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화 > 수확
무인은 잘 단련된 무인의 표본이라 할 법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잘 부
풀어 있는 근육과 힘줄이 돋아나 있는 팔, 유자나무의 향기를 풍기는 목검.
하지만 그 생김새는 왠지 묘해서 한국 사람과는 조금 다른 듯도 보였으니.
"크-흐.배를타고건너왔는가,피가섞여 있는가.’,
남자는 진성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목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자세를 잡
았다. 흉흉하게 빛나는 남자의 눈은 진성을 또렷이 노려보고 있었고, 목검에
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서서히 맺히고 있었다.
"오오. 기(氣)가 아니라 마나 (Mana) 로구나.’,
무채색의 자연력에 속하는 기(氣)가 아닌, 흉포한 힘인 마나(Mana). 푸르
스름한 빛을 품고 있는 마나는 기와는 다르게 수련의 효율은 적지만 남이 가
진 힘을 빼앗아가며 성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금기(Taboo)
와 결합한 형 태 의 주술에 서 주 에 너 지 원 으로 쓰이 는 힘 이 기 도 했다.
진성은 무인이 주술과 관련된 힘을 쓰자 관심 이 간다는 듯 번들거 리는 눈
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남자는 잠깐 흠칫 몸을 떨더니 이윽고 입
술을 피 가 날 정도로 꽉 깨물었다.
"이, 이역겨운요승(妖僧) 같으니."
남자의 말투는 한국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일본인 특유의 발음이 섞인 어
설픈 한국어였고, 쓰는 표현 역시 한국에서는 잘쓰지 않는표현이었다.
"크-흐. 요승이라?’,
무인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소리 쳤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딴 짓을 벌인 거냐!’,
억울함이 사무치듯 소리치는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더불어 슬픔이 진하
게 묻어 있었다.하지만진성은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
"그게 중요한가?’,
습격하고 습격당하는데에 이유가 무어 그리 중요하다고.
아무 이유가 없어도 당할수 있는 것이 습격이고, 아무 이유가 없음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습격이다. 그냥 야영하는데 불빛에 벌레가 꼬이는 것처럼 당하
면 신경에 거슬리고 짜증 나지만그리 특별할 것은 없지 않은가.
"그것보단 마나에 더 관심이 가는구나. 자네의 검술은 마나로 펼치는가?
혹여 자네의 무공에 주술적 요소가끼어있진 않는가?’,
금기를 이용한 마나의 강화가 있는가?
마나를 통한에너지 흡수의 효율은 얼마나되는가?
무공과 주술로 발현되 는 마나의 차이 가 있는가? 만약 차이 가 미 미하다면
마나라는 에 너지원으로 주술과 무공을 병행할 수 있는가?
진성은 제 몸을 간신히 가누고 있는 무인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뿌드득.
그리고 질문을 던지며 서서히.
서서히 등을 펴기 시작했다.
굽은 다리가 일자로 일어난다.
석고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피부는 점차 생기(生氣)가돌기 시작한다.
광택이 돌던 갑옷에 그물망처럼 금이 생긴다.
심하게 굽어 혹과 같이 튀 어나왔던 등은 점차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꼽추에서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때.
진성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인질로서, 거래의 대상으로서의 가치가있는가?’,
무인은 그 질문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씹어뱉듯 두 단어를 내뱉었
다.
"시네 (死듃),체이!’,
지이이잉!
무인이 가진 감정에 공명하듯 목검에 담긴 마나가 진동하며 살의를 표출
했다.무인은크게 발걸음을 디디며 진성에게 뛰어왔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내 려칠 것이 라 광고라도 하듯 높이 치 켜든 목검. 괴 성 에 가까운 기 합과 전
력 질주를 하듯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무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진성은 자신을 세로로 쪼개 버리 기 위해 돌진하는 무인을 보며.
"□□□."
축지를 사용했다.
*
*
*
무인(武人)은 강하다.
경지에 이른 무인은 평범한 검으로 전차를 벨 수도 있으며, 마법사가 만들
어낸 강력한 방어막도 유리처럼 깨뜨릴 수 있다. 거기 다가 한계까지 단련된
반응 속도와 근육은 시 간을 쪼개고 쪼개 서 움직 일 수 있게 만들어주고, 단기
전에는 단련된 힘을 폭발적으로 끌어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거기 다가 잘 단
련된 신체는 긴 장기전마저 무리 없이 할수 있게 만들어주니 그야말로 전투
의 스페셜리스트라 칭할만했다.
그렇다.
무인은 강하다.
다만, 근접에서만.
"옴 감 가나파타예 나마하.’,
내 약점을 상대의 강점에 부딪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무인은 근접 에 서 강하고 주술사는 원 거 리 에 서 강한 바.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닮는다. 묘안석(猫眼石)은 고양이의 눈을 닮았으니
서로가닮으리라.’,
그러니 진성은 현명하게 자신의 강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후려치기로 했다
•
특히나 나는 때리고 상대는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것만큼 재미난 싸움
은 없는 법.
그는 묘안석과 고양이의 눈을 연결해 목이 잘린 채 뒹굴고 있는 고양이의
시 야를 볼 수 있게 주술을 사용했다.
"어디냐! 이 비겁한요승놈아! 썩 모습을드러내지 못할까!’,
저 멀리에서 쩌렁쩌렁 소리치는 무인의 소리를 들으며 주술을 사용하자
아주 낮은 시야로 아까까지 있었던 복도의 풍경이 보였다.목이 없는 시체가
널려있는 복도에서는 몸을 휘청이며 입가에서 피를 흘리는 무인이 목검을
들고 발광을 하고 있었는데, 진성이 주술을 이용해 몸을 어딘가로 숨겼다고
확신하는지 경계태세를 풀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인의 반대편에 는 혼을 빼 앗기 기 라도 한 것처 럼 멍한 표정을 지
은 채 서 있는 근육질의 남자가 있었는데, 진성은 남자를 보곤 주언(呪言)을
외우기 시작했다.
"본디 뿌리와 줄기는 연결되고, 씨앗이 뿌려 져도 그 종(種)은 하나로 이어
지는법. 서로 떨어져 있다한들그인과는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노라.’,
주언과 함께 주술이 공간을 초월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찍이 남자의 배에 파고들었던 머리 카락을 태운 잿더미는 다시 모양을
이루어 하나의 실이 되었고, 그 실은 남자의 몸에 있던 톡소포자충과융합해
마치 뱀처럼, 혹은 길쭉한하나의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남자의 피부 표면을
헤엄쳤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림 자로 만들어진 뱀 이 피부에 서 꿈틀거 리는 모습과 같
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광경을 목격하는 이는 진성 하나뿐이 었다. 남자는 톡소포자충이 만들어
내는 환상에 빠져 넋을 잃고 있었고, 무인은 진성을 경계하느라복도 반대편
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에게 큰 신경을 쏟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 기묘한무관심 속에서 그림자의 뱀은 얼굴까지 도달했다.
진성은 그 모습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우자(愚者)야, 어리석은 자야. 너는 진리를 깨닫고 믿게 되 었느냐?’,
소리가 닿지 못함에도 몸속에 파고든 벌레를 매개로 전달된 하나의 질문.
그림자의 뱀은 생각을 잃어버린 남자의 입을 억지로움직여 네 글자를 만
들어냈으니.
"믿습니다.’,
그 말과함께 일찍이 남자에게 걸어두었던 주술이 터져 나왔다.
*
*
*
땀.
남자가흘렸던 땀방울엔 하얀 알갱이가 맺혔다.
얼핏 땀이 마르고 마르며 생긴 소금기 같아 보이는 그것은 남자가 땀을
흘렸던 모든 부위 에 나타나 그 크기를 불렸고, 이윽고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고 터져나가며 그 안에서 수많은 벌레가 모습을 나타냈
다.
날개 달린 것들.
얼핏 하루살이 를 닮았지 만, 그 크기 가 매우 작고, 날갯 짓을 한 번 할 때마
다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를 내는 그것들은 일제히 복도 천장으로 날아올라
떼로 모여 검은 안개를 만들어냈다.
"땀에선벌레가 태어나리라.’,
잠복 형태로 걸어두었던 주술을 사용하자 진성의 몸에서 생명력이 빠져
나갔다. 벌레가 만들어지는수에 비례해 진성의 생명력이 소모되었다.하지
만 겨우 벌레를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인 주술이었기에 진성의 피부가 푸석
푸석해지고 머리카락이 거칠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정도였다.
겨우 벌레를 만드는 것.
하지만 때에 따라선 그 벌레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가만히 내 버려 둬도 상대 가 죽는 경우 시 간을 끌기 엔 벌레 떼
를 부르는 것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었다.
거 기 다가 상대 방에 게 지 옥의 이 지 선다를 강요하기 에 도 알맞았다.
그냥 시간을 끄는 용도라고 신경을 꺼버리면 벌레떼에도 주술을 걸어서
살상력을 지니게 만들어버리면 되니까.
■말라리아 같은 원생생물을 미리 얻어두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을.,
하지 만 안타깝게 도 아직은 살상력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 그가 원하는 살
상력을 부여하는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했고, 그 재료는 오
지로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었으니까.
그렇기에 진성은 다른 방법으로 무인을 제압하고자 하였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진성이 주언(呪言)을 외우자목이 잘린 고양이의 몸체에서 포자를뿜어내
듯 하얀 가루가 터져 나와 복도를 가득 메 웠고, 그 하얀 가루는 자연스레 무
인의 호흡기로 들어가 폐를 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무인은 복도가 하얗게 물들자 크게 당황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날
벌레 떼는 남자의 눈, 코, 입에 들어가거나 눈을 가리고 복도의 벽과문, 창문
을 가리는 등의 교란작전을 펼치며 시간을 끌었다.
이 윽고 무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강한 무인은 아니로구나. 쯧쯧, 제대로 된 무인은 온갖 병마와 주술에 감
염이 되어도 사흘 밤낮을 너끈히 버티거늘.’,
진성은 그 모습을 고양이의 눈을 통해 가만히 지켜보았다.
폐 전체를 하얗게 물들인 곰팡이 때문에 제대로 호흡을 못 한 무인이 숨을
몰아쉬고.
근육을 경련시 키고 눈을 뒤 집 어 까고.
결국에 바닥에 누워 의식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까지.
..
...
계속.
계속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