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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94화 (94/526)

<94화 > 부활, 봄

노인은 가부좌를튼 자세 그대로허공에 둥둥 떠서 엘라의 앞까지 도달했

다.

그리고는 관찰하듯 엘라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나는 정신의 수양을 통해 집단 무의식의 뿌리에 닿아 진리를 얻고자 하는

수행자중하나이니라. 이 집단무의식의 표면을 넘나들며 여행하는사람중

하나. 저 이름 없는 아이가 익숙하게 나를 대한 것은 나 같은 이를 많이 본 경

험에서 비롯된 것. 너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으며, 해를 끼칠 수도 없으니

너는 안심하고 내 말을 듣도록 하여라."

노인은 먼저 자기소개와 함께 엘라를 안심시켰다.

"이 곳은 집 단 무의 식 의 표면. 무의 식 의 집 합이 며 , 같은 문화와 같은 상식

을 공유하는 이들의 무의식이 모인 장소.’,

그는 엘라가 경계심을 조금 푸는 듯 하자 천천히 설명을 이 어갔다.

"현실에서 밤하늘을 보면 별이 보이는 법. 다만 그 반짝임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그 실체는 멀고도 멀어 도달할 수가 없다. 이 장소 역시 그와

같은 것이 라. 집 단 무의 식 이 란 꿈에 서 밤하늘을 보는 것 같아 너무나 멀 어

도달할 수 없고, 먹구름과 눈을 현혹하는 빛이 가득해 그 별빛조차 확인하기

힘드니 라. 다만 운이 좋아 그 별빛을 볼 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집 단 무

의식의 표면이다.’,

"네에….’,

"다만표면은 대단하지만대단하지 않다. 여러 사람의 무의식에서 파편이

모여 쌓인 곳이기는하나단지 그뿐.산호가모여 시간이 흘러 섬을 만든다

한들 그것이 살아있겠느냐? 섬이 산호를 지배할 수가 있겠느냐? 이곳은 흔

적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별개의 공간이며, 꿈에서 이곳으로 건너올 수는

있으나 반대로 이곳에서 꿈으로 건너갈 수 없는 일방통행의 광장. 영감은 줄

수 있을지언정 개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곳. 다만그들의 흔적

이 남아 그들의 삶을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양하고 수련할 수 있을 것이

다.’,

비유로 가득한 말.

하지만 엘라는왠지 모르게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꿰뚫어 본 것일까.

노인은 설명을 멈췄다.

"이해를 어느 정도 한 것 같구나. 귀여운 아이야, 이 정도면 되겠느냐?"

"넹廚’’

하지만 발랄하게 말하는 여자의 말에도 노인은 뭔가 심기가 불편한지 수

염을 계속 쓰다듬었다.

"안으로 파고드는 것도 아니고, 고작 표면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것으로

마녀들의 집단 무의 식 조각을 얻는 것은 대 가가 맞지를 않는데 • • •."

"괜찮아용! 어차피 저는 쓸 데도 없고.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도움이 됐으

니 그걸로 좋아요!’,

그 말에 노인은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아니. 저울의 균형은 맞아야 하고, 주고받는 것은 반드시 그 무게가 비슷

해야만하느니라.하니 너희에게 도움이 될 말을해주겠다."

노인은묵주의 알을 여러 개를뜯어 제 손에 얹더니, 그것을 깨뜨려 불꽃을

피워내었다.

타오르는 불꽃은 춤을 추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 이더니 또르르 굴러 바

닥으로 떨어졌고, 반짝이는 불똥으로 터져나가며 노인과 자매의 주위를 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휘휘 움직이며 선을 그리고 면을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알아

보기 힘든 문양 같았다.

"세상에 거대한불꽃이 퍼질 것이다. 한곳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수많은

곳에서 피워지는 불꽃은 온 세상을 불 지르되 생명의 숨통만은 간신히 붙여

놓을것이다.’,

노인은 여자를 쳐 다보았다.

"너는 그 불꽃 속에서 살아가리라. 그 끔찍한 고통은 호기심으로 덮고, 공

포는 탐구심으로 덮어 오직 너는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몸의 말단이 잘려나

가고 비명을 질러도 낯선 것을 집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요, 시야가 반쪽이

된다 한들 그 지혜를 갈구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참으로 외눈의 주신과 같은

바. 너는반드시 그들의 땅에서 그축복을받아그편린을 맛보았으리라.’,

노인은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리고는 입을 꾹 닫더니 엘라를 바라보았다.

"수레 바퀴 가 굴러 가듯 운명은 굴러 갔다. 무릇 비 탈에 서 굴러 가는 것과 같

이 수레바퀴는 결코 내려갈 때까지 멈추지 않으며, 돌부리가 있다 한들 거대

한 질량은 그 모든 것을 깨부수고 무시하며 계속해서 굴러갔으리라. 거기에

는 방향성 이 있고, 목적 지 가 있으며, 관성 이 있다. 오직 죽음이 라는 목표에

도달해서만 멈추는 것이었으니 오직 그 미래는 하나밖에 없는 것. 다만 그 비

탈의 길이 가 짧고 바퀴 가 굴러 가는 속도가 빠르니 그 명 이 마침 내 끊어 졌음

이라.’,

노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다만 운명은 가변적인 것. 한 알의 모래가 정교한 기계장치를 멈추게

하고, 거대한 물길 역시 인간의 손으로 바꿀 수 있는바. 운명은 비틀리고 정

해진 것은 사라졌으며, 엮여있던 인과는 풀려 이제는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

났도다. 이는 참으로 선업이라, 타오르는 불꽃에서 새 생명을 얻은 둘은 이제

는 빛을 발하며 마침 내 도달할 미 래 까지 타오르리 라.’,

그는 거 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노인의 눈앞에서 불똥은 아직 할 이 야기 가 많다는 듯 쉴 새 없이 움직 이고

있었지만, 노인은 뭐 가 그리 심각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닫을 뿐이었

다.

그러 다가 한참이 지 나서 야 입 을 열 기 를.

"거대한 집념이 제 둥지를 나갈 준비가 곧 끝나겠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여 자에 게 물었다.

이름 없는 아이 야. 내 가 묻노니,죽을 위 기의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선이 더

냐.’,

"네 ! 당연하죠!’,

"그렇다면 죽고자 하는 이를 구하는 것은 선이더냐?"

"네? 그렇죠. 선한 거죠!’,

"그이유는 무엇이냐?’,

"사람을 구하는 행동 자체가 선한 것이니까요?’,

"네 말대로라면 구하는 사람의 행동은 선한 것이며, 구해지는 사람의 의

도가 어찌 되 었건 죽음에서 구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이구나.’,

"네? 그런, 가?’,

"구명 (救命) 이란 말 그대로 선한 것이니, 이는 선업 이라. 그렇다면 묻는다.

자유를 얻으면 계속 다치다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짐승이 있다면, 그 짐

승에게 자유를 주는 것보다 목줄을 채워 목숨을 구하게 하는 것이 더 큰 선

인가?"

노인은 물었다.

"결과는목숨을 구했으니 선이 될 것이고, 그 과정과의사가 어찌 되건 그

행동은 선하다. 다만 선함에는 경중이 있고, 옳고 그름이 있는바. 자유를 갈

망하는 이를 풀어주고 목숨을 잃게 하는 것은 그른 것이고 목줄을 채워 구해

주는 것은 옳은 것인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면 자유를 주는 것

은 선하지 않은 것인가, 더 가벼운 것인가?’,

노인은 깊은 눈으로 여 자를 바라보았다.

!.

.........

"오직 결과만이 중요하다면 어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선이라는

결과만을 원한다면 그 외의 것은 필요가 없는가? 하늘과 땅이 거대한들 걸

을 때 사용하는 것은 오직 발자국이 닿는 곳뿐이라, 그 외의 것을 저승에 닿

을 만큼 깊게 파면 어찌 걸어 다닐 수 있을까!’,

노인은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인지, 그녀의 몸은흐릿해지면서 반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꿈에서 깰 때가 다가온다는 의 미였다.

"쓸모없는 것의 쓰임 이 라. 결과가 중요한 것은 맞으나 그 외의 것들도 중

요하니, 결과가 좋고 과정도 좋으면 그보다 좋은 것이 없다. 덜함도 더함도

없고 모난 것도 없다."

"할아버지?"

"너는처음보는 나에게 귀한것을주었고, 별 것 아닌 일에 과분한 대가를

지불하였다. 이는 명백히 호의 라고 할 수 있는 것. 진리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호의에는 호의를 돌려줄수밖에 없구나. 하니 남은대가를 묘수를 알려주는

것으로 갈음하겠다.’,

노인은 사라지기 직전 여자의 귓가에 속삭였다.

"깨어나면 네 은인이 있을 것이다. 너는그가 입을 열기 전에 이렇게 말하

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라와 여자의 눈 앞이 깜깜하게 변했다.

부유하고 있다.

엘라는 자신의 정신이 위쪽으로 부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검은 공간으로 떨어지고, 숨결이 방울지며 길을 만들던 전과는 다르게 그

반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이 손이라도 가진 것처럼 그녀의 정신을 밀어

주고 끌어올리고 있었고, 작게 보였던 빛이 점차 그 크기를 불려가며 그녀의

시야를 밝힌다.

하얀빛은 점에서 면으로 변하고, 면은 이윽고 그녀의 눈을 밝게 물들이는

공간이되었다.

마침내 밝게 물든 시야에 누군가 수채화를 그리듯 색이 입혀지고, 그 색이

형체를 이루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호텔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 어?’,

끔찍한 납치 후에 잃어버린 정신이 다시 돌아왔으니 그 자체로 기뻐서

환호성을 질러야 정상이건만.

엘라는 당혹감에 몸 둘 바를 모르며 눈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어?!,.

이 는 그녀 가 실 한 오라기 도 걸치 지 않은 알몸이 었기 때문이 며 .

또한, 그녀의 위에 어린아이가 마찬가지로 알몸으로 몸을 짓누르고 있었

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몸인 것으로도 당혹스러운데, 그녀의 코와 아이의 코에 이상한

실 같은 것이 연결되 어 있고, 그것을 따라가보면 코에 바늘이 꽂혀있었다.

엘라는 그 모습이 과학 시간에 감자 전지를 만들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누구죠?'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자신의 몸 위에 엎어진 채, 그녀를 옴짝달싹못 하게 몸무게로 짓누르고

있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누구란 말인가?

엘라는 입을 열어서 그녀를 깨우려고 했다.

하지 만 그녀의 의 도가 텔레 파시 로 전해 지 기 라도 한 듯, 아이 는 눈을 확 뜨

고는 엘라와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꿈에서 본 여자와똑같이 배시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뇽? 언니에용〜’,

그 화사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 엘라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소

리칠 수밖에 없었다.

"누가봐도 제가 언니잖아요! 이 사기꾼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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