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첫눈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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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 첫눈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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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7. 첫눈 [외전 완결]
2023.02.17.
이제 막 동이 튼 아침. 복도에 드리운 그림자 여럿이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괜찮을까?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아니.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차분한 대답과 달리 라크하는 가만히 있질 못했다.
라크하와 아이샤가 불안한 표정으로 복도를 서성이고 있던 그때였다.
방 안에서 메이아의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약속했다는 듯이 라크하와 아이샤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메이아!”
“언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샤와 라크하가 방문 앞에 달라붙었다. 금방이라도 방으로 들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델카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형이랑 아이샤. 둘 다 가만히 좀 있어!”
라크하와 아이샤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문 앞에서 물러났다.
“후.”
라크하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회중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5시부터 진통이 시작됐으니 지금 약 3시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차라리 옆에서 직접 볼 수 있다면 더 나았을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언니가 저렇게 아파하는데 괜찮은 거 맞아?”
“메이아…….”
다시금 시작된 대화에 델카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 사람이 쫓겨난 것은 지금처럼 유난스럽게 구는 아이샤와 라크하 때문이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전부 나가요.
메이아의 축객령은 생각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그렇게 고집을 피우는 두 사람이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니까.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
또다시 메이아의 신음이 흘러나오자, 아이샤가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라크하가 미간을 찡그린 채 그저 살벌하게 문을 노려보던 그때였다.
“응애!”
방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라크하와 아이샤는 순식간에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메이아!”
“언니!”
문을 열었던 산파는 아기의 소식을 전할 새도 없이 속절없이 밀려났다.
“넌 이리 와.”
델카인은 가까스로 아이샤를 붙잡았다. 아이샤는 델카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이거 놔! 언니가 괜찮은지 확인해봐야 한단…….”
거기까지 말한 아이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다물었다. 메이아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생명체를 목격한 탓이었다.
“아우웅.”
“…….”
아이샤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델카인은 마음을 놓고 메이아를 바라보았다.
땀범벅이 된 메이아가 아기를 안은 채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메이아의 곁에 있던 라크하가 손을 뻗어 그녀의 땀을 닦아주었다.
“……많이 힘들었지.”
힘없이 웃은 메이아가 고개를 내젓고는 라크하에게 아기를 보여주었다.
“절 닮은 왕자님이에요.”
“아…….”
라크하가 석상처럼 굳은 채 아기를 바라보았다. 백금발의 남자 아기였다.
“아가야. 네 아빠야.”
“……정말 내가 아빠가 됐구나.”
라크하는 복잡한 감정이 들끓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닮은 아기는 무척 사랑스럽고 손을 대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작았다.
아기를 눈앞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라크하의 모습에 메이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아 봐요.”
손을 뻗어 천천히 아이를 품에 안는 라크하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그제야 쌍둥이들도 라크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샤는 언제 시끄럽게 굴었냐는 듯 숨을 죽인 채 아기를 쳐다보았다.
“……나, 아기는 처음 봐. 델카인. 아기는 원래 이렇게 새빨간 거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면 그렇대. 그런데 너무 귀엽다…….”
“신기해.”
쌍둥이들은 이미 아기에게 홀딱 반한 듯한 얼굴이었다.
생명이 싹트는 이른 봄. 네 사람이 한 가족이 되는 순간이었다.
***
4년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해,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근 몇 년 만에 내린 이례적인 폭설로 공작가의 정원에는 눈이 소복이 쌓였다.
“엄마! 어때, 어때?”
두 손을 방방 흔들며 달려온 필립이 자수정처럼 맑은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작고 오동통한 손에는 울퉁불퉁한 눈덩이가 있었다.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얼핏 보니 눈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필립. 눈사람을 만든 거야?”
“응! 눈사람! 엄마 주려고!”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포동포동한 뺨을 붉혔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필립을 꼭 끌어안으며 아이의 뺨에 뽀뽀 세례를 퍼붓던 그때였다. 누군가 필립의 뒤로 달려왔다.
“필립! 이리 와 봐!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게!”
어느덧 제법 앳된 모습이 사라지고 훌쩍 큰 아이샤였다.
필립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재밌는 거?”
“응. 델카인이 알려준 것보다 훨씬 재밌을 거야!”
“재밌긴 무슨. 필립한테 이상한 거 알려주려는 거지?”
아이샤의 곁으로 다가온 델카인이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들었다.
정말 라크하랑 닮았다니까.
날이 갈수록 델카인이 라크하의 동생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가자, 필립! 저쪽에 눈이 많이 쌓여 있어. 그리고 델카인. 너도 따라오고.”
“좋아. 좋아! 엄마! 누나랑 놀다 올게!”
“재밌게 놀다 와.”
나는 잔뜩 신이 나 보이는 필립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델카인은 아이샤를 따라가는 필립이 걱정되는지 마지못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필립과 쌍둥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그대. 요즘 나한테 너무 소홀한 거 아니야?”
라크하가 심통 난 얼굴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내 관심을 바라는 대형견 같은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필립이 당신을 닮아서 너무 귀여운 걸 어떡해요.”
처음에는 필립이 나를 닮은 줄 알았다. 하지만 필립은 크면 클수록 라크하를 닮아가고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목구비를 보면 딱 라크하였다.
필립이 나랑 닮은 거라곤 머리색과 성격? 정도일까.
“누가 봐도 당신 아들인 줄 알 것 같아요.”
“그대의 아들인지는?”
“자세히 보면 알지 않을까요?”
“흐음…….”
라크하가 목을 울리더니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를 빼닮은 아이를 하나 더 만드는 건 어때?”
날 닮은 아이? 나는 무심코 머릿속에 날 닮은 아기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뒤늦게 라크하의 말에 숨겨진 속뜻을 알아챈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흘겨보았다.
“당신…….”
“그대를 닮은 딸을 보고 싶어.”
라크하가 나를 제 품으로 바짝 끌어당기더니 내 이마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날 닮은 딸이 보고 싶다니.’
사실 둘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필립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라크하에게 딸 얘기를 듣자니 슬쩍 욕심이 치솟았다.
게다가 아이샤도, 델카인도 몇 년 뒤면 성인이 될 테니까. 두 아이가 저택에서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심지어 아이샤는 이전에 티파티에서 만났던 브라운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 참이었다.
델카인도 펠리르의 연구를 돕고 있으니 언제 저택을 떠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쌍둥이들이 떠나면 필립도 외롭겠지.’
더군다나 필립이 종종 동생을 갖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필립도 오늘은 피곤할 테니 다른 방에서 재워도 중간에 깨지 않을 거야.”
어쩐지 라크하의 나직한 목소리가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라크하와 단둘이서 밤을 보낸 지도 오래되긴 했구나.
가만히 고민하고 있던 그때, 라크하의 손이 슬금슬금 두꺼운 겉옷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랗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내 등골을 은근히 쓸었다. 아찔한 감각이 등골을 훅 훑었다.
“……!”
나는 순간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눌러내며 황급히 라크하의 팔을 잡았다.
“애, 애들이 보겠어요!”
“이참에 애들을 들여보내고, 필립을 재워볼까?”
라크하가 눈을 접어 웃었다. 나는 힐끔 쌍둥이들과 필립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아이샤와 델카인이 살벌하게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필립은 그걸 재밌다고 박수를 치면서 꺄르르거리고 있었고.
“응? 메이아.”
내 대답이 늦어지자, 라크하가 나를 채근했다.
사실 필립이 신경 쓰여서 그렇지, 솔직히 나도 라크하와 오래간만에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싶긴 했다.
“그렇게 해…… 헉!”
퍽-!
라크하가 어디선가 날아온 눈덩이를 팔로 막으며 내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눈덩이가 얼마나 커다랗던지. 라크하와 몸을 맞대고 있던 내 몸도 휘청였다.
깜짝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크하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간담이 서늘했다.
“누가 감히…….”
라크하가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쌍둥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활기가 넘치고 시끄럽던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필립이었다. 아직 어려서 상황 판단이 느린 필립이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와! 누나가 던진 눈을 아빠가 막았어!”
“필립! 그걸 말하면 어떡해! 오빠, 실수인 거 알지?”
“메이아가 맞을 뻔했어.”
라크하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푹 내뱉으며 라크하를 말렸다.
“라크하, 저는 괜찮아요.”
“그대가 맞았으면 크게 다쳤을 거야. 오늘은 혼쭐을 내줘야겠어.”
이미 내가 다칠 뻔했다는 생각만으로도 라크하는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해서 달래질 정도가 아니구나.
물론, 그 외에 손쉽게 라크하를 달래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잘 안 쓰는 방법이긴 한데…….
뭐, 어차피 오늘은 라크하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거니까.
라크하에게 팔짱을 낀 나는 작게 속삭였다.
“아이샤 말고 저를 혼쭐내주는 건 어때요?”
그 순간, 라크하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오랜만에 보는 라크하의 당황한 얼굴에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뒤늦게 표정을 가다듬은 라크하가 내 이마를 가볍게 톡 밀었다.
“방에서 기다려. 필립은 내가 재우고 올 테니까. 그리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라니. 이전에 내가 했던 말을 이렇게 돌려받을 줄이야. 되려 한 방 먹은 기분에 얼떨떨했다.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라크하는 필립과 쌍둥이들의 곁으로 걸어갔다.
“아이샤, 델카인. 그냥 넘어가 줄 테니 이만 들어가자.”
“뭐? 오랜만에 다 같이 나왔는데, 얼마나 됐다고 벌써 들어…….”
“아이샤.”
옆에 있던 델카인이 아이샤의 팔을 툭 건드렸다. 아이샤는 아차 하더니 뒤늦게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갈 수도 있지. 그래, 그런 거겠지.”
아이샤는 더는 무어라 하지 않고, 옷에 묻은 눈을 털며 저택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라크하는 그제야 쌍둥이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필립을 돌아보았다.
‘라크하가 필립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고 방에 들어가야지.’
필립이 갑자기 날 찾을 수도 있으니까.
“필립. 아빠랑 같이 들어갈까?”
“응! 좋아! 그런데 잠시만 아빠!”
필립이 라크하의 손을 단번에 잡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조그만 손으로 눈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라크하한테도 눈사람을 주려나 보네.”
어쩜 우리 아들은 이렇게나 착한지.
“아빠. 잘 봐!”
“응? 뭔데?”
라크하가 필립에게 몸을 숙인 그 순간이었다.
퍽. 필립이 라크하에게 눈덩이를 던졌다.
“라크하!”
나는 경악해서 숨을 짧게 들이켰다. 라크하의 얼굴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꺄하하! 아빠가 눈사람이 됐어!”
필립은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서둘러 라크하의 곁으로 달려간 나는 그의 얼굴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그러다 살벌하게 번뜩이는 라크하의 눈빛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라크하. 우리 필립을 데리고 들어가기로 한 거 기억나죠?”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큰일 났다. 이번에야말로 눈이 돌아간 게 분명했다.
내 물음에 어떠한 반응도 없던 라크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쌍둥이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이…… 내 아들에게 이상한 걸 가르쳤겠다?”
“……혀, 혀엉. 난 모르는 일이야.”
“뭐라는 거야. 델카인. 너도 같이 눈싸움했잖아!”
“야, 그냥 튀어!”
발뺌하던 쌍둥이들은 이내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곧장 뒤돌아 뛰었다.
그리고 라크하 역시 내가 잡을 새도 없이 그 뒤를 따라 뛰어갔다.
“이 녀석들, 어딜 도망가?”
“난 모르겠다…….”
필립과 단둘이 남은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뭐, 굳이 말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라크하도, 쌍둥이들도 살벌한 상황과는 다르게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 지어져 있으니까.
옥신각신하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오빠랑 싸우는 거야!”
“아이샤! 형한테 덤빌 생각하지 마!”
하늘에서 내리는 함박눈에 즐거운 웃음소리가 녹아들었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은 소란스럽고 즐거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