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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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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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2023.01.20.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나는 눈을 반짝 떴다. 시야가 어두컴컴하고 흐릿한 가운데 내 방 천장이 보였다.
“…….”
이상하게도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눈부신 석양빛과 코끝에 맴도는 은은한 꽃향기,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는 이불의 감촉까지도.
그제야 내가 현실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보았다.
하지만 팔과 어깨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녹스에게 다친 어깨가 아직 다 안 나은 건가?’
아프다는 느낌은 안 드는데…… 몸이 왜 이렇게 뻐근한 건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킨 나는 내 어깨를 살폈다. 어깨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메이아……?”
나를 부르는 라크하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석양빛이 들어오는 창가 쪽에 라크하가 서 있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부르는 라크하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서 나는 넋을 놓고 라크하를 응시했다. 붉은 노을을 등지고 서 있는 라크하는 꿈에서 봤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런데 어째서 라크하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라크하.”
잔뜩 잠긴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목구멍이 꺼끌꺼끌하고 갈라진 느낌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몸은 뻐근한 데다가 목은 바싹 마르고…… 몸 상태가 왜 이렇게 엉망인 거야?
한참 동안 굳어 있던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으음…….”
의아한 마음에 손목과 발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때였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라크하가 나를 꽉 껴안았다.
“앗.”
그리웠던 라크하의 체향이 물씬 풍겼다. 언제 맡아도 편안해지는 향기였다.
지금까지 닿고 싶어도 닿질 못했는데. 가슴이 간질거리고 벅차올랐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뻗어 라크하를 마주 안았다.
그러다 나를 끌어안은 라크하의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라크하?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대가 영영 깨어나지 않는 줄 알았어.”
라크하의 목소리는 푹 잠겨 있었다.
문득 위화감이 든 나는 멈칫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영영 깨어나지 않는 줄 알았다니?
의구심이 들었으나 나는 그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대신 라크하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저 여기에 있어요.”
“지금도 이게 꿈이 아닐까 싶어서…….”
“라크하.”
라크하의 품에서 나온 나는 두 손을 그의 양 뺨에 대고 내게로 살짝 당겼다.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라크하의 피부가 거칠고 눈 밑이 퀭했다.
어쩐지 나 때문에 라크하가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 속상했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꿈이 아니니까 표정 풀어요. 전 라크하가 웃는 모습 보고 싶은데.”
“꿈이…… 아니라고?”
멍하니 중얼거린 라크하가 내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는 쥐었다 폈다.
라크하는 내 존재를 확인하는 듯이 몇 번이나 그 행동을 반복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라크하를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건가요?”
“……일주일 정도.”
“네……?”
일주일이라고?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짧게 들이켰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왜 이렇게 오래…… 말도 안 돼.”
어쩐지 오래 잠들었다가 일어난 기분이라더니. 당황스럽다 못해 혼란스러웠다.
분명 부상이 크지 않았으니 의식을 잃었어도 길어봤자 하루, 이틀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대 왼쪽 어깨에 검게 물들어 있는 것 때문인 것 같다고 하더군.”
왼쪽 어깨라면 내가 녹스에게 당했던 부위였다.
녹스 역시 금기의 흑마법으로 소환된 마물이었다. 어쩌면 그 영향을 받은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자니 조금 머릿속이 정리됐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어깨를 확인했을 때는 분명…….
“어깨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뭐?”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라크하가 되물었다. 나는 잠옷 단추를 두어 개를 풀어 라크하에게 내 어깨를 보여주었다.
“여기, 아무것도 없죠?”
“그럴 리가…….”
라크하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내가 잡을 새도 없이 성큼성큼 방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의원을 불러와.”
***
“어…… 음, 의학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현상이긴 합니다만…… 예. 말끔하십니다.”
의원은 라크하가 두려운 건지 연신 그의 눈치를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나는 그런 의원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하긴 라크하가 매서운 눈빛을 쏘아대고 있으니 떨릴 수밖에 없겠지.
“식사는 부드러운 수프 위주로 드시고요. 기력 회복에 좋은 약도 챙겨드리겠습니다. 식후에 드시면 됩니다.”
의원은 분홍색의 물약을 여러 개 챙겨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의원이 오기 전에 간단히 식사를 끝낸 참이었는데.
“그럼 지금 바로 복용하면 되는 건가요?”
“예.”
좋아. 얼른 체력을 회복해야지. 분홍색이니 딸기 같은 맛이 나려나?
대충 맛을 예상하며 망설임 없이 입에 털어 넣은 순간, 입안을 가득 메운 쓴맛에 헛구역질이 튀어나왔다.
“우욱.”
“메이아!”
단숨에 내 곁으로 다가온 라크하가 내가 뱉어내는 걸 받을 것처럼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괜찮…… 우욱.”
쓸수록 건강에 좋다는 말은 있지만…… 아니, 이건 조금 심하잖아. 내가 먹어본 쓴 음식 중에 단연코 1등인 것 같다.
말도 잇지 못할 정도로 헛구역질이 계속 튀어나왔다.
라크하가 살벌하게 의원을 노려보자, 의원이 서둘러 내게 사탕을 내밀었다.
“이, 이거라도 드시겠습니까?”
나는 거절하지 않고 사탕을 받아 곧바로 입에 넣었다. 달콤한 레몬 맛이 혀끝을 감도니 다행히 헛구역질이 멈췄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 서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의원의 얼굴은 더욱 파리해졌다.
“바, 발목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무리한 운동은 금하시고요.”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의원은 허리를 숙인 뒤 후다닥 방에서 나갔다.
다시 방 안에 라크하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내 옆에 앉은 라크하는 내 상태를 살피듯 천천히 나를 훑어보았다.
“또 어디 안 좋은 곳은 없어?”
“네. 너무 멀쩡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여도 될 정도인걸요. 회복력이 좋은 걸 보니 제가 나름 신의 딸은 맞나 봐요.”
나는 라크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배시시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여전히 라크하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라크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반대로 라크하가 녹스에게 당해 일주일 동안 의식이 없다가 깨어나기라도 했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싹했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을 때 의원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도 계속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으음…… 많이 걱정하셨죠?”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라크하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라크하가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어요.”
“……그대를 지켜준다고 해놓고 매번 늦어서.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채고 빨리 왔다면, 그대가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라크하의 목소리와 눈빛에 짙은 죄책감이 묻어나왔다.
라크하의 과거를 떠돌면서 질릴 정도로 보고 듣던 것들이었다.
또다시 저런 표정을 짓는 라크하의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괜히 내가 다시 그를 힘들게 만든 것 같아 속상했다.
나는 라크하의 손을 꼭 잡으며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과거의 라크하에게도, 지금의 라크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라크하. 저는 지금 당신의 곁에 있는걸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죄책감은 이만 내려놓아요.”
스스로를 옥죄고 있던 모든 짐을, 죄책감을. 전부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나는 라크하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힘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도 라크하는 순순히 내게 이끌려왔다.
“쌍둥이들도 저랑 같은 생각일 거예요. 라크하가 저희를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나는 라크하의 눈가에 살짝 입을 맞추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이었다. 커다란 손이 내 뒷머리를 감싸더니 얼굴이 다시 가까워졌다.
“그거 알아?”
라크하가 내 손을 제 입가에 가져다 대고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내 검지를 가볍게 깨물었다.
치아의 뭉툭함만 느껴질 정도로 약한 힘이었으나,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대는 정말…… 여러모로 날 미치게 해.”
순식간에 입술이 조급하게 겹쳐졌다. 뜨겁게 젖은 숨결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입안을 헤집었다.
여린 살결이 입안에 감돌던 달달한 레몬 맛을 부드럽게 훑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때론 거친 움직임에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
끼익. 라크하가 침대 위로 올라오며 시트가 작게 출렁였다. 단단한 손이 내 허벅지를 움켜쥐며 몸이 바짝 붙었다.
다른 손으로는 내 등을 받친 라크하가 입술을 겹쳐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그는 그동안 굶주렸던 갈증을 달래려는 듯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점령해 나갔다.
입안 곳곳을 가득 채운 달콤함 때문일까. 정신이 몽롱하고 아득해졌다.
뒤엉켰던 숨결이 멀어지고,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새는 없었다.
“그래서 그대를 더더욱 놓을 수가 없어.”
보라색 눈동자에서 진득한 갈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뜨겁게 젖은 숨결이 귓바퀴를 지나 목덜미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불에 덴 것처럼 열기가 감돌았다.
라크하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잠옷 단추를 건드렸다. 단추는 손쉽게 열렸다.
하지만 맨 어깨가 드러난 순간, 그의 손짓이 멈추었다.
내 왼쪽 어깨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또다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불안, 두려움, 초조함.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으로 뒤섞인 보라색 눈동자를 보며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또 나쁜 생각한다.”
조심스럽게 라크하를 끌어안은 나는 그의 넓은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저는 괜찮다니…… 읏.”
왼쪽 어깨에 닿는 촉촉한 느낌에 옅은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호흡이 살갗에 달라붙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인데.
라크하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여린 살을 살짝살짝 깨물었다.
오싹한 전율이 흐르고 어깨에는 울긋불긋한 자국이 새겨졌다.
마치 내 어깨에 남아 있었던 검은 상흔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는 듯이.
제 흔적으로 가득 채운 후에야 라크하의 입술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살결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있는 탓에 그의 숨결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괜찮다는 말 대신 할 말은 없어?”
그가 어떤 말을 원하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 역시 줄곧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나는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한 번만 더.”
“사랑해요. 라크하.”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매혹적인 미소를 지은 라크하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이어진 키스는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럽고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