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96화 (96/526)

<96 화〉부활, 봄

진성은 가만히 담비를 바라보았다.

담비는 그의 기억 속에 있는 담비보다도 훨씬 어린 외모로, 그때와 비슷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담비는 진성의 시선에도 부끄러움 없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제 할아버지가 하라고 한 말은 다 했으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게

요〜 진성 박, 저를구해주고 새 몸을 얻어줘서 고마워용!’,

"고맙다고요?’,

"네에. 진짜로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구체 적으로는 소원을 말하면

어지간하면 들어줄 정도로?’,

"소원이라."

진성은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담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결심이 섰

는지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당신은 옛날에 태 어났지 만, 진정한 의 미에서 태 어난 것은 아닙니 다.’,

진성은 담비에게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탄생이라는 것은 참으로묘한것이지요. 단순히 뱃속에서 나오고, 알에서

깨어나오는것을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수는 없어요. 자신의 존재를확실하

게 해 야만 진정으로 태 어 났다고 할 수 있습니 다. 그리 고 예 부터 사람의 존재

를 확립시키는 것은 이름이었고, 이름을 부여받고 스스로 여행을 떠날수 있

게 되 어서 야 성 인이 되 었습니 다. 성 인이 라는 것은 홀로 존재 할 수 있는 존재

임을 증명하는 단어이며, 동시에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이라는 이 야기지요."

그는 품속에서 여러 번 접혀있는 종이를 꺼내더니 그것을 불태워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참묘한존재이지요.분명히 다른 개체로서 존재하

지 만 동시 에 몸 밖으로 나오지 못했으니 태 어 난 것도, 태 어 나지 도 않은 존재.

하지 만 그렇 다고 존재 하지 않다고 하기 에 는 분명 히 존재 하는. 그런 존재 였

습니다.’,

진성은 눈으로는 담비를 쳐다보면서도 허공을 쥐 어서 어디선가 종이와 펜

을 가져왔다.

"그렇기에 예전의 당신은 그 무엇도 할수 없었습니다. 태명을 얻었지만 그

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되 어 당신의 이름이 될 수 없었고, 당신은 존재하지 만 누

구에게도 인식되지 않은 채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몸을

얻었고,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여정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

금 당신에 게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 다. 제 가 대부가 될 수는 없지 만, 작명 가

는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담비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진성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이름을 지 어드리 겠습니 다. 이름이 라는 것은 그 사람을 규정하

는 것이자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것. 개체를 구분하는 경계이자 당신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이름만큼 당신에게 어울리

는 게 없을 것입니다.’,

"이름을요?’,

"싫은가요?’,

"아니에요〜은인이 지어주는 거라면 좋죠! 하지만예쁘게 지어주세용〜"

진성은 종이 위에 손을 가져가 잉크를 뽑아내었다.

잉크는 가느다란 실의 형태로 뽑혀 허공에 부유하였고, 뱀처럼 꿈틀거리

며 허공을 헤엄쳐 담비에게 날아가 몸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의 이름은 아나스타시아(Anastasiya, AnacTacH踞)입니다. 부활이

라는 뜻을 품고 있지요.’,

몸을 얻어 부활한 자.

의식의 불꽃속에서 태어난자.

불사조처럼 불꽃으로 제 몸을 얻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자.

부활이라는 뜻을 품은 이 이름은, 그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이름일 것이다

"아나스타시아….’,

담비는 진성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마음에 들었는지 멍한 표정으로 몇 번

이고 중얼거렸다.

"다음은 성입니 다. 다만 이 것은 당신의 선택 이 중요합니 다.’,

진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담비에게 물었다.

"러시아식이 좋습니까,독일식이 좋습니까?’,

유명한 SF영화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을 건네주며 선택하라고 종용하듯,

진성은 비 어 있는 양손을 그녀에 게 내 밀며 물었다.

러시아를 택할 것인가, 독일을 택할 것인가.

하지만 영화와 다른 점은 오직 그것만을 말할 뿐 선택에 관한 결과는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 호선을 그리고 있는 진성의 눈에서 중간중간 이

채가 번뜩이는 것을 보아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선

택임이 틀림없음에도 오직 진성은 선택하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담비는 진성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 다가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독일식 이 좋아요〜 동생 이 랑 진짜 자매 라는 느낌 이 니까〜’,

선택은 이루어졌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어떤 이름일까요〜 동생이랑 같은 성을 가지는 건가요?’,

"아니요.’,

그는 웃었다.

"당신은봄의 노래 속에서 태어났습니다.그러니 겨울이라는 이름은 당신

과 어울리지 않아요.’,

다시 한번 종이에서 잉크가뽑혀 나오고,그것이 아나스타시아의 가슴께

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 고 잉 크가 모두 스며 들자 아나스타시 아가 발하고 있

던 존재감이 뚜렷해진 느낌이 들었고, 인기척이 더더욱 진해졌다.

"블루 조이사이트 렌츠(blue zoisite Lenz). 줄이면 B 렌츠가 되 겠군요. 당

신의 이름은, 당신의 풀 네 임 (Full Name)은 지금부터 아나스타시 아 B 렌츠

(Anastasiya B Lenz) 입니다.,,

겨울이라는뜻의 빈터(Winter).

따뜻한 봄이라는 뜻의 렌츠(Lenz).

.......

똑같은 성은 아니지만, 계절이 이어지니, 이 역시 자매 관계를 증명하는 성

씨라고 할수 있으리라.

"아나스타시아 B 렌츠….’,

담비는 자신의 가슴께를 매만졌다.

그곳으로 들어간 잉크가 더 잘 배어들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이 몸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흔적이 될 수 있도록.창백할 정도로

시린 피부가 마찰 때문에 빨갛게 물들 때까지 그녀는 명치를 문지르고 또 문

질렀고, 이윽고고개를들고는화사하게 웃으며 진성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너무 예쁜 이름이에요!"

"별말씀을. 그저 당신의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러시아선택했으면 어떤 이름주려고했어요?’,

진성은 그 물음에 진짜로 알고 싶냐는 듯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 만

그녀가 눈을 피하지 않자,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의 당신은굳이 알필요 없는 이름입니다.’,

만약 그녀가 러시 아식을 택했다면 이름과 성의 뜻 자체는 지금과 비슷했

으리라.

마찬가지로 부활의 뜻을 품은 아나스타시 아(AHacTacn踞)의 이름을 주고

, 봄이라는 뜻을 가진 베스나(嚶떵뛓蛩徭)를 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미들네임만큼은 확연하게 달랐으니.

꽤 자유롭게 짓는 유럽의 미들네임과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부칭,을 미들

네 임으로 사용하기 때문이 다. 그리고 부칭을 중요시하는 러시아 문화의 특

성상 그 속박은 꽤나 강했기에 진성에게 비롯된 부칭을 주었다면 그녀는 진

성에게 속박이 되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다만 호기심을 참을 수 없는 것 같으니 말씀드리 지요. 주어지는 뜻은 지

금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겁니다. 다만 그 음만 달라져, 렌츠 대신에 베스나가

되었겠지요.’,

"그것도 이쁘네요〜’,

"하지만렌츠라는 이름이 더 이쁘지 않습니까?"

"네, 렌츠가조금 더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해요〜 동생이랑 같은 나라

언어라서 그런 걸까요?’,

아나스타시 아는 선택했다.

그것이 옳은 것일지는 모른다.

자유와 안전.

위 험하지 만 자유롭게 생 활할 수 있는 것.

목줄이 채워지지만 안전한 것.

어느 것이 그녀에게 있어 더 좋은 것일지는모른다.

다만그녀는 인연으로 묘수를 얻었고, 묘수로 인해 선택지를 얻었고, 그 선

택지에서 다른 운명을 손에 넣었다. 이는 아나스타시 아 알렉산드로브나

베스나 (AHacTacH踞 A搾떵맍뛓徭蛩밀poBHa secHa) 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았던

회귀 전과도 다른 운명이며, 진성이 제시해주려던 것과도 다른 운명인바.

아나스타시 아 B 렌츠(Anastasiya B Lenz)라는 이름으로 나아갈 운명은

미개척된 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성은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듯 엘라에게 조잘대며 자랑하고 있

는 아나스타시아를 보며 어떤 시를 떠올렸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라는 시 .

눕 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

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禳

진성은 다른 운명을 살아가게 될 자신의 옛 동료를 바라보았다.

"다시 살아난 것을, 태어난 것을, 이름을 얻은 것을축하합니다.’,

"헷, 제가 더 고마운걸요! 엘라도 살려주고, 저도 살려주고, 이름도 주고!

평생에 걸쳐 갚아도모자랄 것 같아요!"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그저."

진성은 말을 하다가 담비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우연히 주술을 발견했다며 정보를물어다주었던, 회귀 전의 추억을.

아무리 운명 이 바뀌 었다고 한들 호기 심 이 가득한 아나스타시 아라면 반드

시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이다.그리고그 과정에서 회귀 전과 같이 수

많은 유적을 발견하고, 주술을 발견하리라.

"소원을 말하면 어지간하면 들어준다는 말, 잊지마시 길.’,

"넹 ! 알겠어요! 얼마든지요!’,

진성은 흔쾌히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허공에서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모습에 담비는 신기한지

눈을 끔뻑 이 며 호기 심 을 드러 내 었다.

"동생아, 동생아. 방금 봤어? 응?’,

그녀는 신기한 것을 본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재촉하는 것처럼 엘라에 게

말을걸었다.

말을 거는 것만으로 멈추지 않고 베고 있는 머리를 꾹꾹 누르기도 하고, 이

리저리 머리를 뒹굴며 폼롤러를 굴리는 것처럼 그녀의 다리 전체를 자극했

다.

그 모습에 짜증이 났는지 엘라는 온 힘을 다해 양팔을 움직여 아나스타시

아의 머리를꽉붙잡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이 사기꾼아! 그리고 나랑 리 자매가 이해할수 있도록 제

대로, 체계적으로, 시간순서대로! 잘 정리해서! 설명하세요!"

엘라의 말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진성이 행하는 의식을 지켜보고만

있던 구경꾼 둘은 슬금슬금 엘라와 아나스타시 아 쪽으로 다가왔다. 아나스

타시아는 조심조심 자신의 주변에 느껴지는 세 사람의 체온에 기분 좋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이 언니가 지금부터 끝내주는 설명을 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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