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아이샤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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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아이샤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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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 아이샤의 친구
2023.02.10.
의원이 떠난 이후에도 나는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내가 임신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어안이 벙벙했다.
의원이 오진을 한 건 아닐까? 혹은 내가 꿈을 꾸고 있다든가.
나는 배 위로 손을 올려보았다. 납작하고 평평했다. 그런데 여기에…….
“……아기가 있구나.”
내가 엄마가 되는 거야. 어쩐지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한 아이의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게 무섭고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배에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까지 상상만 해봤었는데. 정말 라크하와 나를 닮은 아이가 배 안에 있다니.
“……우리 아이가 있대요.”
“…….”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의아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라크하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 같달까.
나와 눈이 마주친 라크하가 곁에 앉더니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기뻐해도 돼?”
내 눈치를 보느라 티를 내지 못하고 있던 거였구나. 언제나 과감하던 남자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라크하의 손을 내 배 위로 올렸다.
“그럼요. 저랑 라크하를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가 생긴 거잖아요.”
햇살처럼 웃기도 하고, 말썽을 피우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안겨줄 아이.
“그래. 메이아. 우리 아이야.”
그제야 라크하는 행복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나를 껴안았다. 그러고는 내 볼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나 좋으면서 어떻게 참고 있었던 걸까. 그 뒤로도 라크하는 내 배를 어루만지고, 다정한 말을 속삭였다.
세상의 행복을 모두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
그날 이후로 라크하는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전전긍긍하며 나를 따라다녔다.
이것도 라크하를 달래서 그 정도로 그친 거였다.
‘처음에는 나를 안고 다니려고 했었지.’
어딜 갈 때마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라크하에게 안겨 다니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렇게 라크하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 곁에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라크하가 나를 지극정성으로 챙겨주는 만큼 행복한 것도 사실이었다.
“라크하는 아이가 누굴 좀 더 닮았으면 해요?”
“난 그대를 닮았으면 좋겠어.”
“정말요? 저는 라크하를 닮았으면 했는데.”
예전에 망령들이 보여줬던 과거 속에서 봤던 어린 라크하가 너무 귀여웠단 말이지.
통통한 볼과 자수정 같은 동글동글한 눈동자.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귀여웠다.
어린 라크하를 떠올리자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너무 귀여울 것 같아요.”
“글쎄. 그대를 닮은 아이가 더 귀여울걸?”
라크하와 함께 태어날 아이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라크하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시롬이었다.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시롬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공작님. 더는 미루실 수 없습니다. 오늘까지 조율해야 하는 와인 사업 계약 체결 건이 있는 데다가 저녁에는…….”
“아기에게 해로운 소리는 그 정도로 하지그래. 좋은 것만 들어야 부족할 시기인 것을.”
하지만 라크하는 시롬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내 배 안의 아기를 살피기 바빴다.
“그렇지? 아가야. 오늘은 어떤 책을 읽어줄까?”
“공작니임…….”
“책 한 권만 읽어주고 갈 테니 먼저 가 있도록 해.”
라크하는 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온 신경이 아기에게 쏠려 있었다.
이 남자를 정말 어쩌면 좋을까. 미룬 업무가 한두 개가 아닐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는지 시롬이 내게 은근히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라크하. 저는 괜찮으니까 얼른 집무실에 가 봐요.”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남편이 함께 있어 주는 게 산모에게도, 아이에게도 좋다고 하더군.”
“며칠 내내 같이 있어 줬잖아요. 업무를 먼저 끝낸 뒤에 오셔도 충분한걸요. 그래야 저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나는 라크하의 손을 맞잡으며 그를 타일렀다. 결국, 라크하는 마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방을 완전히 나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내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쌍둥이들이 찾아오더라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럼요. 조심할게요.”
라크하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방을 나섰다.
***
라크하가 나가기 전에 쌍둥이들의 얘기를 꺼내서일까.
며칠 전 라크하가 해줬던 얘기가 떠올랐다.
‘델카인이 나와 라크하 사이에 태어날 아이와 아이샤를 걱정했다고 했었지.’
그 말을 들은 나는 아이샤에게만큼은 잠시 임신 사실을 숨기자고 했다.
아이샤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걸 한 번에 알리기보다는 천천히 이해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라크하 역시 내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했다.
-내가 아이샤와 대화를 나눠볼 테니 그대는 너무 걱정하지 마.
라크하가 신경 쓰지 말라고 얘기했으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괜찮을까.”
라크하는 제 업무를 처리하기도 바쁠 텐데.
라크하가 혼자 해결할 때까지 가만히 있기엔 역시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아이샤는 다른 이들의 관심과 애정에 예민한 아이였다.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아이샤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을까?”
대화를 나눠 아이샤를 달래는 것 외에도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아이샤가 더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
순간적으로 떠오른 엄청난 생각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설렁줄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어요, 마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익숙하지 못한 호칭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하지만, 이런 내 반응에도 리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젠 공작부인이신데 예의를 지켜야지요! 편하게 말을 놓으세요. 그런데, 무슨 일이신데요?”
“알, 알겠어. 아, 혹시 며칠 전에 보여줬던 수도 내 귀족 명부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건 왜요?”
리타가 정말로 궁금했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나도 이제 공작부인이니까 사교활동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공작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와 내 아이를 위해서도, 쌍둥이들을 위해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가 된 것 같아.”
출산의 경험이 있는 귀족들과 정보를 나눔과 동시에 쌍둥이의 친구를 만들어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명부 내에 있는 귀족들 가운데 쌍둥이의 나이와 비슷한 아이가 있는 집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래서 초대장을 보내는 것과 티파티 일정을 잡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해.
처음에는 내 얘기에 걱정하던 라크하도 나중에는 내 뜻을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티파티 날이 밝았다.
한 손에는 부채를, 한 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온 귀부인들의 모습은 연회에서 보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이런 귀중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어서 오세요.”
가장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피크젤 후작 부인이었다.
사교계에서도 언제나 격식 있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했던가?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 후작 부인과 좀 더 깊이 대화를 나눠보려던 때였다.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저는 피크젤 후작가의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어머, 만나서 반가워요. 마침 우리 공작가에도 영식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두 명 있답니다.”
나는 쌍둥이들을 소개해 주기 위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곳에서는 아이샤가 혼자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서 서 있었다.
당황한 나는 허리를 숙여 아이샤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이샤. 델카인은 어디 갔어?”
“펠리르인가 펠리컨인가 걔한테 간다고 하던데? 데려갈 거면 나도 데려가지. 심심하게 이게 뭐야…….”
몇 분 전에 펠리르를 얼핏 보긴 했는데, 그때 따라간 건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일단은 아이샤라도 소개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나서기도 전에 아이샤가 대뜸 눈썹을 까닥대면서 브라운에게 삿대질했다.
“그런데 얘는 또 뭐야?”
브라운의 얼굴에 삿대질하는 아이샤의 말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황급히 아이샤의 손을 붙잡아 내린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샤, 이쪽은 오늘 티파티에 참석해 준 손님이야. 반갑게 맞이해주자.”
“……안녕.”
아이샤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가만히 아이샤를 바라만 보고 있던 브라운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저는 피크젤 후작가의 영식, 브라운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브라운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자칫 불쾌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는데. 브라운이 살가운 성격이어서 다행이었다.
“영애만 괜찮으시다면, 저쪽에서 함께 노는 건 어떠세요?”
“내가 왜?”
하지만 아이샤의 행동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아이샤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맴도는 브라운의 손을 보며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에야말로 아이샤의 행동에 상처를 받았을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아이샤에게 친구를 만들어주는 건 아직은 무리였던 걸까? 요즘 저택의 사용인들과 잘 지낸다기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친구를 만들어주는 건 여기서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상황을 정리하려던 그때였다.
브라운이 아이샤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영애와 친해지고 싶거든요. 부담되지 않으신다면 영애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요.”
브라운은 아이샤가 어떻게 행동하든 전혀 타격이 없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나, 나랑?”
아이샤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스스럼없는 브라운의 행동이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브라운은 아이샤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브라운과는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아이샤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아이샤, 피크젤 영식이랑 공작가 내부를 안내해주면서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때?”
아이샤의 대답은 단번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큰 성과였다. 아이샤는 싫으면 싫다고 얘기하는 아이니까.
“괜찮을 거야. 아이샤.”
“……언니가 말한다면, 뭐.”
계속해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아이샤가 결국 내 말에 마음을 바꾸고서 돌아섰다.
“……빨리 와!”
“아, 네!”
멀어지는 브라운과 아이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은 기대감이 일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두 아이의 우정이 싹트길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