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 식인빌딩
한편, 위로 올라간 이들은 큰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아래로 내려간 무인처럼 보법을 이용하고 몸의 기척을 죽인 채
계 단을 올라가고 있었는데,아래로 내 려 간 무인과는 다르게 계 단이 쭉 이 어
지지도 않았고, 위화감이 들 정도의 음산한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도 않았다.
도리어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또렷하게 현실감이 돌아오는 느낌이었
다.
마치 깨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악몽에서 서서히 벗어나서 현실로 되돌아가
는 듯한 감각이 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또렷한 현실감이 야말로 무인들에 게 위화감을 느
끼게 했다.
[ 이상하지 않나? ]
무인 중 한 명이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다른 무인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그의 입 밖으로 소리는흘러오지 않았고, 대신에 그의 입술만무언
가 말을 하는 것처 럼 달싹거 렸을 뿐이 었다.
전음입밀 (傳音入密).
줄여서 전음(傳音)이라고 불리는, 기를 매개로 소리를 실어 보내는 기술이
었다. 일반적으로 소리를 내는 것과는 다르게 매개로 사용한 기에 접촉해 있
어 야만 소리 가 들리 게 만드는, 무인 전통의 보안 통신이 었다.
분류로는 음공에 속해 있었고,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서 무인들
이 통신기 기보다 더 즐겨 사용하는 기술이 었다. 기의 소모가 많은 데 다가 거
리에 비례해서 그 소모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에 비효율적인 면이 존재
하고, 그나마도 너무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는 통신할수 없기에 암행이나 암
살 같은 임무에서 주로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그래. 이상하군….]
그렇다.
바로 지금 하는, 몰래 잠입하는 임무 같은 상황에서 사용해야 했다.
그게 기본이었고, 상식이었다.
임무에서는 떠들썩하게 굴지 않고, 인기척을 내지 않고, 마치 유령처럼 흔
적을 남기지 않고 들어갔다 나와야 하며, 그것이 여의 찮다면 맹수처럼 목표
물만 잡아챈 뒤 밖으로 빠져 나와야만 한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대체 왜, 1층에서는그런 것조차 잊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군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고 해도,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기이한
일이었다.
전음이 비효율적이고 기의 소모가 많다고?
그렇다면 최소한 통신기기를 이용해야만 했다. 외부에 소리가 새어 나가
지 않도록 방음 처리가 된 마스크를 단단하게 얼굴에 쓴 채, 통신기기로
말해야만 했다.
아니, 백 보 양보해서 방음 처리 마스크를 밀착해서 착용하지 않더라도,
목소리 라도 죽였어 야 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떠들썩하게 떠들었던 것일까?
마치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오랜만에 고향에라도 돌아온 것처럼 왜 그렇
게 떠들었던것일까?
또렷하게 현실감이 돌아오는 지금 생각해본다면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
강제로 마약에 라도 취하게 하지 않는 이상에 야, 그게 말이나 되는 이 야기
냔 말이다.
[ 잠깐만.]
의 혹을 이 어 가던 무인 한 명의 머 릿속에 무언가 스치고 지 나가는 것이 있
었다.
[마약…?]
마약.
약물.
[이런 제기랄.]
무인의 머릿속에 위화감이 들었던 장면들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기이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던 건물의 주변.
왜 감겨있는지 모르는 쇠사슬.
너무나 허술했던 보안 설비.
을씨년스러워 야 하는 풍경 임 에 도 느꼈던 편 안함.
무인은 최악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몸에 기를 끌어올렸다.
암행술(暗行術)을 풀어버리고 기척을 그대로 드러내었고, 계단 중간에 멈
춰선 채 몸에 기를맹렬하게 돌렸다. 기를빠르게 회전시켰고, 양(陽)의 성질
을 띤 기를 순환시켜 온몸을 일주했다. 간과 신장에 기를 불어넣어 활성화를
시켰고, 임의의 통로를 만들어 거기로 독소를 빼낸다는 심상을 떠올렸다.
그것을 몇 차례 반복하자그의 왼손 검지에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검지에 뜨거운 감각이 느껴 지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뜨거운 기운이 느껴 진다는 것은 독기가 그곳으로 이동했다는 것.
즉, 중독당해놓고도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는 말이다.
푸욱.
그는 품속에 서 바늘을 꺼 내 손가락에 꽂아버 렸다.
그러 자 분수처 럼 피 가 튀 었고, 독기 가 섞 인 핏물이 바닥에 뚝뚝 떨 어졌다.
[독이다.]
그는 전음으로 동료에 게 말했다.
[우리는, 중독되어 있었다고.]
상황을 깨달은 다른 무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무인 역시 바로 해독을 위해 내공을 돌렸고, 마찬가지로 손가락 끝에
독기를 집중시킨 뒤 빼냈다. 그리고 품속에서 자그마한 기계에 피를 조금
적셔보았다.
피를조금 묻히면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육체 상태를 알려주는 기계였다.
『육체상태점검결과』
눕 아데노신 삼인산(Adenosine Triphosphate)의 혈중 농도가 떨어져 있
습니다.』
눕 혈액 속의 아미노산농도가높아져 있습니다. 禳
눕 전체적으로 비타민이 부족하며, 피로 물질이 과하게 쌓여있습니다.』
눕 독성 물질은 확인되 지 않았습니 다. 禳
눕 과도하게 피로가 쌓여 있는 상태 이 며 , 충분한 휴식과 영 양 섭취 를 통해
해소할 필요가 있습니 다.』
기계는 담담하게 무인의 육체 상태를 말했다.
피로가 과하게 쌓여 있고, 당장 휴식 이 필요하다고.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 상하지 않은 상황이 라고 말이 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한국에 건너와서 피로는커녕, 놀고먹고 푹 자면서 몸을 철저한 상태로 해
놓았는데….
대체 왜 저런 결과가뜬단 말인가.
과도하게 훈련하지도 않았고, 몸을 혹사하지도 않았다.
단식 이 나 소식을 하기는커 녕, 온갖 맛있는 것을 먹으며 영 양 보충을 다 끝
내놓기까지 했다.
잠?
불면증은커녕, 아주 잘 잤다.
저런 결과가 나와선 안 되는 것이다.
[이건, 부자연스럽군.]
[그래.독이 아니고선 있을수가 없는 일이야.]
즉, 결론은 단 하나로 귀 결된 다.
독에 당했다는 결론으로.
[ 역시 독성 물질은 감별해내지 못하는군. 건강 상태만 나오는 걸 보니 ….
치명적인 독이나, 전통적인 독은 아닌 것 같은데. ]
[ 그것까진 기대도 하지 않았다. 현대의 독은 제대로 잡아내지도 못하는
기계지 않나. 저런 기계 대신 지금몸 상태를확인해보는 게 더 빠르다.]
[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독이 확실하군.]
그들은 계속해서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 피로를 증가시키는 독이라니 ….]
[ 독의 세 계는 넓다. 게 다가 과학의 발전과 함께 독은 점점 발전했어. 피로
를 증가시키고 나른하게 만드는독 정도는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
그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입구와 1층에 깔려있었겠지?]
[ 그래. 아마 내 생 각에는, 그 허술한 보안은 미끼였을 것 같군. ]
[쇠사슬인가?]
[그래. 쇠사슬 안에 독성 물질이 있었고, 자르는 것과함께 공기 중에 노출
되어서 우리를 중독시킨 것 같다. ]
독에 중독되 었다는 결론이 나오자, 그들의 몸에 긴장이 엄습해오기 시작
했다.
손쉽게 망가뜨리고 들어오라는 듯 대놓고 있었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보
안 장치는 부수는 즉시 독성 물질이 살포되는 함정이 었다. 그리고 아무런 낌
새도 느끼지 못하고 중독된 채 들어온 1층 전체에는 마찬가지로 독성 물질
이 살포되 어 있었으리 라.
피로를 가중하는 독.
사람의 인지 능력을 떨어뜨리고, 정신을 나태하게 하는독.
어떤 독인지는 모른다.
생물독인지, 광물독인지, 합성독인지.
그 정체는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알아낼수조차 없다.
그들은 이 임무가별것 아니라고생각했기에 독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사용했던 기계 역시 건강을 판별해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독은
정말 치명적인 것 일부밖에 검출하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방독 장비도, 공기정화 장비도, 독성 물질 검출 장비도.
그 어떠한 장비도 없었다.
그저 믿을 건 기를돌려서 독을 계속해서 배출하는 것뿐.
[최악이군.]
이렇게 교묘하기 짝이 없는 독을 사용하는 사람을 상대하는데, 그냥 내공
을 돌려서 독을 빼내며 상대한다?
제대로 무공을 사용하지도 못한 채, 독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내공
을무의미하게 태우면서 싸운다고?
미친짓이다.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었어. 이 빌어먹을 주술사놈은, 독에 일가견이 있
는 놈이다.]
[맹독술사인가?]
[ 아마도. 독공을 익힌 놈들이 생각날 정도로 음험하고 은밀한 함정이 었다
. 이런 수법을 주술사가쓴다? 맹독술사일 가능성이 크겠지.]
[ 빌어먹을. 열대지방에서나보이는 주술사가조선에는 대체 왜 있는 거야
?]
좋지 않다.
[ 퇴 각해 야 한다. 숙소로 돌아가서 공기 정화 아티 팩 트와 방독면을 가지 고
와야 해.]
.......
독이 가장무서울 때는, 대책이 없을 때였다.
막을 방법도, 해독할 방법도 없을 때 독은 저승사자처럼 다가와 숨통을 조
인다.
그렇기에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퇴각해야만했다.
퇴 각 후 재 정비하고, 방심은 갖다버 린 채 최 선을 다해서 박진성과 싸워 야
만한다.
그래.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올바른 판단을 실행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또각.
또각.
소리가 들린다.
하이힐의 뒷굽으로 돌계단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제기랄.]
그들이 지나쳐왔던 아래에서 들리는소리.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다.
또각.
또각.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하이힐 소리.
또렷하게 울려 퍼 지 는 하이 힐 소리 가 점 차 그들과 가까워 지 고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한 하이힐 소리는 무언으로 그들에게 말하는 것 같
았다.
어서 위로 올라가라고.
나를 피해서 어서 위로 올라가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