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정 죽돌이처럼 홍삼 사탕 먹고 좋아하기는."
이아린은 진성의 칭찬이 부끄러운 듯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꽤 매콤한 느낌의 말이기는 했지만, 얼굴이 붉어져 있는 것이나 쑥스러워하는 표정 등을 볼 때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하는 말임이 분명했다.
이세린이 이아린에 대해서 말하기를, '공격은 강한데 방어는 약한 암살자 유형.'이라고 비유했었는데, 딱 그 느낌 그대로인 듯 보였다.
"허허. 그래, 뭐 되었고…. 다들 저택에 있느냐?"
"응? 뭐, 그렇지. 우리 꼰대야 같이 식사 안 하면 무슨 저주라도 받는 것처럼 유별난 인간이고, 어머니들은 뭐…. 우리 꼰대 말이면 눈에 하트를 띄우면서 좋아하잖아?"
이아린은 그렇게 말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내었다.
"아, 근데 음침한 동생은 집에 없을 것 같은데?"
"음?"
"요새 건방져졌더라고. 언니의 위엄을 나한테 때려 박아 주겠다느니 뭐니…. 언니한테 말이 그게 뭐람."
그녀는 툴툴대며 투정을 토해냈다.
"무슨 닌자도 아니고 잘 보이지도 않아. 다 잘 시간에도 어디에 가서 뭔 짓을 하는지. 침대는 텅 비어있고, 본 사람은 없다고 하고. 대체 무슨 이상한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다니까? 아~ 진짜 수상한 게 무슨 중세 시대 마녀도 아니고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저택 지하에서 이상한 괴물 튀어나와서 서울 멸망시키는 거 아닌지 몰라~"
"흐음. 밤에 사라진다…라."
"밤만 그런 것도 아니야. 낮에도 보이지 않아. 쉬는 시간만 되면 투명 인간처럼 사라지는데…. 어지간한 아싸 찐따도 그 정도로 완벽한 스텔스는 못 할걸? 게다가 얼마 전에 블러디 헬파이어 떡볶이 먹으러 가자고 꼬셨는데도 어디로 사라지고 말이야."
"흐음. 그 떡볶이 때문에 사라진 게 아니겠느냐. 내 기억하기로는 3만 스코빌을 넘는 것으로 기억한다마는."
"에이. 그 정도야 기합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지."
이아린은 '매운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하니까 숨은 것 아니냐.'라는 의견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쌍둥이인데 그 정도 매운맛도 버티지 못할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이아린은 진성에게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고생들은 떡볶이를 주기적으로 섭취하지 않으면 전투력이 떨어진다느니, 여고생 약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떡볶이와 곱창과 단 디저트가 필요하다느니,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는 게 다 매운 음식으로 뜨거운 맛을 맛보지 못해서 그렇다느니….
헛소리에 꼰대 느낌의 말까지 뒤섞인 혼돈 같은 발언들이었다.
진성은 그것을 들으며 허허 웃으며 천천히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제 밖에서 그만 자려는 듯 이아린 역시 돌돌 만 이불을 낀 채 진성의 옆에 서서 계속해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고.
그렇게 진성은 듣는 것만으로 정신이 없어질 것 같은 기관총 같은 이아린의 말을 들으며 무언가를 떠올렸다.
'어디론가 사라진다…라.'
그가 떠올리는 것은 이아린이 방금 언급한 이세린에 대한 것이었다.
이세린.
악마 그레모리의 계약자.
이아린의 쌍둥이 동생, 이세린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초월종과 계약한 계약자였다. 세간에는 '계약자'라고만 알려져 있었고, 어떤 초월종과 계약을 했는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기도 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밝혀진다면 경계를 사고 견제를 받을 것임이 분명한 것이었으니까.
비밀과 보물.
그레모리와 계약해서 행할 수 있는 그 권능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힘이었다.
보물을 찾는 권능은 사람들의 탐욕을 불러일으킬 것이요, 비밀을 찾아내는 권능은 그녀를 경계할 뿐만 아니라 혐오와 공포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이세린은 조용히 지내왔다.
이아린이 '음침하다.'라는 감상을 말할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음침한 이세린의 행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패이자 갑옷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레모리와의 계약과 본래 가지고 있던 천성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초월종.
계약자.
이 둘의 관계는 오직 둘만으로 완결되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이나 친구가 주는 것과는 다른 무한한 사랑과 긍정.
그 힘은 어지간한 종교보다도, 혈연보다도, 이성과의 사랑보다도 강력한 것이었다.
종교로 따지자면 신이 항상 곁에 있는 것이고, 혈연으로 따지자면 영원히 어미의 배 속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계약자는 이 차원이 다른 사랑 속에서 자라나고, 살아간다.
자신을 긍정해주는 초월종에게 마찬가지로 무한한 사랑을 주면서.
그렇게 계약자의 세계관은 좁고 단단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오직 초월종과 자신, 이렇게 자리를 잡은 채 그대로 닫혀버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진성이 회귀 전에 보았던 몇몇 계약자는 정말로 성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미성숙하고 감정적인…아이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단둘만으로 완성될 수 있기에 계약자라는 능력자는 위험했다.
자기 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약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절대로 잘라낼 수 없는 소중한 것은 초월종 단 하나.
나머지는 소중하기는 하지만 잘라낼 수 있고, 대체할 수 있는 것들.
맹목적으로 변해버린 감정은 그들에게서 약점을 없애주었고, 계약자를 사랑하는 초월종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계약자를 한껏 돕는다. 권능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돕고, 소중한 계약자가 다치지 않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한다. 정말 위험할 때는 모든 것을 외면하고 땅속 깊숙한 곳에 만들어놓은 벙커로 숨는 것이라 할지라도, 초월종은 그것을 거리낌 없이 행한다.
초월종이 인간을 귀엽게 여기고 사랑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약자.
가장 중요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계약자의 가족?
중요하다.
계약자의 친구?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계약자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초월종에게 있어서 계약자의 가족이니 친구니 하는 것들은 계약자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
계약자가 그들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초월종들은 계약자를 보살핀다.
다치지 않도록.
깨지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계약자를 보호하고, 보살핀다.
그렇게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며 살아간다.
그 사랑은 맹목적이면서도 절대적이라.
그 폭력적이기까지 한 사랑은 계약자를 물들이고, 계약한 초월종과 닮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이세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은 발굽의 낙타는 비밀과 관련된 권능을 품고 있음이라. 그래. 슬슬 알아챌 때도 되었겠지. 어쩌면 알고는 있었지만 말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고.'
진성은 이세린이 어째서 사라졌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계약자의 안전. 그리고 그 안전을 위해서는 계약자의 무력을 올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
세계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일본과 전쟁을 할 뻔했다.
중국은 대만을 먹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언제 전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대륙은 광기로 물들고 있었고, 호주 역시 눈깔이 돌아간 놈들이 가득했다. 중동은 종교를 가진 이들이 점점 미쳐가고 있었고, 유럽 역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이 감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세린을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그녀가 강력한 무력을 갖게 하는 것뿐이었으리라.
그래.
무력.
강력한….
회귀 전, 단신으로 교토를 초토화했던…그 정도의 강력한 무력.
'비밀이라는 능력은 참으로 쓸모가 있지.'
그레모리의 능력이라면 이세린이 강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비밀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다루는 권능은 정말로 강력한 능력이었으니까.
사람의 약점을 잡고 흔들 수 있으며, 알아서는 안 될 정보를 통해 우위에 서게 할 수 있다.
돈의 흐름이나 비밀스러운 작전을 알아차려서 금전을 벌어들이게 할 수도 있다.
숨겨진 유물이나 금은보화를 발굴할 수도 있고, 비밀스러운 지식에 접근할 수도 있다.
친구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품고 있는 비밀에 접근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한 권능.
그레모리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는 '여자의 사랑이 이루어지게 한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실제로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을 다루는 권능을 이용해 사랑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권능을 통해서 힘을 얻을 수도 있지.'
그리고 이 권능의 또 다른 사용법은 바로 힘을 얻는 것이다.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잘 사용한다면 정말로 강력해질 수 있었다.
너무 위험하다고 여겨져서 봉인한 금기, 전승을 위해 숨겨놓은 비기, 숨겨졌다가 잊혀버린 비급, 금기에 관한 연구 자료 등등….
그레모리의 능력은 이 모든 것에 접근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초월종의 위대한 권능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평생의 운을 다 써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기연을 계약자에게 퍼줄 수 있었다.
'흐음. 힘이라….'
회귀 전의 이세린은 권능의 힘과 그레모리의 도움 덕분에 강력한 힘을 얻었다.
금기에 손을 댄 연금술사와 마법사의 비전을 아낌없이 사용했고,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무기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은밀하게 전해지던 육체 강화 기술을 사용하며 무인이나 다름없는 신체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고, 비밀조직에서 연구한 것으로 추정되는 특수장비를 이용해 동물을 조종하기도 했다. 권능으로 알아낸 군사기밀을 활용하기도 했고, 요원이나 특수부대가 쓸법한 군사 장비를 이양훈의 도움을 얻어서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또래에 비교할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무력.
회귀 전 이세린은 전 세계의 능력자들과 비교해서도 상위권에 들법한 무력을 뽐냈었다.
게다가 진성이 목격한 것이 실제 현장을 본 것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이렇게 강력한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안전합니다!'라고 홍보하기 위해 만든 영상으로 보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귀 전 이세린은 그의 생각보다도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자신의 무력을 숨기는 것은 상식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일본과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무력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이세린은 시간이 뒤틀리기 전처럼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인가?
그때처럼 강한 무력, 수많은 비밀스러운 지식으로 세계에 이름을 각인시키게 될 것인가?
모른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세린이 무력을 가진다면 진성에게 있어선 나쁜 것이 없었다.
그녀가 강해지는 만큼 그녀 본인과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안전해진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거기에 덤으로 대한민국의 치안이 안정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