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흐른다.
보이지 않는 공기는 흐르며 세상을 떠돌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뭉치고 흩어지며 계속해서 흘러나간다. 공기로 이루어진 하늘의 강을 따라 구름은 흐르고, 구름 그 자체가 물줄기가 되어 한 곳에 흘러 강이 된다.
강은 뭉쳐서 호수가 되기도 하고, 그대로 흐르다가 바다처럼 뭉쳐 흐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름은 제 무기를 이기지 못하고 땅에 쏟아져 내리고, 다시 땅에서도 흐르기 시작한다.
세상 만물에 존재하는 흐름.
그 흐름이야말로 세상을 관통하는 수많은 진리 중의 하나이니라.
땅이 흐르고, 물이 흐르고, 공기가 흐르고, 불이 흐른다.
천체가 흐르고, 하늘이 흐르고, 사람이 흐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흐르고, 흐르지 않게 된 것은 죽음을 맞이하니라.
하여 옛 선지자 이르기를.
『 멈추지 말라. 고인 물이 썩고 냄새가 나듯,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니라. 흐르고 흐르면 언젠가는 크게 차오르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큰 인물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니라. 』
라 하였다.
하지만 흐른다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닌지라.
내가 흐르게 하느냐, 흐르고 있는 것에 내가 타느냐.
흐름에 저항하느냐, 오히려 속도를 붙이느냐, 몸을 맡기느냐.
그 모든 것의 결과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지금.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기를 선택한 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
"옴 바즈라사뜨바 훔. 옴 바즈라 사뜨바 사마얌 아나파라야 바즈라 사뜨바. 트베노쁘 아티스타 드르다 메 바-바."
미국의 한 빌딩의 고층.
진언을 외우는 이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박진성이라.
회귀 전 용병 시절에 그러하였듯 의뢰받고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토스요 메 바바누라크토 메 바바 수 포스요 메 바바. 사르바 시띤 차 메. 프리야짜 사르바 카르메 수 차 메 치따 스레요 꾸루."
그는 너구리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층 하나를 향연(香煙)으로 가득 메운 채, 그 중심에서 진언을 읊고 있었다. 가부좌(跏趺坐)와 비슷한 자세를 한 채 그는 맨바닥에 앉아있었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손은 기기묘묘한 수인을 그린 채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으며, 마치 무겁고 무거운 물속에서 천천히 부유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연기 속을 헤매며 곡선과 직선을 그렸다.
"훔 하 하 하 하 하 호 바가반-사르바 타타가타 바즈라 마 메 문차 바즈리 바바. 마하 사마야 사뜨바 아흐. 사르바 타타가타 바즈라 마 메 문차 바즈리 바바. 마하 사마야 사뜨바 아흐. 사르바 타타가타 바즈라 마 메 문차 바즈리 바바. 마하 사마야 사뜨바 아흐----."
진성이 외우고 있는 것은 바즈라사뜨바 만트라(Vajrasattva Mantra).
금강살타진언(金剛薩陀眞言), 혹은 백자진언(百字眞言)이라고도 불리는 만트라(Mantra)였다.
빠알간 반딧불이의 꽁무니처럼 뭉게뭉게 피어난 연기 속에서 붉게 빛을 발하는 향의 불꽃.
불꽃에서 용이 승천하듯 천장을 향해 오르는 연기.
천장에 부딪히며 부서지고, 뭉치며 뿌옇게 변해가는 공기.
그렇게 만들어진 구름과 안개 속, 메아리치듯 반사되고 부서지며 퍼져나가는 진언.
신비스러운 풍경이었다.
어쩌면, 기묘하게 보이기도 하였고.
그리고 그 신비스러움이 마침내 그 층을 넘어서서 다른 층까지 침범하기 직전이 되었을 때.
이 풍경을 자아내던 진언이 그쳤다.
마치 신나게 울어대던 산새가 맹수의 기척을 느끼고 부리를 꾹 닫았듯이.
때아닌 밤에 덮쳐진 산이 숨을 죽이듯이.
그렇게 진언은 멈추고, 붉게 빛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던 향이 일제히 꺼졌다.
그리고 천천히 피어오르던 연기는 단말마처럼 마지막 연기를 쏟아내고는 뚝 끊겨버리고, 층을 가득 메우던 연기는 마치 구름처럼 흐르고 흐르며 층 곳곳에 스며들었다.
기둥 안으로.
바닥으로.
창문으로.
환풍구로.
하수구로.
그렇게 연기가 사라지고, 안개가 걷혔다.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 남은 것은 남자 한 명.
양복을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박진성 한 명뿐이다.
진성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의자 하나를 들고 창가로 이동한 뒤,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노을이 있는 풍경.
서울에서 볼 때와 흡사하지만 다른, 그런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다름은 다른 나라에 왔기 때문이 아닌, 그의 거처보다도 더 높은 건물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바라보고 있자면 자동차가 도로에 흐르는 것이 보인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흐르고, 숲처럼 빼곡하게 자라나 있는 빌딩의 내부에는 바쁘게 움직이며 흐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창문에 비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던 창문은 각도에 따라 빛을 비추고, 하늘을 비추고, 새빨간 노을의 빛을 비춘다.
마치 붉은 빛의 강이 흘러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흐름 속.
모두가 있었다.
모두.
사람도.
자동차도.
그리고, 박진성도.
"흐름이라, 흐름이라."
진성은 다리를 꼰 채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천천히, 하지만 빠르고 분명하게 변화하는 외부의 모습이 보였다.
저 외부의 모습은 분명히 하나의 흐름이었고, 그 흐름 속에는 그도 존재했다.
그것은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을 택하였기 때문이며, 나룻배를 타고 강의 아래까지 유유자적 흘러가듯 그 흐름에 끌려가는 것을 그가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 흐름이란 인과로 이루어진 것이라.
그 인과라는 것은 너무나 넓고 복잡하여 사람의 시선으로는 쉬이 알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 우연이 없으며, 그 이유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니.
하여 진성은 그 흐름에 기꺼이 타기로 한 것이다.
그래.
그것이 바로, 루카스의 의뢰를 받아들인 이유였다.
'루카스 메타트로니우스 골드스미스(Lucas Metathronius Goldsmith).'
진성이 알지 못했던 사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이로는 보이지 않기에, 그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다는 것이 더더욱 의아하게 느껴지는 사람.
진성은 이 루카스라는 남자가, 미래가 바뀌어버린 것에 분명히 어떤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추측이며, 동시에 확신이기도 했다.
그 윤곽을 어렴풋이라도 잡을 수 없기에 추측이요.
근거가 없음에도 믿음이 가니 이것이 바로 확신이라.
테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분명, 저 남자의 영향이 있다.
'내가 이름을 듣지 못한 것은 머지않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했음이 분명한 것이라. 죽어야 할 자가 살았으니 돌부리에 물의 흐름이 바뀌듯 그렇게 흐름이 뒤바뀌어도 이상함이 없으리.'
죽어야 할 자가 산다.
살아야 할 자가 죽는다.
그것만으로도 미래는 크게 바뀐다.
대표적인 예도 있지 않은가.
엘라 B 빈터(Ella B Winter).
본래라면 아나스타시아와 같이 존재할 수 없었던 소녀.
그녀는 러시아에서 진성의 손에 의해 죽어야 할 운명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난 그녀는 아나스타시아의 자매로, 이아린과 이세린의 친구로, 대마녀 오딜리아의 또 다른 가족으로, 마녀 아그네스의 딸과 같은 소중한 제자로 존재한 채 미래를 바꿔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어버린 미래는 점점 커다랗게 균열을 만들고, 마침내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을 깨뜨려버리겠지.
그렇기에 루카스의 생존 역시 이처럼 미래를 바꾸는 데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그리 강하지도, 영향력이 있지도 않은 엘라와는 다르게 어마어마한 돈과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기에 더더욱 그 뒤틀림은 심하게 될 것이고.
그렇기에 진성은 기꺼이 그의 의뢰를 받아들였다.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으며, 원한을 여기저기서 사고 다녔음이 분명한데다가, 자신을 시험하는 태도 약간과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수상하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회귀 전엔 알지 못했던 정보를 얻는 것이야말로, 그의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뒤틀린 흐름에 몸을 기꺼이 던지고, 그 흐름의 끝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혹시 아는가.
그 흐름의 끝에 실마리가 있을지.
회귀 전, 마녀의 가마솥처럼 혼돈이 가득했던 땅에서 사라져버렸을 비밀에 접촉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진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떨궜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곤 텅 비어버린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에 불꽃을 피워올렸다.
불씨가 유영하듯 움직이며 눈동자에서 헤엄을 쳤고, 헤엄치는 불꽃이 선을 이루며 입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강화된 눈길은 불꽃의 끝을 새까만 하늘로 내보내고, 매연 속에 가려진 별빛을 읽기 위하여 그 속을 꿰뚫으려 하였다.
하지만 불꽃조차 감히 범접하지 못할 장막이 드리워져 있으니.
아메리카 대륙의 위에 떠 있는 위성들이 날개를 접은 채 부유하며, 그가 별을 읽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적도 상공 35,786km에 떠 있는 그 위성들은 감쪽같이 자기 모습을 숨긴 채.
하지만 그 위치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미국을 감싸고 있었다.
'과연. 이 시기에도 있었군.'
그것은 진성에게는 참으로 익숙한 위성인지라.
그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으로, 묘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