볽 121화 > 사람의 그물을 만들어
"조언, 조언이라. 그래. 말잘 꺼 냈군.’,
빅토르는 진성의 말을 듣고 물었다.
"네놈은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지? 조언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 네놈이 실력이 있는 주술사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
은 아니 다. 하지 만 말이 야. 말 몇 마디 듣는다고 뭔 가 획 기 적으로 바뀌 는 게
있냐, 이 말이야.’,
그물음에는 약간의 기대감,그리고 약간의 꺼림칙함이 묻어 있었다.
진성은그꺼림칙함이 '군인으로서의 자신,과 ,대통령이 되고싶은 자신,의
충돌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아차렸고, 동시에 모든 권력자가 가지고 있는 권
력 욕구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우뚝 서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임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진성은 말했다.
"조언, 조언이라. 별것 아니네. 자네도무언가두 가지 길 중에 고민이 된다
면 친구에게 묻지 않는가? 예를 들자면 오늘 점심에는 뭘 먹을까, 차를 사려
고하는데 둘중어떤 것을 사려고 할까 하는 그런 사소한 질문들 말일세.’,
"사소한 질문이라?’,
"그러하네. 점술이라는 것은 별것이 아닐세.운명이라는 것이 불변하지 않
고 가변적인 성질을 가지니 만큼, 점술이 라는 것은 멀리 보는 것일수록 그 정
확성이 떨어지고 가까운 것일수록 그 정확성이 늘어나지. 그렇기에 멀리 있
는 것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야말로 점술사의 실력이라고들 하지. 여기까지
는자네도 알겠지?’,
"흠.’,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그 얼굴에는 약간의 불편함이 묻어 있는 것이, 그가원래 알고 있는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멀리 정확하게 보는 이를우리는 예언자라고하Ml.바꿀수 있되 바꾸려
하지 않으면 그 미래는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니, 이것은그야말로관측이 곧
현실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관측을 하였으니 바꿀 수 있는 것 역시
진리이니, 우리 인간은 그렇게 수많은 멸망의 위기를 비껴갔음이라!’,
진성은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대관절 점술과 예 언의 차이 가 무엇인가. 정확성 이 문제 라면 어
찌 예 언은 관측한 것을 바꾸었단 말인가? 관측한 것을 바꾼 순간 그 예 언은
달라진 것이니 그 정확성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점술이 멀리 있는 것을
목격한다고 한들 그것이 달라진 형태로 찾아왔다면,직접 개 입하여 다른 미
래를 가져온 예언과 무엇이 다를까?’,
"어렵군.’,
"그러하네. 어렵지. 이것이 바로 점술사들이 고뇌하는 내용 중 하나이니까
. 수많은 모순과 딜레 마 속에 서 고뇌 하고 또 고뇌 하며 살아가는 그들도 아직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내용이 기도 하고 말이 야.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면 점술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가깝고, 예 언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멀다는 것
이니.’,
진성은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이는 점술이 친숙하고 우리의 생활에 녹아들었음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
이 없다.하니 자네가나에게 구할조언 역시 어떠한 것이나상관이 없는것이
라!’,
"어떤 것이나상관이 없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조언보다모호하고, 지혜를 가지고 있는 이보
다 슬기롭진 않으리. 다만 그 방향성과 이득의 형태 만큼은 흐릿하게 나마 인
도해줄 수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나의 조언이며, 자네에게 이득을 쌓아가게
할수있네.’,
빅토르는 진성의 말에 피식 웃었다.
"누가주술사 아니랄까봐말을한번에 이해 못하게 어렵게 하는군.’,
쿠-웅!
그는 거칠게 팔을 식탁위에 놓고는 사나운 미소로 진성을 바라보았다.
"나는 간단하고, 확실하고, 효과 좋고, 효율 끝내주는 게 좋아. 마치 마법
의 총 AK처럼 말이야.’,
"그러한가?"
"그러니까 내방식대로 간다.’,
빅토르는 품 안에 서 돈뭉치를 꺼 내 들고 진성을 향해 던졌다.
돈은 놀랍게도 원화였다.
"복채를 선불로 냈으니 질문을 하겠다.’,
그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 켰다.
"이봐, 진一성.오늘 내가 이 식당을 빌려서 너를 만난 것은 잘한 일인가?’,
"그러하니라. 이곳은 고급 식당이기는 하나 최고급은 아닌바, 자네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사치로 즐기는 것 정도는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 게
다가 최근에 자네 가 얽힌 일. 흠. 아니, 하는 일과 관련해서 문제 가 일어날 수
도 있으니 이렇게 식당을 빌리는 것 자체는. 그래, 나름 현명한 판단이 었다고
윗선에서 평가할수도 있겠어. 게다가맛자체도 나쁘지 않으니 그 역시 훌륭
하다.’,
진성은 갑작스러운 빅토르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에 기다렸다는 듯 줄줄이 답해주었다.
"그래,좋아. 다음 질문.돌아가는 길에 보드카를잔뜩사서 갈생각인데,
이건 어떻지?"
"가지 않는게 좋을 것이니라. 자네가 가려는곳은오늘문을 닫았으며,그
것을 확인하고 들르려는 다른 곳은 형편없는 품질의 물건이 진짜의 탈을
쓰고 놓여있을 것이니. 자네는 그것을 먹고 격노하게 될 것이네.’,
진성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다.
마치 실제로 미래를 보고 그대로 옮겨 적는 것과 같은. 혹은 미래를 보고
답변을 준비해와서 줄줄 외우는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하찮기 짝이 없었으니.
그래서 빅토르는 즐겁다는 듯크게 소리 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래. 네놈 말이 뭔 느낌인지 알겠다. 하, 참. 이렇게 쉬운 것을 그렇게 모
호하게 비비 꼬아서 설명하면 힘들지도 않나?"
그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있으면 편리하긴 하겠어. 하지만복채라는 것도 내야하고. 부하
를 부리는 것과 뭐 커다란 차이 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하지 만 부하를 부리
는 것보다 더 좋은 면도분명히 있는 것 같고….뭐, 그렇군.’,
빅토르는곳곳에 '친구,가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친구, 인사와 관련된 친구, 기업을 운영하며 돈을 모으는 친
구, 음지에서 세를 불리며 그에게 온갖 정보와 돈을 바치는 친구 등등.
그런 친구,들의 자발적 인 도움을 받는다면 방금 진성 이 한 답변과 비슷한
내용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말이다.
오늘 쉬는 가게 주인장이 무슨 이유로 쉬는지, 그 사람의 인간관계는 어떻
고성격은어떤지.
빅토르가 식당을 간 것까지 꼼꼼하게 챙겨보는 윗선의 존재가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추정하는 내용까지.
모두 알 수 있으리 라.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진성의 '조언,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람을 통할 필요가 없으니 빨랐고, 방향성만을 제시해주는 것이기
에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기분 좋은 느낌도 있었다. 게다가 친구는
각각 연락하거나 여럿을 만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진성은 오직 그 하나만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니, 편리하기는 했다.
"좋아. 그리고조언 말고 뭐 또 할수 있는 것 있나?"
"있느니라. 다만 이것은 해줄 생각이 없으니."
"뭘 할 줄 알길래 해줄 생각이 없어 ?"
진성은 빅토르의 물음에 그저 웃기만했다.
그는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쯧 혀를 찼다.
"하여간 주술사라는 족속들은 뭐 숨기고 신비로운 체하는 게 참….’,
빅토르는 작게 한숨을쉬더니 잠시 침묵했다.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래.그럼 이거는진짜로 대답해줬으면 좋겠군. 나에게 왕이 될 운명이
라면서 점을 쳐주고,조언이라면서 나에게 들러붙고.그래.확실히 나에게 은
혜를 입히려고 하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말이야, 그 은혜를 입혀서 네놈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나?’,
그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 감정은 철로 만들어진 듯한 그의 표정 에 파묻혀 쉬 이 알아볼 수 있는 것
은 아니었으나, 진성은 그 표정 아래에서 잠들어 있는 단호함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단호함.
진성이 그를 쥐고 흔들려고 한다면 반드시 처단할 것이라는, 그 어떤 도움
을 주더라도 토끼 사냥이 끝낸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처럼 처리해버리겠다
는 단호함.
은혜는 잊지 않으나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한다면 반드시 자신의
힘을 휘두를 것이라는 결심이 있었다.
'쥐고 흔든다, 라.,
하지만 진성은 빅토르를 쥐고 흔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 당초 빅 토르라는 인간은 쥐 고 흔든다고 흔들릴 인 간도 아니 었다.
핵 샤워의 빅토르.
러시아의 종신 대통령의 앞에 핵 샤워,라는무식하기 짝이 없는수식어가
왜 붙었겠는가?
생화학 무기로 테 러 당했다고 핵을 날리 겠다는 인간이 다.
얼마나 많은 부하가 쏘지 말라고 간언을 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핵으로 동유럽을 초토화하는 것을 반대했을 것인가?
그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쏘고 또 쏘고…. 아무튼 많이 쏴서 동유럽 절
반을 방사능에 물들였다.
진성은 저런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오직 권력을 최고로 여기고, 많은 이에게 숭배를 받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
로 살아가는 인간.
자신이 휘두를 힘이 늘어나는 것을 낙으로 여기고, 자신의 권위를 범하려
하는 인간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인간이다.
만약 비선실세가 되어 제멋대로 움직이려 한다?
그러면 빅토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성에게 보복하려 하겠지.
그래.
빅토르는 진성을 떠보는 동시에 경고를 하는 것이다.
네가 나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내 맘대로 행동할 거
니 까 허튼 생 각은 하지 말고 주제 파악을 잘 해 서 내 가 주는 먹 이 나 받아먹
으라는 경고를 말이 다.
'경고, 경고라.,
하지만 진성은 그의 경고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원하는 것은 저 빅토르라는 작자가 핵으로 유적을 다 때려 부
수는 것만 막으면 그만이 었으니 까.
그는 빅토르가 뭔 짓을 하던 별 관심 이 없었다.
회귀 전처럼 지역마다 호화로운 별장을 두고 거기에 현지처 여럿을 두는
문란한 생활을 하던, 사생아를 많이도 싸지르고 그 녀석들에게 알짜배기 기
업들을 줘서 편히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던, 자신과 함께 한 개국 공신에게 한
자리씩 챙겨주든지 간에 그건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저 경고에 모멸감을느끼거나화낼 이유도 없었다.
제 목숨줄이 다른 사람에게 잡혀있는 것도 모르는 가련한 작자에게 어찌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단 말인가?
자신이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것에 위 압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진성은그의 경고에 아무렇지도 않게 답해줄 수 있었다.
"벙커와땅하나를 나에게 주게.’,
"뭐?’,
빅토르는 진성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지었다.
하지만 진성은진지하게 다시 말했다.
"벙커, 그리고 땅.’,
"하…. 그래 .얼마나대 단한 곳을 요구하려고?"
진성은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이칼호수 쪽에 소련 당시 지은 벙커가 있을 것이네. 당의 간부들이 이
용할 목적으로 만든 호화 벙 커 인데 , 나는 그것을 원하네."
"호화벙커라…?"
빅토르는 진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호화호텔도 아니고, 벙커?"
"그러하다.’,
"그럼 땅이라는 건 그 벙커 주위 땅이겠고?’,
"그러하니라.’,
"하.’,
하하하하하하!
빅토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바이칼호수를 달라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호텔을 지어달라는 것도 아니
고. 고작소련 때 지어졌던 낡아빠진 벙커랑그 주위 땅을 달라? 그게 도움을
주는대가다?’,
"그러하다.’,
"하, 거 참. 그래. 주술사라는 새끼들은 정말…. 대체 뭐 하는 족속들인지
모르겠어. 허."
빅 토르는 웃음기 가 사라지 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주지. 아니,이건지금 당장도 해줄수 있어. 아예 선불로 주지. 그리
고 뭐 필요한 거 있나? 아, 그래. 호화 벙커라고 했지. 안에 꾸미 기도 해 야 하
니 돈도주지.하하하!"
그는 정 말로 즐겁 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는 좋은 분위 기 속에 서 식 사가 이 어졌다.
빅토르는 진성에 대해 알고 싶다는 듯 호의적인 태도로 대화를 나누었다.
곧성인이 될 텐데 그때는 가장먼저 자신에게 찾아와술을 배우라는 말까
지 꺼냈다.그리고 러시아에서 지낼 때 부족함이 없도록 자신이 알아서 잘 말
해놓겠다는 말도 꺼 냈다.
그렇게 식사가끝나고.
"좋아. 아-주 좋아. 이봐, 너. 진성.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말도록. 그 마음
이 변치만 않는다면 너와 나는 아주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테니까.’,
빅토르는 분명히 호의 가 담긴, 하지만 경고의 의미도 담긴 말을 내뱉고는
식당을 나갔다.
식당에 남은 진성은 식탁 위 에 놓인 돈뭉치를 보았다.
돈뭉치.
복채.
빅토르가 던진 질문의 대가.
그가 '점술,을 시험하려 내민 지폐.
그는 돈을 묶고 있는 끈을 풀고는 빈 테 이블들의 위에 모양을 만들었다.
T.
I.
P.
그는 복채로 지불된 한국 돈을 이용해,TIP’이라는 글자를 만들고는 그대
로 밖으로 나갔다.
이는 이러한 기행이 빅토르에게 더 믿음을 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 식당의 음식이 꽤 맛있기 때문이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점술을 치르지 않았으니 치를 대가도 없고, 치를 대가가 없으니 들일 돈이
없다는 것도 이유이 리 라.
......
그래.
진성은 오늘 질문에 답을 해주었을 뿐이지, 점을 봐주진 않았다.
다만 미래를 알고 있기는 하니.
이것은 점술인가, 예언인가?
아니면 둘 중 무엇도 아닐지도,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그 성 질이 모호하니.
마치 어떻게 바뀔 지 모르는 미래와 닮았다 할 수 있으리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