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예언자윌리엄
윌리엄은 뻔뻔하게도 진성에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멋대로 착각하고 맥주병을 던진 것에 대한 언급이나 미안함은 전
혀 없이, 그저 진성이 빨리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진
성에게 책임소재를모조리 미뤄버린 것이다.
태도가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보였다.
"뭐,됐어.주술사라는족속들이 원래 굼뜬 건 알고 있으니까내가 이해해
줘야지.’,
게다가 그나마도 진성에게 거는 말조차 아니었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고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는, 대화라기보다는
그저 독백 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그는 진성이 잘못했다고 머릿속으로 결정지어놓고 제멋대로 용서했고,
곧 사위가될 남자를 용서해주는 자비로운 자신에 취해 있을뿐이었다.
윌리엄은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자리에 앉았고, 아
그네스에게 어서 자신의 옆으로 오라는 듯 거만하게 손짓했다.
그 모습을 본 아그네스는 열심히 표정 관리하며 웃었고, 윌리엄과 멀리 떨
어진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엘라의 팔을 끌어 자신의 옆에 앉히고, 엘라의
옆자리에 진성을 앉혔다.
그 모습을 바라본 윌 리 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대체 뭘 생각했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가게의 직원 한 명에게 이리 오
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하인이 라도 부리듯 말했다.
"야. 테이블하나랑의자저기 놔라.’,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 키는 곳은 진성 일행 이 모여 있는 곳이 었다.
당연하게도 직원은 '이 미친놈이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라는 마땅
한 의 문을 떠 올리 기는 했지 만, 조금 전 '사위 '라고 부르는 인간에 게 맥주병
을 집어던진 찬란하게 빛나는 윌리엄의 인성을 보았기 때문에 군말 없이 움
직였다.
그는 힘을 써서 테이블을 옮겨놓고, 남아도는 접이식 의자하나를 테이블
앞에 가져갔다.
"하. 이 멍청한 새끼 봐라?"
빠악!
그것을 본 윌 리 엄 은 어 이 가 없다는 듯 웃더 니 직 원의 뒤 통수를 후려 쳤다.
그리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직원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 이 새 끼야! 내가 저딴 엿 같은 데 에 앉아야 하겠어?! 내 가 의 자를 갖다 놓
으라고 했으면 거지들이 나 앉을법한 저 런 거 말고, 소파 같은 거 갖다 놓아야
할 거 아냐!’,
직원은 윌리엄의 폭언에 순간 욱했지만, 이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직원은 살면서 처음 만난끔찍하기 짝이 없는 진상에게 책을 잡히지 않기
위 해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소파를 움직 였고, 그에 게 고개를 숙인 뒤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천천히 움직여 그들의 시야 밖으로 움직
여 가게 뒤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간 직원은 한 외국인 남성에게 붙잡혔다.
"뭐, 뭡니까?’,
가게 뒤편에서 갑자기 험상궂은 근육질 남자에게 붙잡힌 직원은 당황했
다.
하지만 남자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점원에게 제스처를 보이고는, 품 안에
서 봉투하나를꺼내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사과의 의미로드리는 겁니다.부담 없이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꽤 두툼한봉투를 점원의 손에 들려준 남자는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점
원 이 빠져 나온 문으로 들어 가 버 렸다.
남자가 사라지자 점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봉투를 열어보았
고,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지폐를 보고 놀랄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못해도 수백만 원은 될 것 같은 지폐.
점원은 그것을 보고 어이 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 었다.
"역대급 진상에 돈다발로 뒤처리라니 ….’,
그는 남자가 준 '사과,를 그대로 품속으로 집 어넣었다.
딱히 돈이 탐이 나서는 아니었다.
그도 돈은 어느 정도 있었으니까.
그가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은 이유는 이것이 그가 자존심을 굽히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상대측에서 자존심을 굽히면서 준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저 미친 진상 새끼한테 걸려서 소모한 정신력을 이렇게라도 보상받지 않으면
밤에 열받아서 잠도 못 잘 것 같았기 때문이 었다.
그리고….
지금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이 그 혼자라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가게를 비우고 도망을 갈수는 없으니 저기로 다시 들어가야 할 텐데, 그
렇다면 저 진상을 다시 마주하고 상대해야 했다.
그것을 생각하자면…. 특별수당이라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수지에 맞
지 않았다.
점원은 들어가기 싫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 었고, 끈끈이라도 붙은 것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들어 가자 그를 막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었다.
제각기 다른 인종으로 이루어진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자연스럽게 점원
을 막아 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께서 이 가게를 12시간 동안 빌리기로 하셨습니다. 돈은 가게의
주인께 건네주기로 했고, 그 시간 동안, 이 가게는 문을 닫고 안에 계시는
분들은 우리 가 담당하기 로 했습니 다. 그러 니 가셔 도 좋습니 다.’,
점원은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디자이너에게 연락했
다.
그리고….
[ 그래, 맞단다. 무슨 12시간 동안 가게 빌리는 거로 엄청난 돈을 주지
뭐니? 그냥 전시용 작품이랑 원단만 있는 곳을 이용하는 거로 엄청난 돈을
안겨주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니? ]
디자이너는 점원의 의문에 당당하게 말했다.
돈을 많이 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 게다가 마침 잘됐어. 오늘 아라가 질 좋은 실을 뽑아내고 있지 뭐니. 손님
때문에 바로손을못 대는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잘됐지.그러니 너도큰 걱
정은 하지 말고 돌아가서 좀 쉬 려무나. ]
점원은 디자이너의 말에 어이가 없는표정을지었다.
아무리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옷을 만들어달라고 빌어도, '급,이 되
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 옷을 만들어 줄 수 없다며 매몰차게 거절하던 평소
의 디자이 너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었다.
그런 점원의 의문을 알아챈 것일까?
디자이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얘,가게 12시간 빌려주면 내가원하던그 모델이랑도연결해준다는
데 어쩌겠니? ]
그는 그제야이해할수 있었다.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화를 종료했고, 장승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되도록 깨끗하게 사용해달라는 말만을 남겨놓고
그대로 가게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렇게 가게는 12시간한정 윌리엄의 공간이자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되었다.
"야, 저거 문 닫고 커튼도 쳐.’,
윌리엄은 가게를 사들이자 이제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거침없이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
철컥.
남자들은 윌 리 엄의 명 령을 듣자마자 기 다렸다는 듯 움직 여 문과 창문을
닫아버렸고, 도청을 막기 위해서인지 기계를 설치해 역장을 만들었다. 그
리곤 모든 창문의 커튼을 치고 조명을 환하게 밝혔다.
그렇게 쇼윈도와 정문만을 제외하고 모든 구역에 커튼이 쳐졌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것만으로는 만족을 못 하는 모양인지 유리로 된 정문
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저것도 가려.’,
"어떤 색으로 가릴까요?"
"흠, 잠깐만….’,
그는 경호원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는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베이지색으로.’,
"알겠습니다.’,
경호원은 답이 떨 어 지 자마자 원 단을 쌓아놓은 곳으로 가서 베 이 지 색 원
단을 집었다. 그리고는 베이지색 원단을 질질 끌면서 문 앞으로 이동했고,
계산대에 꽂혀있는 볼펜들 몇 개를 집 었다.
그리고는 펜을 송곳으로 삼아 원단을 천장에 박았다.
그렇게 훌륭한 커튼이 완성되 었고, 정문마저 가려졌다.
개방감 넘쳤던 의상실이 숨이 턱턱 막히는 훌륭한 밀실로 변화한 것이다!
"음, 좋아. 아주 마음에들어.’,
윌 리 엄은 변화한 모습을 보며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 이야기를나누는데 이 정도분위기는있어야지.’,
그는 자신의 센스를 칭 찬하며 소파에 그대로 기대 앉았고, 소파의 팔걸이
부분에 턱을 괴고는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어때, 네스. 너도 마음에들지?’,
"그렇게 보이나요?"
"싫어? 그래도 소용없어. 이게 내 취향인걸.’,
아그네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었지만, 윌리엄
은 심드렁한 태도로 대꾸했다.
아니, 되려 아그네스를 꾸짖기까지 했다.
"연인이 되면 맞출 일이 많을 텐데 말이야. 명심해두라고. 나는 남에게 맞
춰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내 취 향은 확고하다고. 알겠어 ?’,
그는 그렇게 말했다가 아그네스가 불쾌한 표정을 짓자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뭐, 네스라면 어느 정도는…. 맞춰줄생각이 있지. 다른 여자도 아니고,
네스니까 말이야."
"윌 리 엄 R. 아르투아.’,
아그네스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듯 그의 풀네임을 불렀다.
그리고는 경고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
다. 하나, 멋대로 제 애칭을 부르지 마세요. 둘, 저한테 말도 걸지 말고 접근도
하지 마세요. 셋, 엘라에게도 접근하지 마세요."
"튕기기는.’,
하지만 윌리엄은 아그네스의 분노 섞인 경고를 그대로 무시해버렸다.
그는 아그네스의 반응을 그냥 튕 기는 것으로 치부하고는 귓등으로 넘겨
버 렸고, 능글맞게 아그네 스를 보며 웃을 뿐이 었다.
아그네 스는 그런 윌 리 엄의 모습에 점 점 짜증을 숨기 기 가 어 려운 것인지 ,
명백히 화가 난 듯한 말투가 되 었다.
"그래서, 고작 저 꼬셔보겠다고 이 난리를 친 건가요? 무슨 용건이 있었다
면서요?’,
"오, 그렇지.용건이 있기는했어.’,
윌리 엄은 아그네스의 말에 반색했다가 다시 능글맞게 웃으며 느끼한 멘
트를 던졌다.
"물론우리 귀 여운네스가 용건이 있어 야만만난다는이 야기는아니 지 만
말이야.’,
"•••좀 닥쳐주실래요?’,
결국 아그네스는 욕을 내뱉고야 말았다.
하지만 윌리엄은 아그네스의 그런 모습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
다가, 아그네스가 진짜로 화를 내려고 하자 가방에서 잘 제본된 책 한권을
툭던졌다.
질 좋은 종이로 만든 커다란 책.
마치 어린아이가 읽는동화책 같았다.
"내가미래를봤거든.’,
"그런가요?’,
아그네스는 밋밋한 동화책의 표지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제 발 그 미 래 가 당신이 죽는 미 래 였으면 좋겠네 요.’,
그러자 윌리엄은 과장된 몸짓을 하며 말했다.
"오, 놀랍게도 그 반대야. 나는 살기 위해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