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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혹시……? (132/136)


외전 3. 혹시……?
2023.02.03.



“하아…….”

한창 검술 훈련에 매진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이샤는 훈련은커녕 사색에 잠겨 있었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다가도 한숨, 또 한숨. 아이샤의 한숨 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하아아아…….”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한숨을 쉬어대는 거야?”

옆에서 함께 훈련하고 있던 델카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샤는 바닥에 꽂아둔 검에 몸을 기대며 시큰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떤 기분이길래?”

“허전하고 뒤숭숭해. 잠도 충분히 자고, 꽃에 물도 줬고, 날씨도 좋은데 말이야. 아무래도 이상해.”

아이샤가 하늘을 바라보며 끙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나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잘 먹고 건강하지 않아?”

“그건 그렇네.”

아이샤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연무장 바닥에 앉았다. 덩달아 바닥에 앉은 델카인은 아이샤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부터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은데?”

“으음…… 사실 나도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를 모르겠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아이샤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없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끙끙대는 아이샤를 보며 델카인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형수님이 결혼한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언니가 결혼한 건 좋은 일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 예전처럼 언니가 떠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아이샤의 반응이 미심쩍었다.

눈을 가늘게 뜬 델카인의 등 뒤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음? 형수님이다.”

델카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아이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 멀리 풀잎 같은 연두색 드레스를 입은 메이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맑은 웃음을 지으며 기사들과 인사를 나누던 메이아가 쌍둥이들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이샤! 델카인!”

“언니!”

아이샤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메이아에게 달려갔다. 아이샤의 얼굴은 언제 침울한 얼굴로 있었냐는 듯 해맑았다.

손바닥 뒤집듯이 바뀐 아이샤의 표정을 보며 델카인은 혀를 찼다.


“딱 봐도 형수님 때문이네.”

그런데 어쩌면 좋으려나. 델카인은 고뇌에 빠졌다. 대충 아이샤가 왜 그러는지 짐작이 가는 이유가 한 가지 있었다.

비록 아이샤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델카인, 얼른 와. 같이 먹으려고 맛있는 거 싸 왔어!”

“너, 빨리 안 오면 내가 다 먹어버릴 거야!”

메이아와 아이샤의 부름에 델카인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뒤로 미루었다.


“지금 갈게!”

뭐, 아직은 괜찮겠지. 아직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으니까.

델카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메이아와 아이샤에게 달려갔다.

***



“짜잔. 내가 아이샤랑 델카인을 위해서 직접 준비해 왔지!”

나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준비해 온 도시락과 채소 주스를 꺼냈다. 내 양옆에 앉은 쌍둥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벌렸다.


“헉. 너무 좋아! 내가 언니 도시락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맞아! 형수님 도시락은 일품이잖아.”

오늘 아침부터 시간 낸 보람이 있는 것 같네. 잔뜩 신이 난 쌍둥이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나저나 쌍둥이들과 함께 야외에서 식사하는 게 얼마 만이더라. 예전에는 종종 쌍둥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싸 와서 먹곤 했는데.

라크하와 결혼한 이후로 공작가의 실무를 익히느라 바빠 쌍둥이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


“부족하지 않게 싸 왔으니까 싸우지 말고 천천히 먹어. 알겠지?”

“응. 알겠어!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형수님.”

 

 
쌍둥이들은 순식간에 채소 주스를 비우고는 에그 샌드위치를 먹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맛을 못 봐서 조금 걱정했는데. 잘 먹는 걸 보니 다행히 맛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쌍둥이들이 먹는 모습을 뿌듯하게 보고 있던 그때, 델카인이 의아한 얼굴로 질문했다.


“형수님은 안 먹어?”

“응? 난 괜찮아. 속이 조금 더부룩해서.”

아침에 간단한 군것질을 해서 그런 걸까. 그다지 입맛이 없었다.

사실 쌍둥이들이 먹는 걸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기도 하고.

하지만 델카인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내가 신경 쓰이는 건지 계속해서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델카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채소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으음?”

내가 알던 채소 주스 맛과 달랐다. 당근 향이 이렇게 많이 날 리가 없는데…….

어쩐지 역하게 느껴지기까지 해서 나는 주스를 내려놓았다.

채소를 싫어하는 아이샤는 이걸 어떻게 먹은 거람.


“아이샤. 주스 맛이 이상하진 않았어?”

“아니. 엄청 맛있었어. 역시 언니 솜씨는 어디 안 간다니까.”

속이 더부룩해서 내가 착각한 거려나.

의구심이 든 나는 다시 채소 주스를 집어 들려다가 멈칫했다. 또다시 마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떨떠름한 얼굴로 입맛만 다시고 있자, 델카인이 내 채소 주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형수님. 이거 내가 마셔도 돼?”

델카인이 더 마시려고 하는 걸 보니 정말 맛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역시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착각한 걸지도. 요즘 실무를 배우느라 무리하기도 했으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델카인에게 채소 주스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그걸 받은 후로도 델카인은 연신 내 눈치를 보았다.


“델카인. 할 말이라도 있어?”

“형수님. 혹시…….”

말끝을 흐린 델카인이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와. 너 때문에 언니 화나겠다.”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대화에 끼어든 아이샤가 한 말에 델카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샤는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일급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참고로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 중 첫 번째가 말을 하다가 마는 거래.”

“두 번째는 너처럼 매번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거겠네.”

“세 번째는 너처럼 재수 없는 거야!”

“네 번째는 너처럼 말을 함부로 하는 거지.”

“이익! 다섯 번째는……!”

……별안간 웬 토론이람. 나는 당황해서 입을 벌린 채 쌍둥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에 대한 주제로 느닷없이 시작된 토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보였다.


“일, 일곱 번째는…… 그러니까…… 일곱 번째는 말이지…….”

아이샤는 제 머리를 붙잡으며 끙끙거렸다. 여유롭게 받아치는 델카인과 달리 아이샤는 꽤 힘들어 보였다.

아이샤 할 수 있어! 어느새 방청객이 된 나는 눈빛으로 아이샤에게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이샤에게 한계는 있었다.


“……내가 졌어.”

“수고했어. 아이샤.”

아이샤치고는 델카인의 상대로 이 정도면 선방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이샤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순식간에 도시락을 비워버렸다. 그렇게 어수선한 식사가 마무리됐다.


“얘들아. 잠시 시간을 내서 온 거라 이만 가볼게.”

오후에는 시롬에게 사용인들을 어떻게 통솔해야 하는지 배우기로 한 참이었다.

아이샤는 나를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칭얼거렸다.


“요즘 밥 먹을 때 빼고는 언니 얼굴도 잘 못 보는 것 같아. 아침, 저녁으로는 오빠랑 지내고. 오후에는 시롬이랑 같이 있잖아.”

“미안해. 아이샤. 그래도 이제 실무가 익숙해져서 오늘처럼 조금씩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아이샤는 천금이라도 얻은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좋은 건지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델카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표정이 더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델카인.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번엔 델카인이 나한테 옮았나 봐! 원래 언니가 오기 전까지는 내가 계속 기분이 안 좋았었거든.”

“무슨 전염병도 아니고 옮을 리가 없잖아.”

델카인은 시큰둥하게 답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형수님. 검술 훈련을 했더니 피곤해서 그래.”

“언니가 오기 전까지는 멀쩡했으면서.”

“티를 안 냈던 거지.”

델카인이 티를 내는 아이는 아니지 않나? 식사할 때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델카인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유를 물어볼 새도 없었다.


“아, 피곤해. 검술 훈련은 이 정도로 하고 방에 가서 쉬어야겠다.”

델카인은 나와 아이샤에게 인사하더니 나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것 같은 델카인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복도를 걷던 델카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쉬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응? 난 괜찮아. 속이 조금 더부룩해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채소 주스의 맛이 이상하다고 했던 것도.

메이아의 증상을 보는 순간, 델카인은 문득 이전에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결혼과 가족, 그 중요성에 관하여.’라는 책이었던가? 대부분은 결혼과 가정에 대해 적혀 있었지만…….

‘아이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지.’

임신했을 때 산모가 입덧 때문에 식사하기가 힘들어진다는 내용이 자꾸만 생각났다.


‘혹시 형수님도……?’

물론,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샤 때문일까.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

만약 형수님과 형 사이에 아이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아이샤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 써야 하는 점이 많아진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 아이샤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단 소리부터 내지르고 보는 그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불가능하다. 절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델카인은 누구보다 아이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더욱 마음은 심란해졌다.

자신이 얘기한다고 해서 들을 고집이었다면, 이런 고민은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어떻게 하지.’

한참을 고민하던 델카인이 이내 고개를 치켜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선택지는 몇 가지가 되지 않았다.

아이샤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정해져 있으니.


“형이랑 얘기해 보자.”

델카인은 복도 저편에 있는 라크하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아직 메이아가 임신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일어날 일이야.”

사이가 좋은 부부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건 즉, 지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또 이 문제를 마주하게 될 거란 말과도 같았다.

***

똑똑-

집무실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던 라크하가 갑자기 들리는 노크에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나야, 형.”

라크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델카인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특히나 업무 시간 중에는 더더욱.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메이아와 관련된 일이었다.


‘메이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휘몰아쳤다. 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뗀 라크하가 천천히 읊조렸다.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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