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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마지막 (125/136)


125. 마지막
2023.01.09.



 
로브를 쓴 남자가 아드리엔 남작가의 담벼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라크하는 단번에 데미안이라는 걸 알아챘다.

라크하가 마지막에 쫓던 데미안의 모습과 같았다. 체형도, 로브 안에 얼핏 비치는 옷도.

라크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예리하게 날이 선 검은 기운이 데미안을 향해 쇄도했다.


“……!”

데미안은 제게 날아든 검은 기운을 황급히 막아냈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흩어진 공격을 보며 라크하는 검을 꺼내 들었다.

차라리 검으로 숨통을 끊는 게 쉬울지도 몰랐다. 같은 흑마법사인 데미안이라면 흑마법에 쉽게 대응할 테니까.

데미안이 주춤 한 발자국 물러나더니 경계심을 잔뜩 내보였다.


“날 죽이면, 너도 죽는 거 알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널 죽이면, 녹스가 죽는 거겠지.”

데미안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라크하? 그럼 녹스는 어디로 간 거지?”

“뭐?”

이해할 수 없는 데미안의 행동에 라크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데미안은 녹스와 한패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자신을 녹스라고 착각했을 때 데미안의 태도가 거슬렸다.

적을 보는 듯한 눈빛, 그리고 경계심.

녹스와 손을 잡은 사람이 보일 법한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지만…….

라크하는 의구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더는 어떠한 동정심도, 망설임도 있어선 안 됐다. 오히려 데미안을 처리하는 데 방해되는 요소들이었다.

머릿속을 차갑게 식힌 라크하가 데미안의 허점을 살피던 때였다.


“안 돼요!”

벌컥, 남작가의 정문이 열리더니 쩌렁쩌렁한 레이나의 목소리가 가득 울렸다.

단숨에 달려온 레이나는 데미안의 앞을 막아섰다.


“제발, 데미안을…… 죽이지 말아주세요.”

레이나의 돌발 행동에 데미안은 얼떨떨한 듯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반면, 라크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레이나는 데미안과 혈연관계였다.

그런 레이나의 눈앞에서 데미안을 처리하는 것만큼 난감한 상황은 없었다.

하지만 데미안을 처리하는 건 불가피했다. 사랑하는 메이아와 쌍둥이들을 위해서라도.

라크하는 그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시선을 감내하더라도 뭐든 할 수 있었다.

라크하에게 메이아와 쌍둥이들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데미안이 지금까지 어떤 짓을 해왔는지 알고 있지 않나? 비켜라.”

“그래도 비킬 수 없어요!”

“레이나 양이 대의와 제국을 위한다면 비키는 게 좋을 거다.”

레이나는 움찔하면서도 끝까지 데미안의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데미안이 죽는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요.”

“그럼 메이아가 죽고 저놈이 살길 바란다는 건가?”

“……저는 메이아 님이 죽는 것도 원치 않아요.”

레이나가 주저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모순적인 대답에 라크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본인도 대체 뭘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건지 모르나 보군. 데미안은 마물과 함께 황실을 습격할 계획을 짠 놈이야.”

“…….”

“이번에도 비키지 않는다면,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동으로 간주하고 황실에 보고를 올리겠다.”

라크하가 한 발자국 걸음을 떼려던 때였다. 지금껏 잠자코 있던 데미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만.”

라크하와 레이나의 시선이 데미안에게 향했다. 주먹을 꽉 말아쥔 데미안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그만해.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데미안.”

레이나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데미안은 레이나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인사하려고 찾아온 거였어.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마지막이라니. 데미안, 그런 말 하지 마.”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더 확신이 들어.”

입술을 꾹 깨문 데미안은 단검을 꺼내 제 심장을 겨누었다. 단검의 첨예한 날이 금방이라도 데미안의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번뜩였다.


“내가 죽어야 하는 게 맞아.”

“데미안!”

레이나가 기겁하며 외쳤으나 데미안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이미 레이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이게 최선이고, 내가 받아야 할 죗값이야.”

“제발, 그러지 마.”

레이나가 애원하며 데미안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가까이 오지 마!”

데미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레이나에게 단검을 겨눴다. 하지만 레이나는 물러나기는커녕 데미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데미안. 제발.”

“오지 말라고 했잖아!”

결국, 데미안이 고함을 지르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단검은 여전히 레이나를 향해 있었다. 제 심장을 겨눌 때와 달리 데미안의 손이 떨렸다.


“나는, 나는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란 말이야. 나 때문에 다 죽었어. 다 죽었다고!”

“데미안, 진정하고. 응?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소용없어. 어차피 나는…… 곧 죽을 테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 데미안.”

“제발…… 날 말리지 말아줘.”

데미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르릉.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오더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으나, 레이나의 시선은 데미안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레이나가 다가설수록 데미안의 결심은 흔들렸다. 그 사실은 데미안의 죄책감을 건드리고 그의 숨통을 옥죄었다.

그런 데미안의 상태를 눈치챈 라크하가 팔을 뻗어 레이나를 막았다.


“……다가가지 않는 게 저 녀석을 위한 일이야.”

“그게 데미안을 위한 일이라뇨!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니. 라크하의 말이 맞아. 이건…… 크윽.”

데미안이 말을 하다 말고 신음을 흘리더니 비틀거렸다. 레이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미안?”

“이게 무슨…….”

예상치 못한 상황에 라크하 역시 당황한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쿨럭!”

데미안이 기침을 토해내며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입가를 손으로 막고 있었으나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핏물의 색은 선명했다.


“데미안!”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뱉은 레이나가 황급히 데미안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허물어지는 데미안의 몸을 감싸 안았다.


“아아…… 안 돼. 제발…….”

비참한 광경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던 라크하는 등을 돌렸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사정을 알고 있는 탓일까. 속이 개운하기보다는 불편했다.


‘그래서…… 어차피 곧 죽는다고 했던 거였군.’

데미안은 처음부터 죽을 생각으로 약이나 독초를 먹고 왔다.

그제야 데미안이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납득이 갔다. 레이나가 개입하면서 도망칠 기회는 충분히 있었는데도.

지금까지 데미안이 한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애초에 죽을 생각으로 왔다는 것도. 마지막으로 레이나의 얼굴을 보러 왔다는 것도.

라크하가 착잡한 마음으로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였다.

라크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멀리 조명탄이 하늘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하필 조명탄이 있는 위치는 아인티아 공작가였다. 순간 심장에 서늘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제길.”

낮게 욕설을 읊조린 라크하는 곧장 말 위로 올라탔다.

메이아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한 발짝 늦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 돌았다. 라크하는 애써 불안감을 눌러내며 빠르게 말을 몰았다.

***

레이나의 금색 눈동자가 금세 눈물로 가득 찼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레이나의 뺨을 적셨다.


“아아…… 안 돼. 제발…….”

데미안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내장이 뒤틀리고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은 흐릿하고 숨을 쉬기 힘들었다.

데미안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레이나의 얼굴을 담으려고 눈에 힘을 줬다.

우리 누나. 못난 동생을 미워하기는커녕 왜 슬퍼하는 걸까.

소중한 친구의 원수가 죽는 것과 다름없는데. 드디어 못난 놈이 죗값을 치렀다고 기뻐해야지.

데미안은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울지 마.”

“단테…… 내 동생…….”

레이나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데미안은 조소했다.

아아, 내가 단테인 걸 알고 있었구나. 실컷 미워하고 털어내라고, 일부러 내가 단테라는 것도 밝히지 않았는데.

동생으로 인정받기엔 너무나도 못되고 잔인한 짓을 저질렀으니까.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야 할 동생이 이렇게 못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레이나는 자신을 단테라고, 동생이라고 불러주었다.


“미안해…… 누나. 슬퍼하지도 말고 행복하게…….”

잘 지내야 해. 그렇게 말해줘야 하는데 입에서는 꺽꺽거리는 쇳소리만 흘러나왔다.

각오했던 죽음이었지만, 무척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했던가.


“안 돼, 안 돼. 단테! 정신 차려. 제발……!”

레이나가 무어라 외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내 귓가를 가득 메우는 이명에 묻혔다.

고통스럽던 감각이 점차 아득해지며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아…… 이렇게 죽는 걸까? 점차 시야가 흐려지고 데미안의 눈꺼풀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레이나와 함께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레이나가 제 이름을 듣고 칭찬해줬던 일, 꽃을 받고 환히 웃던 일, 제 귀에 꽃을 꽂아주며 어울린다고 말해줬던 일.

마지막에 떠오르는 기억들이 전부 행복한 순간들이어서 다행이었다.

이기적이겠지만 마음 놓고 후련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음 생에는 부디 따스한 가족의 품에서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를 사랑해주는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아, 그리고 하나만 더. 레이나 아드리엔. 그녀를 똑 닮은 누나도 함께.

그때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를 사랑해주고, 품어줘야지. 행복하게 해줘야지.

꿈결처럼 달콤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데미안은 더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



“커흑!”

녹스가 별안간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와그작 찡그리더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방금 전까지 여유롭게 웃고 있던 녹스였다. 게다가 조명탄의 빛이 희미해지면서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고작 몇 초 사이에 판세가 뒤집힐 줄이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혼란스러운 사이 바닥에 쓰러진 녹스가 익숙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망……할. 데미안, 이 자식…….”

그제야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됐다.

정말 라크하가 데미안을……. 나는 북받쳐 오르는 복잡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래가 바뀌었다. 내가 희생할 일도, 라크하와 쌍둥이들에게 닥쳐올 불행도 없어졌다.

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이 순간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죽음이 있었고, 슬퍼할 사람도 있었으니까.


“컥, 커억.”

녹스가 들어가 있는 중년 여인의 입에서 검은 액체가 주륵 흘러내렸다.

맨정신으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으나, 녹스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녹스가 사라지는 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을 마주하던 때였다.


“……!”

곧이어 일어난 일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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