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호랑이의 입
저택에 있던 박진성의 짐은 그렇게 건물로 옮겨졌다.
때로는 위험물을 다루듯 조심조심 운반하기도 했고, 때로는 다른 요소를
첨가하기 위해 공정을 거치기도 했으며, 싸구려 물건을 옮기는 것처럼 용달
차에 대충 실려서 가기도 했다.
이렇게 짐이 모두 옮겨지고 난 후, 진성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그 짐을 정리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새로 집을 옮겼음을 기념하며 의식을 행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
을 끌 것을 주의해 건물 안에서 진행했으며,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도록 온갖
방법으로 창문을 막아 어두컴컴하게 만들었다.
"봄의 기운이 만연히 퍼져있을 때, 터전을 옮기고 이곳에서 잠시나마 뿌리
를내리게 되었으니 마땅히 제를올리나이다.부처의 가피와신령의 가호,조
상의 돌보심과 위대한 분의 축복이 이곳에 내리니 그 은덕에 감읍하고
하염없이 감사드리옵니다.’,
건물의 안은 어두컴컴하고 휑했다.
진성이 가지고 온 재료와주물이 정리가 안된 채로 이곳저곳에 널려있어
음산한 분위 기를 자아냈으며, 게다가 그것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건물 안에
널리 퍼져나가며 어지간한 흉가 못지않은 흉흉함을 뽐내고 있었다.
.
!..
.
아마 담이 약한 사람이 라면 헛것을 보거나 그 자리 에서 기절하더 라도 이
상하지 않으리라.
게 다가 텅 비 어버린 공간은 묘한 공허 함과 함께 무서 운 상상을 불러 일 으
키고 있었으며, 의식을 치르기 위해 창문을 막아놓은 덕분에 건물 안은 새까
만 어둠에 잠겨있어 언제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를 자아내고 있었다.
깊은 어둠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괜히 허공에 흔들리며 사람 얼굴 모양이
되는 것 같기도 했고, 막아놓은 창문에서 새어 나온 빛에 의지한 채 어둠을
바라보고 있자면 노이즈처럼 지직거리며 다른 세계로 이동할 것 같은 느낌
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음산한 어둠의 중심부에서, 진성은 향불을 피워놓은 채 축원(祝
願)을 읊고 있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축복과 가피로 한 몸 건사할 수 있었으며, 가
호와 수호로 큰 문제 없이 멀쩡히 몸뚱이를 건사하여 집을 마련할 수 있었나
이다.그 한없이 커다란 은혜에 지극히 감사하며, 지금 이곳에서 축원을 읊노
니.’,
자그마한 불꽃은 하얀 연기를 그려내며 어둠 속에 떠 있었다.
향의 기둥은 어둠 속에 제 몸을 파묻고 숨었고, 그 위에서 빨간 불꽃이 어
둠 속에 떠다니는 반딧불이처럼 하늘거리며 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떠 있
는 반딧불이는 한숨을 토해내듯 방 안을 향냄새로 가득 메웠고, 꼬리를 그리
며 허공을 유영하듯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람이 한 점 불지 않는 건물임에도 향불은 왼쪽으로 기울었다 오른쪽으
로 기 울기를 반복했으며,이 리저리 꼬이 다가 직 선으로 올라가는 등 실제 반
딧불이 가 춤을 추는 것처 럼 기 묘한 움직 임 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접시에 정갈히 담겨 있는 물건들이 있었다.
코를 찌르는 냄 새 를 풍겨 내 는 독한 술이 담긴 잔 하나.
비어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엄청나게 깨끗하고 투명한 물이 담겨 있는 그
릇.
말라비틀어진 버드나무의 가지 하나.
마늘의 냄새를 잔뜩 풍기고 있는 채소.
밀 가루를 대충 뭉쳐서 구운 듯한 못생 긴 빵 한 덩 이 .
하나같이 볼품없는 물건들이 었다.
"이곳에서 하는 모든 일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주소서.
거센 기운이 휘몰아치며 솟구치듯복이 솟구쳐 오르기를 바라며, 땅에 나무
가뿌리를 내려 번성하듯주인이 번성케 하소서. 화려하게 꽃이 만개하여 향
을 퍼뜨리듯 공덕이 온 세상에 퍼질 수 있게 하옵시고, 향을 맡고 나비가 날
아들게 하여 꽃이 열매를 맺게 하소서.하여 열매가 영글어 달콤한과실이 될
수 있게 하옵시고, 씨앗이 떨어지고 퍼져 온 세상을 생명으로 채우듯 하듯
온 세상에 세를 넓힐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진성은 그 물건들의 앞에서 축원을 읊고 있었다.
"건물에 화평이 가득하사모든 것이 평온하고 안온케 하소서.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은 보호받고 복을 구하여 나갈수 있게 하옵시고, 손에 지혜에서
비롯된 지침을쥐게 하사 앞날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악한마음을 지닌 이들
은 마땅히 대가를 치르게 하사 평화를 깨뜨릴 수 없게 하옵시고, 찬란한 빛이
내 리 사 심 판으로 그 죗값을 마땅히 치르게 하소서."
그 축원은 엄숙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음산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것이었
다.
내용 또한 정상적 인 축원과는 조금 달랐다.
보통의 축원은 '좋은 일 가득하게 해주고 평화롭게 해주세요.,라는 내용
이 주가 되는 것인데, 지금 진성이 하는 것은 기복(祈福)을 위한 내용이라기
에는 위화감이 드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었다.
"가볍고 훌륭한 것은 위 로 나아가게 하소서 . 무겁고 나쁜 것은 아래로 떨
어지게 하소서.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그리하게 하소서.빛이 창공의 위에
서 유구한 역사와 함께하며 세월을 보내듯, 어둠이 지저 속에서 꿈틀대며 세
를 불려 피어나듯 그리하게 하소서. 하여 훌륭한 것은 위로 떠 올라 구름 위
에 마땅히 왕국을 세우듯 반듯하고, 영세토록 견고한 성곽을 짓게 하옵시고,
그것이 한낱 무지개처럼 표홀하지 않도록 그것을 지탱하여 주옵소서. 그리
하면 찬란한빛이 내리사 건물 안에 마땅히 그 찬란함이 내려 모두의 앞날이
그 빛처럼 밝게 만들 것입니다.’,
진성은 손을 뻗어 빵을 집고 반으로 뚝 잘랐다.
그리곤 잘린 빵 조각 하나를 향불에 가져다 댔다.
화르륵.
그러자 빵은 기름을 먹이기라도 한듯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타오른 빵은 재조차 남기지 않은 채 순식 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오직 향긋
하고 고소한 냄 새 만을 남긴 채 그대 로 사라져 버 렸다.
"이르기를 삿되고 악한 것들은 춥고 뜨거운 곳에 있어야 하느니. 어둠이
내 려 앉고 땅에 스며들어 그곳에 서 세를 불리 고, 뭉치고 흩어지 기를 반복하
며 빛이 부재할 때 피어나 덮는 것처럼 그리하게 하소서. 다만 빛에 두려워
땅속에서 언제까지 머물게 하옵시고, 빛의 위엄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죽
음이 창궐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빛이 머무는 곳에 무궁한평화가
자리 잡게 하소서.’,
진성은 손을 뻗어 남은 빵 조각을 집 었다.
그리곤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빵 조각을 바닥에 떨구고, 그것을
사정없이 짓밟고 짓이겼다.
그러자빵은 철벅거리며 땅에 붙게 되었고,진성은그것의 위에 침을퉤 뱉
었다.
침 이 묻은 빵은 그대 로 녹아내 렸다.
진성의 침이 산(酸)이라도되는 것처럼 형체조차 잃어버린 채 끈적이는 액
체가 되었고, 그 액체는 건물의 바닥이 흙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서히 스며들
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액체는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끈적임도,특유의 색도남기지 않은채 그대로 바닥에 흡수되었다.
하지 만 자신이 존재했음을 알리는 것처럼 까만 자국을 남겼는데 , 그 모습
이 마치 곰팡이 가 피운 것 같았다.
곰팡이는 원을 중심으로 여섯 갈래로 갈라지며 모양을 만들었는데, 그 형
상이 마치 꽃과 같았다.
"만세에 연꽃의 향이 퍼져 모두를 이롭게 만들듯그리하게 하소서. 건물
에서 피어나는 향이 복이 되어 모두에게 퍼져나가게 하옵시고, 그것이 꽃의
향이 되게 하소서.흐드러지게 피어난꽃이 그향기를천 리 밖까지 퍼뜨리듯
만들어 주옵시고, 그 향에 이끌려 오는 모든 것이 양분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날개를 가진 것들이 이로운 것이라면 마땅히 빛을 받아 자라나게 하옵시고,
그리하지 않으면 날개를 무겁게 만들어 땅에 박아 어둠속에 파묻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뚝솟아난 건물이 나무처럼 자라나푸르게 물들게 하소서.햇살
에 살아나는 싱그러움을 품게 하소서.’,
진성은 그렇게 말하곤 잠시 입을 닫았다.
그리곤 타들어 가고 있는 향을 그대로 뽑아 상위에 올려진 물건들을 태웠
다.
화르륵.
볼품없는 가지 가 타올랐다.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채소 역시 타올랐다.
술 역시 불꽃을 피우며 타들어 갔다.
불이 붙지 않은 것은 오직 정화수 하나였다.
진성은 향을 천천히 정화수에 가져다 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주술의 업을 짊어지고 걷는 자, 나 박진성이 뒤틀린 시간속에서 기원하며
의식을 마무리하니, 마땅히 이 축원은 힘을 가지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는 향을 그대 로 정화수 안에 집 어 넣었고, 그러 자 향불은 순식 간에 꺼 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깨끗했던 정화수는 그대로 오염되기 시작했고, 거
뭇한 재 가 가라앉고 물이 탁해 지 며 아까 전 품었던 순수가 사라져버 렸다.
진성은 오히 려 그것이 기 껍 다는 듯 향을 휘 저 어 정화수를 더 더 럽혔고, 그
것이 어느 정도 더럽혀지자 그것을 그대로 뒤집어엎어 버렸다.
촤아악.
그러자 오염된 정화수가 바닥에 흘렀고, 그 정화수는 섬찟한 기운을 가득
품으며 검게 변했다. 그러더니 아까 빵이 녹아서 사라졌듯 바닥에 녹아들며
그대 로 사라져 버 렸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다시 건물은 어둠에 감싸였다.
조금이나마 어둠을 밝혀주던 향불은 그대로 꺼져버렸고, 창문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미 약한 빛 역시 밖에 구름이 라도 낀 듯 확 줄어버 렸다.
그리고 그 어둠의 중심에서, 진성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눈은 불꽃을 머금은 것처럼 꿈틀거렸고,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것처럼
빛을 발했으며, 벌레 가 꿈틀대며 허공을 유영하듯 이리저리 움직 였다.
진성은눈에 빛을 품은채 천천히 움직여 짐 하나를풀었고, 거기서 식칼 여
럿을 꺼냈다.
그 식칼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녹이 잔뜩 슬어 있었고, 날이 무뎌져 있었고, 부러져 있었으며, 휘어지고 뒤
틀려서 도저히 쓸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 었다.
진성은 허공을 쥐어서 그 식칼을 공중에 띄운 뒤, 그것을 동시에 바닥에
떨어뜨렸다.
파악!
그 결과는 놀라웠다.
모든 식칼이 꼿꼿하게 선 것이다.
진성은 그것을 보며 만족스럽 다는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