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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477화 (477/526)

하늘에 수많은 눈처럼 박혀있는 별빛이 흐릿해지고, 눈꺼풀처럼 덮여있던 밤의 장막이 서서히 사라지는 시간이 왔다. 눈이 반개하는 것처럼 빛이 안으로 스며들어와 날을 밝히고, 마침내 눈이 모두 떴을 때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세상에 나타났나니.

마침내 아침이 왔다.

아침의 고요.

고요 속의 활발함.

벌레들이 움직이고, 새들이 날고, 동물들이 눈을 비비며 움직이고, 사람들이 업(業)을 위하여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간.

세상은 평화로웠다.

아무렇지도 않고, 평화로웠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다만 불그스름한 태양의 눈동자가 드리우고, 마침내 빛의 장막이 땅을 휩쓸고 지나갈 때.

어둠이 가려뒀던 모든 것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어둠이 품고 있던 비극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되리라.

* * *

충주의 대로변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다.

출근을 위해 골목길을 걷던 한 행인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행인이 증언하기를 '처음에는 술을 진탕 마시고 골목에서 자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피부가 알록달록한데다가 혀를 길게 뺀 모습이 도저히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처음엔 장난용 인형인 줄 알았을 정도다.'라고 하였다.

실제 CCTV를 확인한 결과, 행인은 이게 질 나쁜 장난이 아닌가 싶어서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무언가가 걸린 것인지 시체를 지나쳐서 몇 발자국 걸었다가 다시 시체 근처로 돌아와서 자세히 관찰한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119에 신고를 하는 것이 찍혔다.

이후 구급차와 경찰이 출동하여 절차를 밟았고….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조사를 위해 잠시 봉쇄.

시체는 병원으로 이동 후 시체검안서가 발급되었다.

아직 부검해보지 않아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시체의 상태를 보아 짐작이 가는 것은 있었다.

온몸에 가득한 멍.

찢긴 피부와 근육.

너덜너덜하게 붙어있는 살점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무기를 말하고 있었다.

채찍.

제대로 맞으면 살점을 뜯어버리는 강력한 위력을 가진 무기.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낸 음속을 돌파하는 그 무기에 당한 사람이, 꼭 이런 상처를 입곤 했다.

경찰은 채찍에 당한 것 같다는 소견을 듣자마자 빠르게 수사를 시작했다.

시체가 발견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충주의 경찰 전체가 눈에 불을 켜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충주의 경찰들이 아무리 어지간한 것을 그냥 넘긴다고 해도, 살인은 명백히 선을 넘은 것.

이것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치안에 대한 도전이다.

경찰은 '감히' 살인을 저지른 무인을 용납할 수 없었고, 용납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지간한 다툼 정도는 그냥 넘기는 아량을 보여주며 배려해줬건만, 돌아오는 것이 살인이라고?

용서할 수 없다.

충주의 경찰들은 다른 일들을 모조리 제쳐두고 살인범을 찾기 위해 힘을 쏟아부었다.

충청도 지역의 다른 경찰들에게 수사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사람들을 잔뜩 동원해서 의심 가는 지역의 CCTV와 블랙박스를 모조리 돌려보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시체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빨리 얻어내기 위해서 경찰청 과학수사대를 쪼아서 현장 감식을 빨리해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아는 법의학자에게 연락해서 부검을 도와줬으면 한다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편(鞭)을 무기로 쓰는 무인들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경공을 쓸 수 있는 무인의 특성상 충주뿐만이 아니라 충주 주변까지 수사를 확대해야 하기는 했지만, 채찍이라는 무기는 비주류에 속했으니 수사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경찰들은 그렇게 낙관했다.

하지만 그러한 낙관도 얼마 가지 않았다.

『 지금 한국에는 편(鞭)을 사용하는 무인들이 없습니다. 』

놀랍게도 대한민국에는 채찍을 무기로 사용하는 무인이 없었다.

검, 창, 활, 월도(月刀)….

수많은 무기를 사용하는 이들이 최소 한둘은 대한민국에 들어와 있었지만, 정말로 놀랍게도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은…경찰을 비웃듯 정말로 단 한 명도 대한민국에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들은, 지금 다른 축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전 세계의 편(鞭)과 관련된 무공을 익히고 있는 무인들은 지금 미국 텍사스에서 열린 FWCF(Fantastic Whip Cracking Festival)에 참가 중입니다. 』

FWCF.

아주 생소한 이름의 축제.

실제로 유명하지도 않고, 전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는 Fantastic Whip Cracking이라는 뭔가 유치해 보이는 이름도, 실은 'Fucking great Whipping Club'이라는 이름의 채찍 동호회들이 모여서 하는 소규모 축제였다가 전 세계의 채찍을 무기로 사용하는 무인들의 관심이 쏠리자 당황하면서 철자에 맞춰서 FWC(Fantastic Whip Cracking)로 바꾸고, 뒤에다가 축제라는 뜻의 Festival을 붙여서 'FWCF'가 되었다는 웃긴 일화마저 존재했다.

하지만 우스운 일화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스운 축제인 것은 아니었다.

전 세계의 채찍 사용자들이 대부분 모이는 축제였으니까.

채찍이라는 무기는 다루기 어려운데다가 약점이 있는 만큼 비주류에 속해있었는데, 이러한 점 때문인지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들끼리는 꽤 끈끈한 유대감이 있는 편이었다. 나름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무기들에 밀려서 영세하게 도장을 운영하거나 제자 한둘만을 받아들이고 수련하는 그들의 처지가 서로에게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게다가 채찍이라는 무기가 가진 역사 역시 채찍을 무기로 사용하는 무인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채찍이라는 도구는 가축을 다루거나 죄인을 벌할 때 쓰는 등의 용도로 많이 쓰이곤 했다. 게다가 갑옷을 입은 상대에게 타격을 주기 힘들다는 이유로 호신용 도구라는 인식이 콱 박히기도 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종교적 이유로 배척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천대는 동서양 어디로 가도 흔하게 보이는 것이었으니…당연하게도 이러한 설움은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들 사이에서의 공감대가 되었고, 그들을 끈끈하게 엮어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유대감 속에서 그들은 한데 뭉치며 교류하기 시작했고, 그 교류의 장으로 선택된 곳 중 하나가 바로 미국 텍사스에서 하는 축제인 FWCF였다.

카우보이들이 채찍을 사용했다는 점을 엮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도 있고, 선진국인 미국에서 열리는 것이니 치안도 좋다. 게다가 미국에서 열리는 축제이니만큼 미국 기업의 후원을 받기도 좋으니 돈에 허덕이지 않아도 되고, 교통편도 좋아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들이 모이기도 좋다. 게다가 무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다른 축제들이 열리기 전에 열리는 것이니 시기상으로도 훌륭하다.

그렇게 FWCF는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들의 축제이자 교류의 장이며, 축제가 열리는 동안 전 세계의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 이 시기에 대한민국에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들이 존재할 리가 있나.

채찍을 사용하는 무인들끼리 친분을 나눌 수 있는 FWCF를 놔두고 아직 축제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있는 충주에 있을 채찍 사용자는 없었다.

『 그럼 이 시체에 남아있는 채찍의 흔적은 뭔데? 』

하지만 그럼 의문이 하나가 생긴다.

시체에 새겨진 흔적은 분명히 채찍이 아닌가?

그럼 누가 그를 채찍으로 패서 죽였단 말인가?

『 충주무공축제에 참가하려고 온 격투가를 채찍으로 죽일 수 있을 정도면 분명히 무공을 익혔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대체 누가 채찍으로 무인을 때려죽인 거냐고. 익숙하지도 않고 다루기도 힘든 채찍으로 무인을 때려잡았다? 그게 되려면 경지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무인이어야 하는데? 그럼 범인은 경지가 높은 무인이거나, 채찍과 관련된 무공을 익힌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 아닌가? 』

채찍과 관련된 무공을 익힌 무인이 아니라면, 경지 높은 무인이 자신이 한 짓을 숨기기 위해서 채찍을 사용해서 그를 죽인 것인가?

하지만 이것 역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긴다.

굳이 채찍으로 죽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라면 더 좋은 방법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비주류에 속하는 데다가 무기를 사용하는 무인들끼리 사이가 끈끈하기까지 한 채찍을 사용해서 죽이는 대신에, 흔히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검이나 창 같은 무기나 둔기를 사용했다면 용의자를 추려내는 것에도 힘을 쏟아야 했을 테니까.

대체 왜.

왜 채찍을 사용한 것인가?

고문을 하기 위해서?

고통을 주기 위해서?

하지만 고통을 주기 위해서라면 날붙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텐데?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의문은, 이어지는 정보 하나에 더 깊어졌다.

『 …흉수는, 무인이 아닌 듯합니다. 』

법의학자와 시체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면밀히 살펴본 무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이 시체에 남아있는 건 채찍의 흔적이 맞기는 하는데, 채찍을 사용한 이는 무인이 아닌 것 같다고.

『 기(氣)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편술(鞭術)의 흔적 역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규칙성도 전혀 없고, 곳곳에 힘 조절을 못 한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라 채찍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인지 미숙한 흔적도 가득하고…. 비유하자면 무공과는 연이 없는 사람이 채찍을 휘둘러서 죽인 듯한 느낌입니다. 』

『 이건 무공을 익힌 사람이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행했다고 하기도 힘듭니다. 이건 의도한다고 해서 행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닙니다. 정말로 운동과는 연이 없는, 운동신경이 최악인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만들 수 없는 흔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

법의학자와 무인들이 말했다.

이건 무공을 익힌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고.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 하지만 이해가 되질 않는 게…. 이 남자는 다른 것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채찍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구속되거나 마비된 채 맞은 것도 아니고, 채찍을 든 상대방과 전투하다가 죽었어요. 무인들이 전투하다가 죽었을 때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거든요. 게다가 몸에서 약물이 하나도 검출되지 않았고, 다른 에너지가 검출되지도 않았고…. 정말로 채찍을 든 상대방과 싸워서 맞아 죽은 건데…. 채찍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사람이 채찍을 무기로 사용해서 무인을 때려죽일 수가 있나…?』

채찍을 든 사람과 싸우다가 죽은 것이 맞다.

무공을 익히지도 않고 채찍을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사람과 혈투 끝에 맞아 죽은 것이…맞다.

참…기이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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