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127/136)


127.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
2023.01.16.



 
검은 덩어리들이 계속해서 내 몸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발버둥을 치려고 했으나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라크하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지?

처음 겪어보는 감각에 공포심이 들었다.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눈을 질끈 감고 얼마나 오랫동안 꿈이라고 되뇌었을까.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대체 그이는 언제 풀어줄 건가요?”

“당신이 그딴 요구를 할 처지야?”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어쩐지 익숙한 풍경이 나를 반겼다.

만약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곳은 라크하의 집무실이 틀림없었다.

몸도 이전과 달리 자유롭게 움직여졌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지? 어딘가 익숙한 듯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럼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아들을 낳았고, 이제 라크하는 스스로 제 앞가림도 할 줄 알아요.”

“아인티아의 이름을 달고 태어나서 흑마법 하나도 제대로 못 쓰는 하자품으로 뭘 하라는 거지?”

나는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고 있는 남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저 사람들이 선대 아인티아 공작 부부인 것 같은데…….

이게 꿈인 건지, 현실인 건지 혼란스럽던 때였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아이와 눈이 마주친 나는 한눈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라크하?”

어린 라크하가 문틈으로 살벌하게 다투고 있는 제 부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라크하의 과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약속했던 것과 다르잖아요!”

“하자품 같은 건 내 아들이라 할 수 없는데 뭐가 다르다는 거지?”

저런 사람들이 정말 라크하의 부모라고? 아니, 부모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라크하, 듣지 마.”

하지만 내 목소리도, 내 모습도 보이지 않는지 라크하는 미동이 없었다.

그저 잔뜩 상처를 받은 듯한 눈으로 그 자리에 목석같이 굳어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아파서라도 그 모습을 도무지 바라볼 수 없었다. 라크하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던 그 순간이었다.


“헉……!”

땅에서 솟아오른 검은 덩어리가 내 발목을 잡고 쑥 아래로 당겼다.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더니 이내 나는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두 볼이 움푹 들어간 공작부인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어린 라크하의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라크하. 네 아빠 앞에서도 흑마법을 써보렴. 쓸 줄 알잖아. 응?”

“……싫어. 그럼 엄마는 다른 아저씨랑 도망갈 거잖아.”

“너…… 그래서 흑마법을 안 쓰고 있었던 거니?”

초점이 엇나간 눈은 얼핏 봐도 소름이 끼쳤다. 전혀 제 아들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라크하가 뒷걸음질 치자, 공작부인이 라크하의 어깨를 세게 붙들고 언성을 높였다.


“엄마를 위해 그것도 못 한다는 거야?”

“아, 아파.”

저, 미친. 상상을 초월한 행동에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당장이라도 라크하와 공작부인의 사이를 갈라놓고 싶었다.

하지만 검은 덩어리가 여전히 내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그만해! 애한테 뭐 하는 짓이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역시나 닿지 않는 듯했다.

내가 개입하려고 할수록 검은 덩어리는 내 행동을 더욱 옥죄더니 기어코 입까지 막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공작부인은 끝까지 라크하를 몰아붙였다.


“빌어먹을 아인티아 같으니라고! 너도 똑같은 족속이구나. 어쩐지 네 아빠를 닮은 눈만 보면 소름 끼친다고 했는데……!”

“저는 그냥 어머니께서 계속 곁에…….”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이가 죽을 거라고!”

“마님! 진정하세요!”

방안이 소란스러워지자 뒤늦게 하녀들이 뛰쳐 들어와 공작부인을 말렸다.

공작부인은 하녀들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끝까지 라크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저게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라니.

그리고 5, 6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겪어야 할 상처라니.


“……흐윽.”

공작부인이 자신을 붙잡고 윽박질러도 울지 않던 라크하는 혼자가 되고 나서야 눈물을 흘렸다.


“나도…… 사랑받고 싶어.”

하지만 그마저도 참아내려는 듯 숨죽여 우는 모습에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울고 싶을 땐 실컷 울어도 돼.’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데, 목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끔찍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검은 덩어리는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아우, 우우.”

한쪽 구석에 작은 요람에서 아기의 옹알이가 들려왔다. 어쩐 일인지 검은 덩어리는 나를 옭아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두 개의 요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우우.”

오른쪽에 있는 요람에 있는 아기가 발버둥을 치며 또다시 옹알거렸다.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아기였다. 처음 보는 아기였으나,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샤.”

“아아?”

아이샤가 내 부름에 답하듯 말간 눈을 깜빡였다. 반면, 바로 옆에 있는 요람에 있는 델카인은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쌍둥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행복은 찰나에 불과했다. 공작부인이 요람 앞으로 걸어왔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공작부인은 이전보다 더 핼쑥해져 있었다.


“너희들은 나와 네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겠지?”

섬뜩한 미소를 지은 공작부인이 기괴한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요람을 흔들었다.

여전히 공작부인은 제 아이를 수단과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쌍둥이들과 라크하의 과거라면 쌍둥이들을 당장 빼내서라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겠지. 분명 내가 무얼 하려고 한다면, 검은 덩어리들은 내게 달려들 테니까.


“마님! 도련님께서 또 사라지셨습니다! 오늘 공작님께서 흑마법을 지도하시는 날인데, 저택을 전부 뒤져봐도 없어요!”

그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하녀가 불안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자품 같으니라고.”

공작부인은 낮게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크하를 향한 공작부인의 호칭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 아들을 하자품이라고 부르고 싶을까.

복잡한 마음으로 공작부인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옷장 문이 열렸다.

옷장에서 나온 사람은 어느덧 소년이 된 라크하였다. 이전과 달리 라크하는 좀 더 씩씩하고 단단해 보였다.


‘라크하는 외롭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씩씩하게 살아왔구나.’

혼자서 치열하게 살아왔을 라크하를 생각하니 기특하면서도 애처로웠다.


“갔겠지……?”

라크하는 잔뜩 경계 어린 눈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내 옆에 섰다.

그러고는 쌍둥이들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두 볼을 붉힌 채 쌍둥이들을 내려다보기만 하던 라크하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너희들만큼은 내가 지켜줄게. 나처럼 힘든 일이 없게 해줄게.”

라크하도 아직 보호받아야 할 나이면서.

한창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해야 했을 나이였다.

분명 스스로를 챙기는 것도 벅찰 텐데 라크하는 쌍둥이들을 지켜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졌다.


“아이샤, 델카인. 앞으로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야.”

 

 
라크하의 다정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또 장면이 바뀌었다.

조금 더 성장한 라크하가 집무실에서 공작과 마주하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아이샤와 델카인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크하. 규칙을 어긴 건 너다. 분명 아이샤와 델카인에게 따로 접근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저 창가에 꽃을 두고 왔을 뿐입니다!”

“접근했다는 사실은 변치 않지.”

쿵,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라크하의 과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라크하에게 들었던 과거와 비슷했다. 쌍둥이들을 빌미로 라크하를 이용하는 공작의 모습이.

입술을 달싹이던 라크하는 결국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직 아이샤와 델카인은 4살입니다. 마물을 처리하는 수업 과정은 이릅니다.”

“델카인은 몰라도 아이샤는 충분히 그 정도 역량이 되는데 미뤄야 할 이유는 없지.”

“어제 아이샤가 다쳤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역량이 된단 말입니까?”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

“쯧. 네가 데미안의 반만 닮았어도. 꼴 보기 싫으니 나가거라. 그리고 일주일간 방에서 근신하도록.”

정말 라크하의 과거라면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현실에 속이 울렁거렸다.

검은 덩어리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다른 장면을 보여주었다.

어두운 서재에서 라크하가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책을 살펴보고 있었다.


“금기의 흑마법은 사람을 제물로 바쳐 만든 마법이기에 사용한다면, 희생된 사람들의 저주와 망령이 깃든다…….”

문득 심장에 서늘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금기의 흑마법 때문에 라크하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가.

잠도 제대로 못 잘뿐더러, 차후엔 선대 공작에게 금기의 흑마법을 쓰고 라크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됐었다.


‘라크하. 금기의 흑마법은 안 돼!’

하지만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마법을 쓸 줄만 안다면…….”

라크하를 말리려던 그때, 검은 덩어리는 나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눈앞에 라크하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느 한 장면에도 머물지 못하고 몸이 한없이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라크하가 선대 공작에게 금기의 흑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말려야 하는데……!

어떻게든 그 일을 멈추기 위해 발버둥을 쳤으나 검은 덩어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놔! 놓으라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라크하의 과거 속으로 손을 뻗은 그 순간이었다.


“윽!”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 나는 바닥을 굴렀다. 검은 덩어리는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검은 덩어리가 다시 나를 끌어당기기 전에 서둘러 주변을 살펴보았다.

라크하가 침대에 앉아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어떠한 생기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공허하게 중얼거리는 라크하의 말을 듣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아, 이미 라크하가 선대 공작 부부에게 금기의 흑마법을 쓴 이후구나.

메마른 눈빛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했다.


“라크하…….”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온 그 순간이었다.


“……!”

내 몸을 옭아매고 있던 검은 덩어리들이 일제히 라크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그러고는 지금껏 내게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검은 덩어리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라크하에게 속살거렸다.


[우릴 이용해서 네 부모를 쫓아내고도 멀쩡히 살 수 있을 것 같아?]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어? 네 동생을 데려가면 되려나.]

라크하는 고통스러운 듯 두 손으로 제 귀를 막았다. 마치 검은 덩어리들이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아…….”

별안간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작게 탄성을 흘렸다.

저 검은 덩어리의 정체가 금기의 흑마법에 희생된 망령일지도 몰랐다.

입술을 꽉 깨문 나는 라크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만해!”

지금껏 라크하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망령들에게 붙잡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라크하를 둘러싸고 있는 망령들을 하나둘씩 잡아 뜯었다.

하지만 망령은 계속해서 라크하에게 달라붙으며 저주를 퍼부었다.


[네가 동생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었잖아.]

“맞아. 나 때문에…….”

“아니! 라크하. 당신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니에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아요!”

라크하에게 닿지 않을 목소리라는 건 안다. 그런데 어떻게 보고만 있는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데. 무너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망령들은 라크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내가 좌절하고 슬픔에 잠기길 바라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떨어져! 이것들아!”

나는 어떻게든 라크하를 망령 속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망령을 뜯어냈다.

그러자 조금씩 라크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죽어.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넌 죽어야 마땅해!]

“그래……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아니! 그렇지 않아!


“살아도 돼! 아니, 살아요!”

순간, 라크하가 고개를 들더니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내 말이 들린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다해 라크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앞으로 행복한 일들만 가득할 테니까!”

내 손이 라크하의 몸에 닿은 그때였다.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망령과 어둠이 순식간에 걷혔다.

정적이 찾아왔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평화롭고 포근한 정적이었다.

이윽고 나를 반기고 있는 건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문이었다.

저 문을 통해 나가면, 깨어날 수 있는 걸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을 바라보며 머뭇거리고 있던 때였다.

문 너머로 애틋한 라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아.”

그 순간, 더는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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