놨어?!”
천장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끈을 바라보니 새삼스레 분노가 치밀었다.
“이 미친 캐릭터 같으니!”
진심을 담아 욕설을 내뱉은 나는, 그대로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일단은,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 * * 나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한 손으로 말아 올린 채, 정원 구석에 주저앉아 헉헉, 가쁜 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철문이 보였다. 하인들이나 상인들이 쓰는 뒷문이었다. 저기가 마지막 관문이다. 요리조리 숨어 가며 저택 밖으로는 어찌어찌 잘 빠져나왔지만, 문제는 바로 저 앞을 지키고 있는 서너 명의 문지기들이었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따돌리지? 그들은 꼿꼿이 선 채 매서운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평범한 고용인이 아니라, 누구보다 잘 훈련된 병사들이니만큼 주의를 돌리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누군가 내가 없어진 걸 발견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니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화, 화면! 창!”
숨이 넘어가라 외치자 정말로 눈앞에 화면이 떠올랐다. 「두 번째 쿠키를 받으시겠습니까? 1. 네 2. 아니오」 그래, 바로 이거야! 아까랑 똑같은 쿠키! 나는 들킬세라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작게 속삭였다.
“쿠키 주세요! 지금 바로 당장!”
말을 마치자마자, 또다시 허공 위에 반짝거리는 금색 게이지가 떴다. 나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문 쪽으로 조금씩 살금살금 다가갔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문지기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다시 한번 눈앞의 상태창을 찬찬히 살폈다. 첫 번째 쿠키 때와는 달리, 금색 바가 줄어드는 속도가 엄청나게 느렸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고? 설마 내 생각이 틀린 거야?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마른침만 삼키고 있던 그때, 저택 안쪽에서 갑자기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부, 불이야!”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2층의 어느 창문에서 회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저택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내가 숨어 있는 수풀 앞으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중 양동이를 들고 있던 한 남자가 문지기에게 크게 소리를 쳤다.
“뭐 하고 있어? 당장 가서 방재 모포를 가져와!”
“아,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혼비백산하여 창고를 향해 달려갔다. 철문 앞은 어느새 텅텅 비어 버렸다. 나는 두 눈을 쓱쓱 비비며 철문과 미세하지만 여전히 줄어들고 있는 게이지를 번갈아 살폈다.
“설마 쿠키를 굽다가 불을 낸 건…… 아니겠지?”
잠시 자문해 보았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명확한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때는 지금밖에 없다는 것. 여길 나가면 돌이킬 수 없겠지만, 애초부터 돌이킬 생각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아무도 없는 문을 향해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 * * 그 시각.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하인들에게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빨리 물을 가져와!”
“네, 넵!”
펠리어트의 명령에 고용인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누군가는 꽃을 다 빼 버린 화병을 잽싸게 들고 왔고, 양동이를 들고 욕실로 바삐 달려가는 자도 있었다. 그 틈을 타 펠리어트는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그러고는 불길에 휩싸인 액자 위로 거칠게 휘둘렀다.
“이, 이리 주십시오. 공작님. 제가 하겠습니다!”
집사가 화들짝 놀라 만류했지만, 그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펄럭, 바람이 일 때마다 펠리어트의 검은 눈동자도 마치 풍랑이 인 것처럼 흔들렸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지?’
헛것을 봤다거나, 꿈을 꾼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보았다. 서재의 벽에 얌전히 걸려 있었던 액자에서 난데없이 불길이 치솟기 시작한 것을.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주변에 불에 탈 만한 그 무엇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심지어 액자 안에 든 것은 바로 로렐라와 주고받은 혼인 서약서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서이기에, 누가 함부로 훼손시킬 수 없도록 성력의 보호가 걸려 있는!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있는 힘껏 망토를 휘둘렀다. 그러나 불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
누군가의 다급한 부름과 동시에 뒤에서 촤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양동이를 채워 온 하인 한 명이 급한 나머지 액자 가까이에 서 있는 공작을 향해 물을 뿌려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물벼락을 맞게 된 그의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은 모두 놀라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하지만 펠리어트는 화를 내긴커녕, 뒤이어 속속 도착하는 다른 하인들 손에서 양동이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액자 위로 직접 물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모두의 긴박한 움직임 속에서, 매캐한 연기가 사방으로 피어올랐다. 전장에서조차 고고함을 잃지 않았던 펠리어트는 연못에 빠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꼴사납게 젖어 갔다. 그러나 믿지 못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 불이 안 꺼지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여기저기서 경악에 가득 찬 목소리가 터졌다. 사람들은 모두 제 눈을 의심했다. 커튼이며 서재의 책장에 옮겨 붙었던 불길은 물세례를 맞고 잠잠해졌으나, 서약서에 붙은 불만큼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몸집을 키워 간 탓이었다.
“이걸로 해 보겠습니다!”
그때 두툼한 방재 모포를 가져온 기사가 아예 액자를 덮어 버리듯 눌렀다. 그 틈을 타 다시 양동이를 채워 온 하인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공작의 서재는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잿빛 가루들도 여기저기 눈처럼 흩날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걸까.
“공작님! 큰일 났습니다!”
저 멀리서 쩌렁쩌렁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윽고 병사 하나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큰소리로 외쳤다.
“고, 공작 부인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일순 고요함이 밀어닥쳤다. 마치 폭풍 전야와도 같은. 펠리어트의 고개가 문 쪽으로 스르륵 향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죄, 죄송합니다. 끅, 흡……!”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한 병사는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무서운 얼굴은 난생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갔을 때는 끅, 이미 철문이 부서져 있어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말에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펠리어트 공작만큼은 아니었다.
“철문을…… 부쉈다고?”
펠리어트는 머릿속이 텅 비는 듯했다. 사방에서 피가 튀는 전장에서도 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결국 그의 머리에 남은 건 오로지 로렐라의 얼굴뿐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날부터 줄곧 잊힌 적 없던.
“오, 신이시여…….”
이 난리 통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하녀 하나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떠오른 생각 하나가 펠리어트의 뇌리를 날카롭게 관통했다. ……내통했다던 상대가 설마.
“흑마법을 쓰는 자인가.”
소리 내어 되뇐 그때, 기사가 팔을 후들거리며 들어 올린 방재 모포 아래로 새카맣게 탄 액자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거센 불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벽에 걸어 두는 용도로 쓰던 동그란 모양의 쇠 고리였다. 그것이 데굴데굴 굴러와 펠리어트의 발 앞에 멈춘 순간.
“당장 영지 내 성벽의 문을 전부 봉쇄해라!”
저택의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거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모든 병사를 집결시켜. 개든, 말이든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전부 동원해서 이 일대를 샅샅이 수색한다!”
“네, 넵! 알겠습니다!”
병사는 마치 자신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선두에 서겠다.”
펠리어트는 마치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했다.
“놈의 머리를 베어 버리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으득, 하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는 여기저기 타서 구멍이 숭숭 뚫린, 물이 뚝뚝 떨어지는 망토를 그대로 걸치고는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고, 공작님!”
놀란 병사가 황급히 뒤쫓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구르듯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고용인들의 구둣발 소리,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모여드는 병사들의 묵직한 갑옷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늘 조용하고 고요했던 저택이, 이토록 소란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 * * 나는 이를 악문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북부의 밤은 유독 빨리 찾아왔고, 동시에 이가 달달 떨릴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귓가에 휭휭 소리가 일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마의 땀은 식을 줄 몰랐다.
“헉, 헉…….”
입술 사이로 거친 숨과 함께 허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뛰었을까. 길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옆쪽으로 울창한 삼림이 나타났다. 그러나 나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 서는 순간, 날 방으로 밀어 넣던 손이 그대로 목을 낚아챌 것만 같았기에. 허리께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붉은 머리카락은 이미 산발이 된 지 오래였다. 드레스 주름에 덧대어 장식한 레이스는 거친 나뭇가지에 걸려 어느새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심지어 이젠 하이힐을 신은 양 발뒤꿈치가 욱신거리다 못해 쑤시듯 아팠다. 띵동! 「두 번째 쿠키가 사용되었습니다.」 「혼인 무효.」 또다시 눈앞에 밝은 창이 나타나 메시지를 띄웠지만, 그걸 읽을 틈조차 없었다. 험난한 숲길을 달리는데, 갑자기 단단한 무언가에 발목이 걸렸다.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몸은 흙바닥 위로 나동그라졌다.
“아얏!”
적막을 깨고 비명이 울렸다. 나는 얼른 입을 손으로 막고 주위를 살폈다. 정체 모를 밤새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다행스럽게도 사람의 인기척은 근처 어디에도 없었다.
“아흑…….”
발목은 얼얼했고, 손바닥은 엉망으로 까졌다.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바로 일어섰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옆구리는 물론, 목 안쪽까지 타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넘어졌을 때, 저 멀리서 개들이 사납게 짖어 대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친, 이 미친 새끼!”
울먹이는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공작가 저택의 서쪽 부지에는 커다란 사육장이 있었다. 수십 마리의 도사견을 키우는 곳이었다. 웬만한 아이보다도 덩치가 큰 개들을 떠올리자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그 개들은 겨울에 먹을 게 없어 민가를 습격하는 곰을 사냥할 때나 쓴다고 들었는데!
“허윽, 내가 곰이야? 내가 곰이냐고?! 허으윽!”
나뭇가지를 헤치고 넘어져도 몇 번이고 일어나는 통에 입술이 터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미 나의 통제를 벗어난 두 다리는 기계처럼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급기야 나는 하이힐까지 벗어서 품에 안았다.
“아퍼……! 앗, 따가!”
달릴 때마다 연신 비명이 터지긴 했어도 하이힐을 신었을 때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었다.
‘잡히면 끝이야. 어쩌면 곰처럼 사냥당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나는 그야말로 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짙은 어둠이 내린 숲은 자꾸만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나는 몇 번이고 속도를 줄여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길을 살펴야 했다. 드디어 빽빽한 나무 사이로 정제된 길이 보였다. 산길을 헤치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도로가 있는 곳까지 나와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다그닥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헉.”
나무 뒤에 숨어 슬쩍 바라보니 두 명의 남자가 말을 몰고 있었다. 급하지는 않은지 제법 느긋한 속도였다. 설마 벌써 여기까지 수색대가 온 건가. 나를 찾느라 저렇게 느리게 가는 거 아냐? 나는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며 얼른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잎이 무성한 덩굴로 뒤덮인 커다란 덤불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들이 지나갈 때까지 저기서 쥐 죽은 듯이 숨어 있자.’
마른 잎과 나뭇가지가 이렇게 많은 숲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멀리 도망가는 건 불가능했다. 결단을 내리고 빠르게 걸음을 내디딘 그 순간이었다.
“으악!”
너무 마음이 앞선 탓이었을까. 작게 튀어나온 돌부리에 그만 발이 걸리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이면, 새끼발가락이! 하필이면!
“아흡……!”
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도로 한가운데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앗! 저기 누군가가 쓰러져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든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지만, 일어나기는커녕 저릿한 발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내, 내 발톱……! 설마 빠진 건 아니겠지?!
“괜찮으십니까?”
일어나 보려 끙끙대고 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눈을 끔벅거리며 간신히 고개를 들자, 누군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말을 타던 남자가 어느새 다가온 모양이었다. 사위가 어두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흰색 정복에 달린 수많은 훈장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한쪽 어깨 위로는 느슨하게 묶은 금발이 사르륵 흩어졌다.
“다치신 듯한데 혹시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컹! 컹! 시커먼 하늘 위로 또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는 다르다. 제법 가까운 곳에서 들린 게 틀림없었다.
“절 잡으세요.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와중에 남자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다행히 수색대는 아닌 모양이다. 그거면 됐다. 나는 더 이상 생각할 새도 없이 일단 그의 팔에 냅다 매달렸다.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지,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해요!”
그제야 달빛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 날 바라보고 있었다. 크르릉, 컹! 그 순간에도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금방이라도 등 뒤로 사나운 개들이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마음이 급해졌다.
“빠, 빨리요!”
결국 내 입에선 절박한 외침이 터졌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청색 눈동자가 나를 말 없이 응시했다. 이윽고 머리 위에 커다란 망토가 풀썩, 덮어 씌워졌다.
“이쪽으로.”
낮지만 단호한 음성이 귓가에 스쳤다. 두꺼운 천 너머로 비로소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