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저 새끼 남주 아니죠?2021.07.03.
세실리카 제국 812년. 세실리카의 북부를 다스리는 펠리어트 체임버스 공작은 차갑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썰어 버리는 게 가능하다느니, 눈만 마주쳐도 목이 달아난다느니 하는 소문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2년 전부터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으니, 바로 ‘결혼식을 치르자마자 전쟁터로 달려간 신랑’이었다. 그 후 길었던 전쟁이 끝나고 펠리어트 체임버스 공작이 금의환향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앙상한 숲과 얼어붙은 호수뿐이던 북부 영지는 유례없이 들썩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도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빙의한 바로 다음 날, 어디로 도망칠 새도 없이 그와 결혼해 버린 뒤로 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2년이나 썩었다. 그것도 불과 스물한 살의 창창한 나이에! 2년은 정말이지, 너무나 길고도 길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이제 종지부를 찍을 때가 다가왔다. 그러니, 무조건 이혼이다.
* * * - 북부 공작이 저택에 도착하기 정확히 24시간 전 -
“공작 부인, 마님께서 부르십니다.”
나는 기다리고 있던 소식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쯤 ‘그녀’가 나를 불러낼 거라 예상했으니까. 하인을 따라 서재로 들어서니, 역시나. 펠리어트 공작의 어머니인 엠마 체임버스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인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싸늘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아기 머리만 한 자루를 턱, 하니 꺼냈다. 쿠웅!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순간, 꽤나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렐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내 아들이 돌아오는 대로 그 애와 이혼해다오.”
“……네?”
역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얼른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부릅뜬 채 창밖의 새파란 하늘을 응시했다. 이렇게 하면 눈물이 잘 나온댔어. 아주 잠시간 그러고 있으니 금방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 틈을 놓칠세라 얼른 입을 열었다. 눈이 아려서 그런지 목소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떨리고 있었다.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애는 이제 제국을 구한 영웅이야. 황실에서도 큰 상을 약속한 공로자라고! 앞으로 창창한 미래가 펼쳐질 텐데 그걸 막을 셈이냐?”
“하지만…….”
그녀는 날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발목 잡지 말고 이제 그만 나가 주면 고맙겠구나. 이건 그 대가라고 생각해다오.”
슬쩍 풀어진 자루 틈새로 황금빛이 일렁였다. 금화가 틀림없다.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입술을 있는 힘껏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 그래도 무조건 이혼하려고 했는데, 감사합니다!’라고 외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넌 퍽 순종적이고 얌전한 아이였지. 그러니 이번에도 내 말을 들어주리라 믿는다.”
“……어머님.”
“좀 더 솔직히 말할까? 애초에 넌 우리 가문과 격이 안 맞았어.”
“흑…….”
차갑기까지 한 그녀의 말에, 나는 얼른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을 짜내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짜증이 치솟은 탓이었다.
‘야, 이 양심도 없는 노인네야!’
그녀가 나를 탐탁지 못하게 생각하면서도 내쫓지 않았던 건, 행여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기라도 하면 끈 떨어진 풍선이 될까 봐 걱정한 탓이었다. 근데 이젠 아들이 돌아왔으니 나 따윈 필요 없다 이거지? 그런데요, 할머니. 잘 모르시나 본데 북부 공작은 원래 쉽게 죽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지옥에서도 살아 돌아오는 게 북부 공작의 기본 법칙이니까! 화가 뻗쳐서 확 이렇게 쏘아 주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는 내 모습이 우는 것처럼 보였는지, 엠마는 쯧, 혀를 찼다. 손 틈새로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그 애에게는 네가 얘기하도록 하렴. 너를 위해서라도 깨끗하게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게다.”
나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러고는 스르륵 뒷걸음질 쳤다. 재빠르게 손을 뻗어 낚아챈 금화 주머니를 품에 꼭 안고서. * * * - 북부 공작이 저택에 도착하기 12시간 전 - 나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혼자 히죽거렸다.
“좋아, 아주 좋아.”
정확히 10개씩 쌓아 놓은 금화 탑이 탁자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온통 번쩍거리는 금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뭔지 실감 났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대로 움직여 줄 줄이야.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아들의 아내에게 이혼해 달라 요구하는 시어머니.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물지으며 돌아서는 착한 아내. 빙의하기 전까지 이런 광경이 등장하는 만화, 책, 게임 등을 얼마나 팠던가. 못해도 수십, 아니 수백 개는 될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간접적으로 숱하게 경험했다 해도, 역시 직접 눈앞에서 보는 건 느낌이 전혀 달랐다. 꺅! 짜릿해! 최고야! 산더미 같은 금화를 보니 이 춥고 낡은 저택에서 그동안 조용히 죽어 지냈던 게 아주 억울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가 없는 2년간 야반도주라도 할까,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엠마 체임버스와 그녀가 고용한 하수인들의 감시가 실로 살벌했다. 그야말로 감방을 지키는 간수나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지만 그랬던 시어머니께서 이제는 이혼해 달라고 사례금까지 주신 마당이다. 어찌 신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머님, 감사합니다. 이 돈은 저한테 좋은 곳에 유용하게 잘 쓸게요. 그녀의 방이 있는 쪽으로 진심을 담은 묵례를 한 뒤, 금화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 위에는 언젠가 찾아올 자유를 꿈꾸며 미리 조사해 둔 내용이 가득 적혀 있었다.
“역시 제일 처음엔 호텔 델피노로 가는 게 좋겠어. 장기 투숙자한테는 숙박비를 30퍼센트나 할인해 주잖아. 3개월 단위로 정기 식사권을 만들어 주는 제라르 레스토랑도 옆에 있으니까.”
이 정도라면 2년 반, 아니 3년도 거뜬할 것이다. 매일매일 호캉스나 하면서 놀고먹어도 무려 3년 동안이나 버틸 수 있는 돈이라니, 최고다! ……물론, 그렇게 펑펑 쓰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편히 놀고먹을 수만은 없어.”
지금은 비록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지만, 빙의하기 전 나는 원래 평범한 한국인이었으니까. 게임에서조차 일하지 않으면 불안한……! 잠시 자유를 만끽하고 나면 이 금화를 밑천 삼아 자산을 불릴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다시 주머니에 돈을 주섬주섬 챙겨 넣은 뒤, 가벼워진 마음으로 침대에 풀썩 누웠다.
“드디어 내일이구나.”
자고 일어나면 이 지긋지긋한 저택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머릿속이 편안해지자 금방 사르르 눈도 감겼다. * * * - 북부 공작 펠리어트가 도착하기 10초 전 - 커다란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하인의 얼굴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식 이후 2년 만에 보는 거라 그런가, 왠지 모를 긴장감이 엄습했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호위하던 기사 중 하나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화려한 자줏빛 벨벳으로 감싼 좌석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곧장 누군가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부드러워 보이는 흑발을 이마 위로 깔끔하게 넘긴 남자였다.
‘제트기를 타고 가면서 봐도 쟤가 북부 공작인 건 다 알겠네.’
호위 기사들이 양옆으로 서서 만든 길을 걷는 그를 보고 있으니, ‘북부 공작 = 흑발’이라는 공식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다. 냉정하다 못해 냉랭한 그의 분위기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으니까. 게다가, 2년간 저 얼굴을 어떻게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조각 같은 외모였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입이 떡 벌어졌을 것이다. 그는 과연 북부 대공답게 똑바로 걸어올 뿐인데도 묘한 위압감을 주었다. 서늘하고 차가운 눈빛 탓인지 사용인들의 고개는 죄를 짓기라도 한 사람처럼 점점 땅을 향해 떨어졌다. 나는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저런 남자 앞에서 이혼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긴장되었다.
“어서 오렴. 자랑스러운 내 아들아……!”
숨 막히는 분위기를 깬 건 그의 어머니인 엠마였다. 어느새 한걸음에 달려간 그녀는 공작의 어깨를 덥석 껴안았다. 그는 눈물을 펑펑 흘리는 어머니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꾸벅 묵례를 건넸다. 그러고는 내 쪽을 향해 스윽 걸음을 옮겼다. 허리춤에 찬 장검이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다녀오셨어요.”
나는 일단 ‘남편’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를 건넸다. 상당히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그래서 더욱 유약하고 내성적인 아내처럼 보였으리라.
‘자, 이제 날 길가의 돌멩이 보듯 바라보겠지?’
흘끗. 아니나 다를까, 서늘한 시선이 내 얼굴을 무심하게 훑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뻐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한마디 더 덧붙였지만, 돌아올 반응이 어떨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히 대답 따윈 하지 않겠지.’
“…….”
역시나 그의 꽉 다물린 입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무감한 서로의 시선이 잠시간 얽혔다. 부부 사이에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 고용인들은 물론, 엠마조차 섣불리 말 걸지 못했다. 이윽고 내게서 시선을 거둔 펠리어트는 그대로 말없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후우…….”
나는 스카프 매듭을 느슨하게 잡아 풀며 그제야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북부 공작만큼 알기 쉬운 캐릭터도 없으니까.”
“네? 공작 부인, 뭐라고 하셨어요?”
내 혼잣말에, 하녀 한 명이 귀를 쫑긋대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만큼은 그가 날 싫어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만약 이게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소설이라면, 지금부터가 이야기의 시작이 아닐까.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아내를 돌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남편과 이혼 요구에도 끝까지 버티는 며느리가 눈엣가시인 시어머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미련하리만치 참아내는 착하고 얌전한 여주. 하지만 결국 지친 그녀는 어느 날 말없이 떠나 버릴 테고, 그제야 남자는 후회할 것이다. 늘 자신의 옆을 묵묵히 지키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과 광기에 서서히 물들어 가겠지. 그래, 역시 로판은 집착남, 후회남이 최고야. 후회남 키워드만 보면 일단 카트에 넣고 봤던 과거가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내가 그 당사자가 되는 건 절대로 사양이다.
“그런 건 그냥 소설로 볼 때나 재미있는 거라고.”
평생 얼굴만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를 하녀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펠리어트 공작의 뒤를 바삐 따랐다. * * * 늘 황량할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던 공작저 안은 간만에 활기가 넘쳤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펠리어트 공작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가 열린 탓이었다. 연회장은 전에 없이 화려하게 꾸며졌고,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수많은 귀족이 온갖 선물을 싸 들고 찾아왔지만, 정작 오늘의 주인공은 파티 따위엔 조금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어머니인 엠마가 몇 번이고 붙잡았는데도, 그는 좌중을 향해 무뚝뚝하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서재로 올라가 버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나와 엠마에게 몰려들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우리에게라도 환심을 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적당히 사람들을 상대하다가 틈을 봐 슬쩍 연회장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조용한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올랐다. 이혼하기 전까지는 체면을 차려야 한다며 엠마가 직접 골라 입힌 화려한 드레스는 온몸을 꽉 죄어 불편하기만 했다. 2층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내 발걸음 소리만이 복도를 울렸다. 걸음 끝에는 크고 육중한 나무문이 있었다. 긴장하지 말자. 나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삐그덕, 문이 열리는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깼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책상 너머로 마치 그림처럼 반듯하게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 거친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정하고 지적인 모습이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얼굴이, 그 어떤 것도 허투루 놓여 있지 않은 깔끔한 서재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물론 그런 것과는 별개로, 날 향한 눈동자는 변함없이 쌀쌀맞았지만. 서재 안으로 들어온 내 얼굴을 힐끔 확인한 시선은 곧장 다시 서류로 향했다. 그리고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설마 내가 보고 싶어 온 건 아닐 테고.”
와, 이 시베리아 바람처럼 냉기로 가득한 목소리와 맥락도 없이 던져지는 시비조. 그야말로 뼛속까지 완벽한 북부 공작이다.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이 캐릭터를 조금 더 음미하고 싶은 마음도 내심 있었지만,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일부러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의 눈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냅다 던져 버리고 그대로 줄행랑치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할 거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끝에…….
“이혼해 주세요.”
드디어 말했다.
“이혼?”
펠리어트는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천천히 내려놓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네, 이혼하고 싶어요.”
“……어째서?”
“전 공작님을 사랑하지 않고, 공작님께서도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니까요.”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미묘한 긴장감에 마른침이 목 뒤로 꿀꺽 넘어갔다.
“로렐라.”
이윽고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의 가문인 메이레드 백작가는…….”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한숨 쉬듯이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이번 전쟁에 병력을 지원한 서른두 개의 가문 중 그 어느 곳에도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지.”
새카만 흑발이 펠리어트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황실에 납부한 세금 또한 하위권에 속하니, 내년에도 100석이나 마련된 알현실에 자리를 얻을 일은 없을 테고.”
내 얼굴을 훑어 내려가는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여전히 이곳의 안주인인 이유, 모르겠나?”
“…….”
“바로 내가 허락했기 때문이야.”
그는 뻔뻔하리만치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방금 한 헛소리는 못 들은 걸로 하지.”
마치 나를 아랫사람 보듯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태도에 황당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헛소리? 헛소리이이?! 나는 다시 한번 침착하게 입술을 열었다.
“제 말은 그러니까…… 더 도움이 될 만한 가문과 맺어지시길 바라요.”
어차피 너도 내가 싫잖아? 전쟁터에 가 있는 2년간 공작저로 보낸 서신 그 어디에서도 내 안부를 물은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제국의 영웅이 되셨으니, 분명 메이레드 가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은 혼처가 나타날 거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말없이 이혼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흑요석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서류 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표정은 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졌다.
왠지 험악해진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한발 뒷걸음질 친 그때. 바듯하게 힘을 준 그의 턱 안쪽에서 으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장 찌익, 찌익 소리와 함께 잘게 찢어진 종잇조각들이 공중에 휙 흩뿌려졌다.
“어……?”
새하얀 나비 날개 같은 것들이 눈앞으로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비웃음이 가득 어린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강타했다.
“난 이혼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물론 당신 역시 절대로 여길 떠날 수 없고.”
나를 무시하듯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간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확 오르고 말았다. 소설로만 볼 땐 마냥 흥미로운 장면이었는데, 직접 경험하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
물렸던 걸음을 다시 앞으로 내디디며 그에게 따지려던 그때였다. 띵동, 띵동!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요란한 종소리가 귓가에 울리더니, 갑자기 눈앞에 난생처음 보는 손바닥만 한 눈부신 창이 떠올랐다. 그 뒤로, 다시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남편의 얼굴이 또렷하게 비쳤다.
“헉!”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쳤다. 동시에 투명하고 네모난 창 안에서 영문 모를 글자가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당신의 주식 계좌를 엽니다.」 「50주, 100주, 200주…… 순식간에 300주를 돌파합니다!」
“이, 이게 뭐야!?”
나는 놀라서 그만 비명을 지르며 서재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두 눈을 마구 깜빡여도, 아플 정도로 눈가를 비벼 보아도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젠 미친 척까지 하는군. 연극 따윈 그만둬.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이 바라는 대로 되는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까.”
펠리어트는 내 팔을 잡아 억지로 일으키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러니 얌전히 방으로 돌아가.”
「‘저 새끼 남주 아니죠?’ 님이 크게 분노하며 욕설을 날립니다.」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창은, 펠리어트의 얼굴을 뒤덮은 채로 짧고 간결한 메시지를 띄웠다. 「지랄하지 마, 이 썩을 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