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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우리의 앞날 [완결] (129/136)


129. 우리의 앞날 [완결]
2023.01.23.


나는 발목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 내 방에 갇히다시피 지냈다.

하지만 매일같이 나를 보러 오는 쌍둥이들과 라크하 덕분에 지루하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 몸을 완전히 회복했을 때 즈음, 레이나가 찾아왔다.


“메이아 님. 무사히 깨어나셔서…… 흐윽. 죄송해요.”

레이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리며 연신 사과를 건넸다.

레이나의 소식은 이미 라크하를 통해 들은 참이었다. 녹스에게 당해 쓰러진 내 소식을 듣고 무척 미안해하고 있다고.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레이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제가 전에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요?”

“죄송…… 죄송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렇죠. 아직 마음이 안 좋으실 텐데,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 감사한걸요.”

데미안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레이나에게 큰 충격이었을 테니까. 레이나는 훌쩍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조금 괜찮아졌어요. 감사하게도 폐하께서도 많이 위로해주셨고요.”

“황제 폐하께서요? 그럼 설마…….”

키네스도 데미안이 실은 레이나의 동생이란 걸 알게 된 건 아니겠지?

나는 차마 데미안을 언급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레이나는 내 뒷말을 알아들었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 일 이후로도 계속 입궁해야 하다 보니 숨길 수가 없더라고요.”

“네에?!”

그걸 말했다고? 데미안은 어떻게 보면 황실을 습격하려고 했던 반역자나 다름없는데?

아니, 그전에 녹스를 소환한 대역죄인이잖아.

데미안이 아드리엔 남작가의 사람이었다는 게 밝혀졌을 때 그 책임은 피하기 어려울 거였다.


“그, 그러고 나서 별일은 없었나요?”

“사정을 들으시더니 선처를 해주셨어요. 앞으로 제가 매일 입궁하는 게 벌이라고 하시면서요.”

그거 벌…… 맞지? 키네스의 대처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저, 정말 다행이네요!”

“그렇죠?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폐하께서는 정말 자애롭고 다정하신 것 같아요.”

레이나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볼을 긁적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키네스와 레이나의 사이도 나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두 사람의 사이만은 원작대로 흘러가고 있구나.’

원작보다 진도는 느리지만, 걱정은 없었다. 원작 속에서의 두 사람은 워낙 사랑했던 사이였으니까.

나는 속으로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

황금새가 메이아 방과 이어진 테라스 난간에 포르르 날아와 앉았다. 메이아를 만나러 온 테리투스였다.

테라스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려던 테리투스는 멈칫했다.

갑작스럽게 메이아의 방으로 들이닥친 쌍둥이들 때문이었다.


“언니! 우리 온실 정원에 가자!”

“형수님. 이제 발목 괜찮은 거 맞지?”

“응. 물론이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테리투스는 묘한 기분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메이아와 쌍둥이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첫 만남이 유쾌하지 않던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친해질 줄이야.

사실 처음에는 무척 걱정됐었다. 운명을 벗어난 메이아가 어떤 행동을 할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메이아는 저 아이들의 운명까지 바꿔놓았다.

그뿐이랴.


“나까지 바꾸었지.”

제르디아의 후계를 마지막으로 인간을 평등하게 사랑하려고 했는데.

어느 한 인간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생기면, 세상의 흐름에 참견하고 싶어지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래서 테리투스는 메이아의 운명을 바꾸는 데 개입한 이후로 잠시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녹스에게 당해 망령들의 악몽 속에서 헤맬 메이아를 도와주고 싶을까 봐.


‘메이아라면 이겨낼 걸 알고 있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있긴 힘들단 말이지.’

유독 아끼는 아이에게는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을 참기는 늘 어려웠다.

그 탓에 테리투스는 더는 현신해서 메이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아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나누려고 했더니만.”

역시 개입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물끄러미 메이아를 바라보던 테리투스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날아올랐다.

메이아를 위한 축복의 말을 남기고서.


“네가 선택하는 일의 끝에는 늘 행복이 있길 바라마.”

 

***



“형수님은 무리하면 안 되니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응? 아냐. 괜찮아.”

“맞아! 언니 앉아 있어!”

함께 온실 정원을 걷고 꽃을 가꿀 생각을 하며 왔던 나로서는 조금 얼떨떨했다.

하지만 아이샤와 델카인은 어떻게든 나를 의자에 앉혀둘 생각인 듯했다.

결국, 나는 더 거절하지 않고 쌍둥이들이 마련해준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쌍둥이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온실 정원을 쭉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더 화려한 것 같네.”

뭐 평소에도 예쁜 곳이지만.

유리로 감싸진 온실 정원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부서지듯 쏟아 내리는 한 줌의 햇볕, 그리고 갖가지의 초목, 흐드러지게 핀 꽃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아이샤가 어떻게 가꿨을지 눈에 훤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좋다.”

따스한 공기와 얼핏 들려오는 쌍둥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이 한적함과 평화로움. 어느 무엇 하나도 빠질 것 없이 좋았다.

라크하도 함께 온실 정원으로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금 한창 일하느라 바쁘겠지.’

이따금 내가 공작가의 업무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긴 했다. 바쁜 라크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최근에 라크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봤었다.
 


-가능하다면 저도 한번 공작가의 실무를 배워봐도 될까요……?


-잠깐. 그 얘기는 뒤로 미루도록 하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라크하는 몹시 당황해하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그때 라크하가 왜 그랬던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곰곰이 라크하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아이샤와 델카인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언니!”

“형수님!”

뭘 하다 온 건지 쌍둥이들의 신발과 옷은 흙투성이였다. 내 앞에 선 쌍둥이들은 잔뜩 들뜬 얼굴로 각자 무언가 내밀었다.


“……화관이랑 꽃다발?”

“응! 델카인이랑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전에는 꽃목걸이가 됐지만…… 이번에는 형수님한테 딱 맞을걸?”

이런 깜짝 선물을 준비하려던 거였구나. 날 위해 화관과 꽃다발을 만드느라 꼼지락거렸을 쌍둥이들을 생각하자니 기특했다.

안 그래도 내가 없는 동안 아이샤가 꽃다발을 만들어서 가져다줬다고 들었는데.

나를 신경 쓰고 생각해주는 쌍둥이들의 마음씨에 가슴이 뭉클했다.


“고마워, 얘들아. 정말 마음에 들어.”

나는 머리 위로 화관을 쓰고 꽃다발을 든 뒤 쌍둥이들을 보며 활짝 웃었다.


“어때? 잘 어울려?”

“엄청 잘 어울려! 그, 뭐더라 신…… 신…….”

아이샤가 어떤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듯 눈살을 찡그리더니 델카인을 힐끔거렸다.

델카인의 눈치는 왜 보는 거지? 의아할 때 즈음, 아이샤가 크게 탄성을 터트렸다.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깨달음을 담은 탄성이었다.


“그렇지! 신부 같아!”

“시, 신부……?”

“정말이네! 그래서 말인데, 형수님. 형이랑 결혼은 언제 해?”

“겨, 결호온?”

예상치 못한 쌍둥이들의 발언에 둔탁한 망치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 울렸다.


“언니는 오빠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

아이샤가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아이샤가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라크하와 결혼할 거냐고 물었었던가?

그 당시의 나는 라크하와의 결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어서 애매하게 답했었지.


‘라크하와 하는 결혼이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사실 라크하에 대한 내 마음을 알게 된 이후로 결혼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라크하를 사랑하고, 라크하와 행복한 순간을 앞으로도 만들어가고 싶긴 하니까.

대단치 않은 일상이 이어지더라도 라크하와 함께한다면, 아름답고 행복할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쌍둥이들의 힐끔 바라보았다. 내가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화관과 꽃다발을 준비해온 것도 결혼 얘기를 꺼내려던 속셈이었겠지.’

요 녀석들. 이제 내 손바닥 안이라고. 귀여우면서도 은근히 괘씸한 쌍둥이들의 행동에 문득 장난기가 솟았다.

어디 한 번 장난을 쳐볼까?


“글쎄……. 결혼은 조금…… 그렇지?”

“…….”

“…….”

쌍둥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꽤 당황한 듯한 쌍둥이들을 보며 속으로 킥킥 웃던 때였다.


“그럼 오빠 청혼은 실패인 거야……?”

“아이샤. 눈치 좀 챙겨!”

청혼 실패라니? 의아하던 것도 잠시, 나는 쌍둥이들의 시선이 내 뒤를 향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는 라크하와 눈이 마주쳤다.


“……라크하?”

평소보다 옷을 차려입은 라크하가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만약 라크하가 전부 들은 거라면 오해를 풀 필요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어요?”

“내가 그날…… 얘기를 뒤로 미뤄서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라크하의 입에선 내 질문과 관련 없는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는 얼떨떨해서 눈을 멍하니 깜빡이며 되물었다.


“네? 그날 얘기라뇨?”

“공작가의 실무를 배워봐도 되냐고 말했던 날. 그대도 용기 내서 공작부인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둘러 말했을 텐데…….”

“…….”

“그대의 마음을 무시하려던 게 아니었어.”

지금 내가 뭘 듣고 있는 걸까. 당황스러운 나머지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늘 하루 연속으로 머리를 여러 번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저 제대로 청혼하려고 대화를 미뤘을 뿐인데…… 내가 늦은 걸까.”

라크하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제 손에 있는 작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유리온실이 유독 화려했구나.

쌍둥이들이 기대에 들떠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런 쌍둥이들을 놀려보려다가 상황이 이렇게 어긋날 줄이야.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 심장은 청혼이라는 말에 방정맞게 뛰어댔다. 나와 라크하의 마음이 같다는 의미였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결심을 다잡은 뒤 라크하를 바라보았다.


“안 늦었어요. 저도 앞으로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지금 그게 무슨…….”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에요.”

나는 굳어 있는 라크하를 향해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게 제 진심이에요.”

멍하니 나를 마주 보던 라크하가 눈꼬리를 휘어 웃더니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후회는 없겠지?”

“네. 제가 선택한 거니까요.”

물론, 힘든 순간이 다가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행복해지지 않았던가.

저기 조그만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우리 말썽꾸러기 쌍둥이들의 시터가 된 것도.

아인티아에 남아 있기로 한 것도. 그리고…….


“사랑해. 메이아.”

“저도 사랑해요.”

라크하를 사랑하기로 한 것도. 모두 내가 선택했고, 그 결과 지금의 나는 행복했다.

그러니 분명 앞으로도 분명 행복할 거라고 믿었다.

오늘따라 한낮의 햇빛이 유난히 찬란하고, 눈부셨다. 마치 우리의 앞날을 비춰주듯이.


 
<집착 흑막들의 시터가 되어버렸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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