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사랑을 준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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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사랑을 준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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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사랑을 준 만큼
2023.02.06.
“형. 나 고민이 있어.”
탁. 델카인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우유 잔을 내려놓았다.
“무엇이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라크하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에 임했다.
델카인은 라크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만약 형이랑 형수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어쩌지?”
“쿨럭.”
라크하는 그만 사레가 걸려 기침을 토해냈다. 메이아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게 저와 메이아의 ‘아이’에 관한 내용일 줄이야.
호기심이 많은 델카인이라면 궁금해할 법했으나,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라크하는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이에 관한 문제는 나와 메이아가 알아서 고민해볼 테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다는…… 아이샤가 걱정되어서.”
“메이아가 아이샤와 함께하는 시간과 관심이 줄어들까 봐?”
“응. 그러면 아이샤가 서운해하거나 질투할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요즘 형수님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줄었다고 얼마나 풀이 죽어 있었는데.”
라크하는 며칠 전에 복도를 지나가다 봤던 아이샤를 떠올렸다. 표정이 어둡고 울적해 보였었다.
제 착각인 줄 알고 넘겼었는데…… 그게 메이아 때문이었다니.
아이샤가 메이아에 대한 집착이 강하긴 했지만, 최근 들어 조금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라크하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이샤와 한 번 얘기해 봐야겠군. 먼저 얘기해줘서 고맙다, 델카인.”
“아냐,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야.”
즉각적으로 나오는 대답에 라크하의 시선이 델카인의 손으로 향했다.
델카인이 고개를 떨군 채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으음…….”
델카인은 이전과 달리 단번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기에 머뭇거리는 거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찾아가면 쉬지 않고 재잘대던 아이샤와는 너무나 다른 반응이었다.
라크하가 유심히 델카인을 살펴보던 때였다. 라크하의 머릿속에 놓치고 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델카인은 제 얘기를 꺼내고,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자신의 힘으로 해내려고 할 뿐,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너는 내게 따로 말하고 싶은 건 없고?”
“응?”
순간 델카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당황한 듯한 델카인의 모습에 라크하는 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요즘 공부하느라 힘들다거나, 아니면 아이샤가 너무 괴롭혀서 귀찮다거나.”
“……아이샤는 늘 귀찮고, 공부가 힘들다고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모습에 라크하는 가슴이 미어졌다.
스스로 돌아볼 시간조차 없었던 델카인의 모습이 어린 시절의 자신과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델카인은 언제나 자신을 돕기 위해서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결국 델카인도 아직은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작은 아이가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은.
자신이 이 아이에게 어른도 감내하지 못했던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게 만든 것은.
델카인은 언제나 자신을 배려해주었다. 어쩌면 그 배려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형. 나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렇다기엔 네게 너무 많은 것을 신경 쓰게 한 것 같아서.”
“아니야, 난 정말로 괜찮아.”
델카인이 살며시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라크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무슨 얘기든 상관없으니 종종 오늘처럼 찾아와도 돼.”
“정말 그래도 돼?”
델카인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집무실로 올 때마다 망설였을 델카인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진즉 델카인에게 원할 때 언제든 집무실로 와도 된다는 말을 할 걸 그랬다.
“……물론이지.”
라크하의 대답에 델카인의 얼굴도 밝아졌다.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이라면 델카인의 진심을 들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크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서 빠르게 되물었다.
“델카인, 네 생각에는 조카가 생기면 어떨 것 같아?”
아이샤의 입장은 델카인을 통해 알게 됐다. 하지만 정작 델카인의 입장은 물어보지 못한 참이었다.
“조카? 음…….”
라크하는 델카인이 천천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델카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형과 형수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잖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델카인이 발그레해진 두 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워할 수 있지만, 아이샤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
“나중에는 본인이 더 신나서 매일 아이를 찾아갈지도 몰라.”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델카인이 기특하면서도 애틋했다.
“그래, 분명 아이도 기뻐하겠지.”
“아이샤를 감당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긴 해.”
라크하는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델카인의 걱정과 불안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너희가 사랑을 준 만큼 아이도 그럴 거야. 나와 메이아에게도 그러했듯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델카인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짧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런데, 형. 혹시, 형도 알고 있는 거야?”
“뭘?”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는 델카인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형수님 일을 알고 얘기한 거 아니었어?”
“메이아의 일이라니?”
라크하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메이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라크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델카인이 오자마자 메이아의 아이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던가.
‘설마 메이아가…….’
눈을 휘둥그레 뜬 라크하가 델카인을 바라보았다.
델카인이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어쩌면 형수님에게 축복이 찾아온 걸지도 모르겠어.”
***
그날 저녁. 입맛이 없었던 나는 저녁 식사를 거른다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왔다.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깨작거렸다간 델카인이 오늘 낮처럼 걱정할 게 뻔했다.
그렇게 홀로 방에서 오늘 배웠던 공작가의 실무를 되짚어 보려고 했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나는 놀란 표정으로 방문 앞에 서 있는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주로 라크하는 조금 더 늦은 시간에 찾아오곤 했다.
“업무가 일찍 끝나기도 했고, 그대가 저녁을 걸렀다고 하기에. 식사를 거르는 건 건강에 안 좋아.”
“그거 매번 제가 라크하에게 했던 소리인 거 알아요?”
뒤바뀐 상황에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걸 가장 잘 아는 그대가 식사를 거른다고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지.”
덩달아 미소를 지은 라크하가 내 코를 가볍게 톡 건드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빵과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오늘 낮에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고 들어서.”
“으음…… 입맛이 없어서요. 배도 별로 안 고프고…….”
내가 거절하자 라크하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살폈다.
“몸이 안 좋은 거야?”
“내일이 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조금이라도 먹는 게 어때? 빈속으로 있으면 오히려 더 속이 아플 수도 있어.”
라크하의 말마따나 내일 더 상태가 안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라크하가 준비해 온 빵을 집어 한 입 베어 먹었다.
입맛이 없었던 것치고는 빵은 생각보다 잘 넘어갔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라크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으음?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낮에도 잘 못 먹고, 저녁까지 걸렀던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걱정이 과하시네요. 누가 보면 제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줄 알겠어요.”
나는 라크하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라크하는 정곡에 찔린 사람처럼 움찔했다.
뭐야. 왜 저런 반응인 거야?
의아한 것도 잠시였다. 라크하가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내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만약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어떨 것 같아?”
“제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라크하와 저를 닮은 아이가 있다면, 정말 행복하고 좋을 것 같다고. 그런데 그건 또 왜 묻는 거예요?”
라크하의 진지한 표정에 무심코 대답하긴 했으나 당황스러웠다.
뭘 먹다 말고 갑자기 웬 아이에 관한 질문을 하는 거람?
그러다 뒤늦게 라크하가 왜 아이와 관련된 질문을 꺼냈는지 깨달았다.
내가 임신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구나.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에이. 아니에요. 오늘 낮에만 잠깐 속이 안 좋았던 거예요. 봐요. 지금은 괜찮은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찰이라도 받아 보는 게 어떨까?”
“내일도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진찰을 받아 볼게요.”
오늘 하루만 컨디션이 안 좋은 걸 수도 있지 않은가. 월경이 미루어지긴 했지만, 원래 규칙적인 편은 아니었다.
‘괜히 기대하고 싶진 않아.’
기대한 만큼 실망감이 클 테니까. 내일도 오늘처럼 비슷한 증상이 있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봐도 되는 일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아이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입안에 빵을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욱.”
별안간 빵이 비릿하게 느껴진 나는 헛구역질을 하며 황급히 입을 막았다.
분명 방금까지는 괜찮았는데…….
당황해서 눈을 멍하니 깜빡이고 있으니 라크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당장 의원을 불러야겠어.”
“하지만…….”
“임신한 게 아니더라도 건강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 진단을 받아 볼 필요는 있어.”
이번에는 나는 반대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라크하의 말마따나 내 몸 상태가 이상한 건 사실이니까.
문을 열고 나간 라크하가 사용인에게 의원을 불러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금 뒤 내 방을 찾아온 의원은 이미 몇 차례 내 건강을 살펴봐 준 적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의원은 허겁지겁 삐뚤어진 안경과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호출을 받고 급하게 달려온 듯했다.
“무,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내 아내의 건강이 염려되니 꼼꼼히 살펴봐줬으면 하는군.”
“예, 예. 알겠습니다.”
의원은 맥을 짚어 보더니 진료 도구를 꺼내 내 몸 상태를 살폈다.
의원이 진단을 내리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괜히 긴장되어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고개를 번쩍 든 의원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립니다! 공작부인께 새 생명이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