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화〉그로스
지진이 난다면 이럴까?
섬은굉음과 함께 진동했다.
비유가 아니 라, 정말로 흔들렸다.
섬이 무너지 기라도 할 듯 진동이 일었고, 선반 위 에 놓였던 물건들이 바닥
으로 떨어졌다.
얌전히 잠을 자고 있던 이들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진동에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기도 하고,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에 얻어맞아 잠에서 깨기도 했다. 하
지만 일어나는 과정에 어디를 부딪쳤든,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에 부딪혔든
상관없이 그들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허둥지둥 움직 일 뿐이 었다.
지진.
한국인에 게는 생소한 재 앙이 다.
그런 지진이 갑자기 오밤중에 찾아왔으니 어찌 놀라지 않고배길 수 있을
까?
심지어 그냥 지진도 아니고, 사람의 몸을 흔들고 선반 위의 물건을 떨어뜨
릴 정도라면 말이다.
"기상! 지진일 수도 있으니까 머리 조심해! 침대 밑이든 책상 밑이든 들어
가서 머리 보호해-!"
사람이 예상치 못한 재 난을 만난다면 짐승처럼 변하고, 군인이 예상치 못
한 재 앙을 맞이 하면 오합지 졸이 되 어 버 리 곤 한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
독도를 수호하고 있던 경찰들은 위 엄 넘치는 평소와는 다른 오합지졸이
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고, 훈련받은 대로 움직 이 기는커 녕 갑자기 불이 라
도 맞은 짐승처럼 허둥지둥 움직이 기 바빴다.
그 와중에 올바른 지시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지만…안타깝게도 별 효과
는 없었다.
자다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재난에 놀란 이들의 귀에 그 '올바른 지시,가
들어갈 리 가 없었으니 까.
그렇게 경찰들은 모두 공황에 빠져 허둥지둥하며 머리만 숨겼고, 그들이
평온을 되찾은 것은 이어서 찾아오는 진동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였다.
"진동이, 더없는데…?’,
사람을 놀라게 만든 굉음과 진동.
그 진동이 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지진이라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진동이 더 유지되어야하건만.
하다못해 뒤따라서 오는 진동이라도 있어야 하건만.
그들을 놀라게 만든 진동은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그들의 잠만을 깨운 채 ,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이 마치 장난기 많은 요정이 사람을 깨워놓고 혀를 베-내밀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 모양새라, 경찰들은모두 벙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대체 뭐야….’,
황당하다.
그리고, 황망하다.
도저히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멍하니 있어봤자 뭘 할 수 있겠는가?
아까 전 올바른 지시를 내렸던 사람이 일어서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움
직였다.
어쨌든 여기서 멍하니 있는 것보다는움직이는 것이 더 나을 테니까.
지금 상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는 것이 유리할 테니까.
만약 진짜 지 진이 라면 대 피소로 이 동하는 것은 물론, 해 일까지 대 비해 야
할지도 몰랐다.
최악의 상황에는 지진 후 찾아오는 '쓰나미,로 불리는 거대 해일에 싹 쓸
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 다.
그렇게 정보를 찾기 위해 움직인 박정준 경감은…아주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뭐? 초소 반파에 •••그, 뭐 라고?’,
현실을 의심하게 하는 이야기.
"무슨 커다란 배가 독도랑 부딪쳤다고?’,
내가 잠에서 덜 깬 것인가.
혹은 건물이 흔들릴 때 뭔가를 맞아서 기절한 뒤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인가
박정준 경감이 현실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어이가 없는 이야기.
그는 욕과 함께 그게 뭔 개소리 냐면서 무전기에 소리를 치려는 것을 초인
적인 인내심으로참아내었다.그리고 천천히,또박또박, 말에 힘을 실어서 다
시 한번 물었다.
"그.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하나하나 확실하게.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가능하겠나?’,
[ 그게 말입니다. 제가 경 계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배 가 다가오는데, 그 배
가 아무런 신호도 불빛도 없이 다가와서는 그대로 섬에 부딪혔습니다. 일단
일반적인 배는 아니고, 군사 용도의 배로 보이는데 …. 그게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그 초인적인 인내심도 잠시.
무전기 너머에서 '정확히 뭔지는 잘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자그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김이창경장-! 이 씨-발-새-끼-야아아아!!’,
그는 무전기 너머로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가 손에 쥐 고 있는 무전기 가 터져버 리 지 않을까 걱 정 이 될 수준으로 말
이다.
물론 그의 손에 들린 튼튼한군용 무전기는 터지지 않았다.
그와 똑같이 무전 기를 쥐 고 있는 김 이 창 경 장의 귀 가 터 졌을지 언정 말이
다.
"이 씨발-! 너 경계 때 뭐했어-! 뭐? 배가 신호도 없고불빛도 없이 다가
와? 그럼 보고를 올렸어 야지! 경보를 울렸어 야지! 그런 것도 안 하고 뭐 지금
에 와서 유령처럼 다가와서 섬에 처박았다? 그게 말 같은 말이라고 지껄이
는 거냐-! 게다가 무슨 배 인지 몰라? 야 이 새끼야! 너 배 달달 외우지 않았
어?"
박 경감은 마치 랩을 하듯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 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분노가 가득 묻어 있었다.
"게다가 배가꼬라박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이 새끼야! 너는지금초소
에 비치된 병기를들고 꼬라박은 배 경계하고, 지금 상황 나한테 브리핑해야
하는 거야! 너 이 새끼…!"
빠드득.
그는 이가부서질 듯 세게 갈더니 한글자 한글자 강하게 힘을 줘서 말했
다.
"너, 돌아와서 보자…. 그리고. 경계 유지하고, 유사시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해. 그리고 무전 끊지 말고, 실시간으로. 실시간으로 나한테 보고해. 알
겠냐?’,
[예!]
근무 태만을 저질렀을 것이 분명한 초소 인원들의 말을 듣고 어렴풋이나
마 상황을 확인한 박정준 경 감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방송을 눌렀다.
[ 아아, 실제 상황. 실제 상황…. ]
그 내 용인즉슨, 지금 국적 미상의 배 가 독도와 부딪친 후 좌초되 었으니 ,
완전무장을 하라는 지 시 였다.
그는 경찰들에게 그렇게 방송을 전파한 뒤 비상 상황임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설치되 어 있는 신호탄을 쏘는 것은 물론, 누르기만 하면 즉시 근처 군부대
와 경찰청으로 신호가 가는 장비 또한 눌렀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현재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기 위해 통신 장비까지 작동시켰다.
하지 만 아까 흔들렸을 때 망가지 기 라도 한 걸까?
통신 장비가 망가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 인 것은, 통신 장비 만 망가졌을 뿐 다른 것은 모두 멀쩡 하다는
것.
신호탄은 아무런 문제 없이 쏘아 올려졌고, 군부대와 경북경찰청에 신호
역시 성공적으로 보내졌다.
이제 조금 시간이 지나면 군부대와 경찰이 독도로 출동하게 되 리라.
게 다가 통신 장비 가 망가진 것은 큰 문제 도 아니 었다.
보안이 통신 장비에 비해서 허술하다뿐이지, 연락할방법이야 충분히 있
었으니까.
지금 당장 그의 앞에도 그 수단이 있었다.
스마트폰.
현대 문물이 만들어낸 훌륭한 장거리 통신 수단이다.
"후우….’,
그는 한숨을 푹푹 쉬 며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곤 전화번호부에 서 자기 상
관을 선택 한 뒤 통화를 누르려 다가 멈 칫했다.
•••욕을 들어먹을 것이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하지 만 어쩌 겠는가?
욕을 먹든 안 먹든 보고는 해야 한다….
그는 저승길로 가야 하는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따르르르.
이윽고 억겁과도 같이 느리게 시간이 흘렀고, 통화 연결음은 저승으로 연
결하는 소리처 럼 음산하게 그의 귓 가를 간지 럽혔다.
[어.박경감. 이밤중에 전화하네.왜?]
전화를 받은 그의 상관이 한 말은 '여보세요,도 아니고 '통신보안,도 아니
었다.
하다못해 그를 걱정하는 말투도 아니 었다.
그의 말투에는 은은한 짜증과 분노가 묻어 있었고, 그가 한 말에는 '이 밤
중에 감히 상관한테 전화해? 시답잖은 일이면 각오해라.,라는 은은한 협박
이 묻어 있었다.
박정준 경감은 그런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서.
"현재 통신 장비가 고장 나 스마트폰으로 연락드렸습니 다. 현재 독도에 …
’’
•
게다가 더 암담한 사실이 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가 아는 사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초소에서 알려준 정보 덕분에 국정 불명의 군선이 독도에 좌초된 것까지
는 알았지만 그게 어디 국가의 배인지, 무슨 배인지, 무슨 목적으로왔는지조
차 알지 못한다. 게 다가 카메라를 돌려봐도 죄 다 문제라도 생 긴 것인지 노이
즈가 끼거나 까만 화면만 보이고 있는 데다가, 실시간으로 보고하라고 시킨
초소 인원들은 뭐 뒈지기라도 한 건지 꿀 먹은 벙어리다.
게 다가 무전 기 에도 뭔 가 문제 가 생 기 기 라도 한 건지 찌 지 직 거 리는 잡음이
잔뜩 섞여 나오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가 해줄 수 있는 보고는, 정말 단편적인 것이 었다.
아까박 경감에게 뒈지게 욕먹었던 김이창경장의 것과크게 다를것이 없
었다는 이야기다.
[허허허허허.]
당연하게도 그의 상관 역시 갑작스럽게 닥친 재 앙에 혼란에 빠졌다.
[박경감. 미쳤어?]
그는 가장 먼저 자신에게 이딴 것을 보고랍시고 스마트폰으로 걸어서 올
린 박정준 경감이 제정신인지를 의심했고.
[ 내 가 씨발 지금 자다 깨서 꿈을 꾸나? 응? 보통 이런 꿈은 꿈인걸 자각하
면 깨어난다고 하는데 왜 깨지를 않지? 이 개 같은 게 지금 현실이라는 말인
가?]
박정준 경감처럼 현실을 의심하였으며.
[ 이게 현실이라면 어? 씨발, 이러면 안되지. 박 경감, 내가 믿고 있는 당신
이 이러면 안되는 거야! ]
마침내 분노를 터뜨리게 했다.
[ 이딴 걸 지금 보고라고!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도 없는 이딴 걸 보고라고
지금, 스마트폰…. 어, 억! 스마트…후우. 으, 뒷목이 땅기는군. 그래. 통신
장비 가 망가졌다고 했지 ?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보고는 하는데, 감청당할까
봐 지금 핵심 정보는 빼고 말하는 거지? 그래. 그럼 이해가 가지. 우리 박 경
감이 이런 개 같은 걸 보고랍시고 당당하게 올릴 그런 무능한 놈은 아니지! ]
분노를 터뜨리 다가 뒷목을 잡을뻔했던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분노를 가
라앉히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럴싸한 이유,까지
만들어냈다.
그의 아래에서 유능한 모습만 보였던 박정준 경감이 이런 멍청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이게 다 현재 상황이 의심스러워서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납득했다.
아니, 그렇게 납득하려 했다.
[ •••그래. 감청이 의심된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암호를섞어서 말해주게.]
하지 만 어쩌 겠는가?
현실이 이런것을.
"정말, 정말로 이것밖에 보고드릴 것이 없습니다. 지금초소 인원과 연락도
되지 않고 있고, 감시 카메라는 전부 무력화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곤 경찰들을 바라보았다.
.
....
경찰들은 무장하고 창문과 문 쪽으로 이동해 있었지만, 든든하게 무장했
음에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더 당황한 상태 였다. 아니 , 아까는 공황에 빠져
그런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창문이 안보입니다. 이거 해무(海팂)가낀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무가 아닌데 껬 우리 가 해무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 • •. 해무가 이 렇게 새 까맣고 찐득할 리 가 없잖아.’,
"게다가문이랑 창문이 안 열려. 뭐가못 열게 붙잡고 있나?’,
"망가져서 안 열리는 게 아니라….그.누가밖에서 못 열도록붙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시 카메라만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이 아니다.
창문 역시 아무것도 안 보인다.
마치 찐득하고 새까만 액체를 끼 얹기 라도 한 것처럼 창문은 새까만 색 만
을 비추고 있었고, 창문을 가리고 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려고 해도 누군가가 손으로 붙잡고 열리지 않게 안간힘을 쓰고 있기 라도
하는 것처 럼 조금 덜컹 거 리 기 만 할 뿐 틈새조차 만들어 지 지 않았다.
게 다가 기분 탓일까?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
창밖에서 누군가가…창문으로 그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시
선이 느껴진다.
찐득거리는 녹은 설탕이 팔에 달라붙는 것처럼 기분 나쁘고 끈적거리는
시선.
몸 전체를 핥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움직이는 시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의 몸을 쓰다듬기 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쁘
고노골적인 시선.
그런 시선이.
끔찍한시선이 느껴진다.
그 시선 속에서, 박정준 경감은 말했다.
"•••게 다가, 초소 인원을 제외한 전원. 갇힌 것으로 추정됩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