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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사랑한다는 말 (126/136)


126. 사랑한다는 말
2023.01.13.


중년 여자가 토해낸 검은 액체가 꿀렁거리더니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게 녹스의 본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치며 녹스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직 움직일 힘이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녹스가 단번에 죽는 게 아니라면 곤란했다. 하필 조명탄의 빛은 이미 비 때문에 완전히 꺼진 참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갑자기 몸집을 키운 녹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중년 여자를 게걸스럽게 삼켰다.


“헉……!”

깜짝 놀란 나는 곧장 뒤돌아 달렸다. 다음 목표가 나라는 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너만은…… 죽이고 가겠다!]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녹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잡히면 죽는다! 죽기 살기로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던 것도 잠시였다.

등골이 쭈뼛 곤두서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흘끗 뒤를 쳐다본 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읏!”

하지만 한 박자 늦은 탓에 녹스의 팔로 추정되는 검은 덩어리가 어깻죽지를 스쳤다.

몸이 휘청였으나 나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다리를 움직였다.

검은 덩어리와 스친 어깨가 시렸으나 견딜 만했다.

게다가 본체가 무너지고 있는 탓일까. 검은 액체를 뚝뚝 흘리며 나를 쫓아오는 녹스의 속도는 이전만큼 빠르지 않았다.

그 덕에 조금씩 거리는 벌어지고 있었지만 도망치기 벅찬 건 매한가지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리고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설상가상으로 빗물이 눈앞을 가리고 옷을 적시면서 몸이 축축 아래로 처졌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조금만 더 힘을 내서 도망치면, 녹스는 사라질 거야.

나나 녹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추격전이었다.

녹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달리는데, 그만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악!”

하지만 아파할 여유는 없었다. 서둘러 땅을 짚고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아윽……!”

찌릿. 전류가 흐르듯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고통에 나는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식은땀이 흘렀다. 발목이 불에 덴 것처럼 욱신거렸다.

돌부리에 걸릴 때 발목이 심하게 접질린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고통을 참아가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 건데……!’

녹스의 본체가 이전보다 본체가 많이 무너져 있었다.

어떻게든 녹스와 거리를 두기 위해 나는 손바닥과 다리로 엉덩이를 밀어가며 뒤로 물러났다.

녹스에게 공격받은 어깨에서 통증이 밀려왔으나, 발목보다는 움직일 만했다.

하지만 녹스와의 거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는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걸 느낀 나는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녹스에게 겨누었다.


“오, 오지 마!”

[죽어…… 죽어!]

녹아내리는 몸을 이끌고 다가온 녹스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단도를 휘둘렀다.

무언가 썰리는 느낌이 나더니 녹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후두둑. 녹스의 본체를 이루고 있던 검은 액체가 내 몸 위로 떨어졌다.


“헉, 헉…….”

단도를 쥐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런 공격이 통할 줄이야. 예전의 녹스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내 몸통의 절반만 한 검은 덩어리가 어떠한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엎어져 있었다.


“죽은 건가……?”

나는 멀쩡한 다리로 검은 덩어리를 툭 건드려 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나는 안도했다.

그러고는 꺼림칙한 기분에 내 몸 위로 떨어진 진득한 액체를 손으로 털어냈다. 아니, 털어내려고 했다.


[이렇게는…… 못 죽어.]

꿈틀. 죽은 줄 알았던 녹스가 몸집을 크게 불리더니 나를 덮치듯 달려들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할 새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촤악-!

녹스의 몸이 완전히 반으로 베어졌다. 그 뒤로 잔뜩 흐트러진 옷차림의 라크하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라크하……?”

쏴아아. 비가 전보다 더 세차게 내렸다. 차가운 빗물이 살갗 위를 아프게 때려댔으나, 도통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라크하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다른 사람을 라크하로 착각하고 있는 걸까?

혹은 내가 죽어서 허상이라도 보고 있는 걸까?

그저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라크하가 나를 껴안았다.


“메이아, 늦어서 미안해.”

꿈이 아니라는 듯 그와 맞닿은 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는 손길 역시 선명했다.

나는 라크하의 뺨 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전보다 거칠어진 그의 뺨이 손끝에 느껴졌다.

아아, 꿈이 아니야. 녹스의 죽음도, 라크하도.


“……라크하,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메이아, 보고 싶었어.”

라크하가 제 뺨 위에 있는 내 손을 겹쳐 잡더니 그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안심해. 전부 다 끝났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되어 있던 몸이 풀리며 더없는 안도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정말 모든 게 끝났구나. 이제 정말 안심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덜덜 떨리며 눈앞이 흐릿했다. 점점 정신이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메이아?”

아직 라크하에게 해줘야 할 말이 있는데. 라크하가 돌아오면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려고 했는데.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가 내 정신을 아래로 쑥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메이아!”

나를 부르는 라크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마물이 수도 경계선을 습격한 날 민간인의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수많은 기사가 희생되었다.

몇백 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시대에 찾아온 참사였다.

그러다 보니 제국은 한동안 어수선했다. 시체를 수습하고, 마물에게 당해 죽은 사람들을 위한 추모식이 이루어졌다.


“제국을 위해 몸을 바쳤던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추모식은 며칠간 이루어졌다. 대신관을 비롯한 사제들은 밤낮 할 것 없이 유공자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라크하는 그 자리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함께 싸운 동료들을 위해 마음으로 건네는 예우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장례식에 참석한 라크하의 곁으로 키네스가 걸어왔다.


“아인티아 공작.”

“……얘기는 이미 끝나지 않았습니까.”

라크하는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공허한 눈으로 키네스를 바라보았다.

녹스와 데미안을 처리했고, 흑마법을 계승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더는 키네스와 할 얘기는 없었다.


“그 얘기를 하려고 붙잡은 건 아니야. 그보다 선대 공작의 일은 유감이네.”

선대 공작은 녹스가 사라지고 며칠 후에 별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사실 라크하로선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북쪽 숲 별장으로 보내던 샤키르의 꽃 공급이 끊긴 지 꽤 됐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선대 공작이 금기의 흑마법의 부작용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를 떠올린 라크하는 속으로 조소했다.

증오했지만, 나름 부모였다는 걸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괜찮습니다.”

“선대 공작부인은 황궁의 감옥으로 압송할 생각이다.”

“어떤 조치를 내리시든 상관없습니다.”

쌍둥이들도 선대 공작 부부가 돌아오질 않길 바라고 있으니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메이아 양은 아직 의식이 없나?”

“…….”

지금껏 무표정하던 라크하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입술을 살짝 깨문 라크하는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예, 아직 의식이 없습니다.”

라크하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메이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멨다.

메이아가 홀로 녹스와 대치했던 그날. 라크하의 품에서 의식을 잃은 메이아는 그 이후로 며칠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의원을 불러 봐도 다들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메이아의 어깨 위로 검게 물들어 있는 ‘무언가’ 때문일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깨어날 겁니다.”

메이아는 어느 상황이든 헤치고 이겨냈던 사람이니까. 그 믿음 하나로 라크하는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래. 곧 깨어나길 기원하지. 아드리엔 영애도 그렇게 전해달라고 하더군.”

라크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최근에 레이나 아드리엔, 이라는 이름으로 저택에 편지가 왔다. 키네스 때문인 듯했다.

[찰나의 제 욕심 때문에 메이아 님께서 다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죄송해요. 면목이 없어요.]

그 뒤로도 메이아의 건강을 염려하는 편지가 왔으나 라크하는 답장하지 않았다.

메이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메이아는 금방 깨어날 테니까.

라크하는 늘 자신을 보며 웃어줬던 메이아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

쌍둥이들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메이아의 방이었다.

메이아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야 쌍둥이들은 일과를 시작했다.

쌍둥이들은 수업을 듣고 난 뒤 어김없이 메이아의 방을 방문했다.


“언니, 나 오늘 예절 수업에서 칭찬을 받았어. 그 자리에 언니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형수님도 엄청 좋아했을걸. 아이샤가 요즘 예절 수업에 엄청 성실하게 참여하거든.”

주로 쌍둥이들이 꺼내는 얘기는 메이아가 들으면 기뻐할 법한 내용이었다.

비록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쌍둥이들은 메이아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얘기했다.


“오늘은 온실 정원에 다녀왔어. 아, 그러고 보니 언니. 나랑 온실 정원 가기로 한 거 알고 있지? 까먹으면 안 돼.”

아이샤가 메이아의 침대 맡에 있는 서랍 위로 보라색 꽃을 조심스럽게 내려두었다.


“이건 페셀티아 꽃이야. 꽃말은…… 음, 뭐였더라. 아! ‘행복’이래. 언니가 우리에게 행복을 줬듯이 언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이샤는 수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우리가 행복하게 해줄게! 그래서 델카인은 오늘 책도 들고 왔어!”

“맞아. 형수님이 심심하지 않게 읽어주고 싶어서 들고 왔어.”

델카인은 제 방에서 들고 온 책을 꺼내 책을 읽어주었다.

잠을 자러 방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책을 읽던 델카인의 곁으로 리타가 다가왔다.


“아가씨, 도련님. 방으로 돌아가서 주무실 시간이에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델카인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졸고 있는 아이샤를 흔들어 깨웠다.


“아이샤. 일어나.”

“우웅. 언니는……?”

“아직.”

델카인의 대답에 아이샤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내일 또 올게.”

쌍둥이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아의 방문이 열렸다. 라크하였다.

라크하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메이아를 바라보았다.

힘없이 늘어진 긴 백금색의 머리카락, 창백한 낯빛.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메이아.”

라크하는 메이아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가녀리고, 작은 손이었다.

매번 이 손으로 제 손을 꼭 잡아주며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웃어주었는데.


“내가 이번에도 너무 늦게 와서 화난 거야?”

그래서 일어나지 않는 걸까? 차라리 일어나서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화라도 냈으면 좋겠다.

메이아의 손을 힘을 주어 잡은 라크하는 힘없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메이아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늦게 구하러 왔던 일이 그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메이아…… 내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툭, 투둑.

라크하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침대보 위로 스며들었다.

메이아가 깨어날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는 메이아를 보고 있자니 불안하고, 무서웠다.

메이아가 원래 운명대로 ‘영원한 잠’에 든 건 아닐까 싶어서.

라크하는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내가 돌아오면……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기로 했잖아.”

라크하는 낮게 신음하며 메이아의 손 위로 제 이마를 묻고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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