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채밀
그가 축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난장판이 되 어 있는 모습이 었
다.
한때 동물이 꽉꽉들어차 있던 케이지는 전부 텅 비어 있었으며, 그것으로
모자라서 이곳저곳이 부서진 채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게다가 피 묻은 구두를 신고 이곳저곳에 돌아다닌 모양인지 끈적이는 검
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으며, 환기 장치 역시 조사과정에서 고장이
난것인지 곳곳에 곰팡이가피어 있었다.
곰팡이들이 빼곡하게 벽면을 따라 자리를 잡았으며, 짐승들이 가득 들
어차 있었음에도 항상 깔끔했던 공기는 온데 간데 없이 퀴퀴 한 냄새 만을 풍
기고 있었다. 그것이 어찌나심한지 숨을 슬쩍 들이쉬면 폐까지 곰팡이가들
어와 자리를 잡으려 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끔찍하군. 끔찍해."
미치시게는 악몽처럼 변해버린 축사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비척비척 몸을 흔들어가며 천천히 축사의 중앙으로 향했다.
덜그렁.
가는 길목에 굴러다니는 케이지에 부딪히거나, 부서진 창살을 밟아 미끄
러질 뻔하기도 하였으나 미치시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멍한 눈으로 제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제단.
어둠의 신 휘로의 제단.
지하세 계를 지배하는 끔찍한 악의 신, 휘로에 게 제물을 바치 던 그곳을
향해 그는 걷고 또 걸었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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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직 제 단만을 바라보았다.
기자들과 음양사, 경찰들이 온갖 방법으로 뜯어서 이제는 그 흔적만이 남
은 제단을 향해 걸었으며, 그 제 단만을 눈에 담은 채 몸에 어떤 장애물이
부딪치고 어떤 상처를 입히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제단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다리의 힘이 풀려버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곤 휘로의 제단이 있었던 그 자리를 쓰다듬었다.
"젠장….’,
그는 혼이 라도 빠진 듯한 눈빛으로 중얼거 렸다.
"그동안 먹인 게 얼만데 …이런 상황 하나 해결을 못 해줘 …?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놈 같으니 ….’,
그 말은 신에게 하는 말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불경한 것이었다.
하지만그게 어떻단 말인가.
그는 믿고 있어서 제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단지 필요 때문에 제단을 만
들어서 사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둠의 신?
지하세계의 지배자?
악의 우두머리?
온갖 질병과 의 인화된 질병을 부리는 존재 ?
그런 수많은 서사도,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기록도 미치시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흐흐흐. 빌어먹을 미개한토인 놈들의 잡신 같으니 ….’,
그에게는 신앙이 없었으니까.
최소한의 신앙도, 공포도, 경외도.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까.
"내가 제단도 만들어줘 , 손수 피로 덧칠도 해줘, 동물 제물도 꼬박꼬박 바
치고! 빌어먹을 잡신 놈! 네놈도 명색이 신이라면 힘을 발휘해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갈수 있게 하란 말이다!’,
그는 신에게 보일 최소한의 예도 보이지 않고 무례한 태도로 그대로 고개
를 들어 그림 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뭐야 저건?’,
그림 대신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묘한 목상 하나를 보았다.
"이건 또뭐하자는 거야….’,
본래는휘로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야만했다.
피로 여러 번 덧칠해서 신이라기보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괴물, 혹은 지
옥의 가장 밑바닥에나 존재할 법한 끔찍한 존재 같은 모습을 한 그림이.
하지만 그 대신에 놓여 있는 것은 거무튀튀 한 나무로 만든 목상이 었다.
목상의 형상은 기묘했다.
얼굴이 두 개가 달린 남자가 용의 머리를 깔고 앉은 모습이 었는데, 얼굴
하나에서는 열기가 느껴 지는 듯했고 또 다른 얼굴에 서는 시원한 바람이 흘
러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거무튀튀한표면 때문인지 유적에서 발굴한 것 같
은 느낌을 주었으며, 왠지 모르게 목상 자체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묘함은 바닥에 깔린 용의 머리통에서 극대화가 되 었다.
보통 뱀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는 용의 머리는 온갖동물의 형상을
섞어놓기라도 한 것인지 균형이 다뭉개져서 기괴하게 보였으며, 각도에 따
라서는 그것이 사람의 얼굴과 흡사하다고 생 각할 정도였다.
그 얼굴을 빤히 보고 있자면 이리저리 일렁이면서 여러 형태로조립되었다
가 부서지 기를 반복하는 착시 현상까지 일어나는 듯했다.
게다가 입에는 여의주라도 되는 것처럼 무언가를 물고 있었는데, 그것은
목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지극히 현대적인 무언가였다.
"워, 크맨?’,
2000년대까지 크게 유행했던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
이 제 는 고물상이 나 수집 가를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구시 대 의 유물.
워크맨이 거기에 물려 있었다.
미치시 게는 홀린 듯 손을 뻗어 워크맨을 집 어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달칵.
그러자 빡빡한 버튼이 눌리면서 자그마한 소음과 함께 테이프가 돌아가
기 시작했고, 이내 커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치지직-
치직-
스피커가 포함된 워크맨.
큰 호응을 얻지 못해서 소량만 풀리고, 그대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버린 모델의 워크맨은 늦게나마 세상에 나와서 자기 능력을 뽐내는 것이 즐
겁 다는 듯 한껏 소리를 뿜어내 었고, 치 직 거 리는 약간의 잡음과 함께 자신이
품고 있는 테 이프의 소리를 재생했다.
삐이이이—
삐이-!
두둥펹
둥-
삐이이이——
이 것을 뭐 라고 해 야 할까?
전통음악?
소음에 가까운 무언가?
치 직 거리는 노이 즈와 섞 여서 절로 눈살을 찌푸리 게 하면서도, 고음과 왠
지 북소리 비슷한소리가 어우러지며 음악의 형상을 간신히 유지하는 듯한
느낌의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점차 소리 가 더해지 며 거대하게 변했고, 손에 들린
워크맨은 소리에 이기지 못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덜덜 떨렸다.
둥-
두둥-
두두두두두둥-
삐이이이이—
휘이이이이-
바람을 닮은 소리 가 났고.
가죽을 있는 힘껏 치는 소리가 났으며.
나무를 부딪칠 때 나는 소리, 뼈에 구멍을 내서 만든 피리를 부는 소리, 원
시적인 현악기를 연주하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어우러지며 음악의 형태를 만들고.
눕 물의 풍요로움을 가진 자, 매로우의 주인, 불을 뿜고 바람을 내어 폭풍
을 만드는 위 대 한 주신 ! 괴 물을 낳는 사악한 용을 무찌른 위 대 한 존재 시 여 !
禳
그 음악 사이 로 거 대 한 외 침 이 튀 어 나왔다.
일본인 성 악가를 고용해서 녹음한 듯한, 어 마어 마하게 거 대하고 웅장한
목소리의 일본어가 말이다.
!.
.........
『 모든 운명의 주관자! 모든 신을 지배하고 그 위 에 선 자! 폭풍을 부르는
위대한 자! 마땅히 권능으로 심판하고 재판하는 위 치에 서 계시 며, 신묘한
힘 으로 마법을 부려 온 세 상을 부리 는 위 대 한 존재 시 여 !』
『두개의 얼굴!대체할수없는하나의 위치!태양의 아들,바빌론에 우뚝
선으뜸!』
눕 벨 마르두크시 여! 벨 마르두크시 여! 禳
눕 찬란한 태양과 잔잔한폭풍, 풍요로운 곡식의 위에서 찬양하노니 ! 禳
눕 만물을 꿰뚫어 보는 위대한 시야로, 마땅히 정해진 법과 규칙으로 우리
를 가호하소서!』
눕 위와 아래를 뒤 바꾸고 모든 것이 마르두크의 아래 에서 평등하다는 것
을 알려주소서!』
"어…?!"
미치시게는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뭐야.’,
그는 주술 의식을 그대로 재생하고 있는 워크맨을 저 멀리 집어던지고,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가. 뭔가 이상하다.’,
무인으로살아왔던 그의 인생이, 수련으로 다져지며 쌓아올려진 그의 경
지가.
그가 살아오며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이 말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이 상황은 이상하다고.
당장 빠져 나가야 한다고!
눕 로우스(Lous)의 열여섯 번째가되어 사크에아(Sacaea)가 열리니. 禳
눕 압칼 일라니 벨 테레티(ab-kal ilani bel ter6ti)의 이름으로 모든 왕에
게 이르기를, 왕의 옷을 벗고 가장 하찮은 곳으로 떨어져 그들의 고됨을 체
험해야할것이며!』
눕 벨 벨림(beibeiim)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이르기를종과주인이 그위치
가 바뀌어 종이 주인을 부리고 주인이 종을 위하여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아
야 할 것이라 하였느니라!』
눕 무발리트 미테(muballit mite)의 이름으로 말하기를 가장 끔찍한 죄를
지은 자는 죽음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禳
눕 이르기를 가장 하찮은 존재요, 가장 쓸모가 없는 존재 라. 禳
『 쉬는숨이 아깝고, 입에 들어가는곡식 한 알이 아까우며, 머무를공간이
아깝고 그 발이 대 지 에 돌아다니 는 것조차도 아까운 존재 이 니 .』
『그리하여 말한다.』
눕 아클루 벨 테리에티(aklub61 terieti)의 신탁으로, 위대한 지혜이며 현
명한신의 언어로 말한다.』
『 가장끔찍한죄를 지은 사형수를 끌어 왕의 자리에 앉혀라. 왕의 옷을 입
히고 왕의 지위를 부여하며 왕의 권능을 그대로 주어라. 禳
눕 그것을 다섯의 해가뜨고 지는 때까지 계속하도록 하라. 禳
눕 그리하면 총애가땅에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영글 것이며. 禳
눕 삿된 것이 감히 범접치 못하게 막아줄 것이며, 폭풍조차 잔잔한 바람으
로 바뀔것이니.』
눕 마땅히 너희는 사크에아(Sacaea) 축제를 즐기도록 해야 할 것이니라! 禳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온 힘을 다해 외치는 본능의 경고.
그리고 저 멀리에 집어던져진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음성들.
그 모든 것이 미치시게로 하여금 이 장소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문이 없지…?’,
그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도축 당하는 동물이 탈출할 수 없듯이.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이 제단에서 벗어날수 없듯이.
나갈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