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낭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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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낭패
2023.01.06.
마물의 습격에 막사가 쓰러지며 보관해 두던 조명탄들이 데굴, 바닥을 굴렀다.
설상가상으로 하늘 위를 밝히고 있는 조명탄의 빛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라크하는 조명탄이 떨어진 곳의 근처에 있는 기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조명탄을 사수하라!”
“예, 알겠…… 아악!”
하지만 기사들은 마물들을 막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이런.”
라크하는 이를 악물며 검을 세게 꽉 쥐었다.
흑마법만 통한다면 멀리서도 지원이 가능할 텐데. 마물에게는 흑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라크하가 직접 조명탄을 챙기기 위해 마물들의 틈을 파고들던 때였다.
뿌우우. 길게 울리는 뿔피리 소리에 라크하는 고개를 들어 망루를 바라보았다. 망루에는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데미안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신호였다. 라크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망할. 이걸 노렸던 건가.”
“공작님! 조명탄은 제가 어떻게든 완전히 꺼지기 전에 다시 켜겠습니다!”
덩달아 상황을 파악한 파트라슈가 크게 소리쳤다.
고개를 끄덕인 라크하는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하지만 라크하가 지나갈 때마다 막사로 달려들던 마물이 그를 막으려는 행동을 취했다.
“성가시게 하는군.”
눈살을 찌푸린 라크하는 결국 마물을 처리하면서 나아갔다.
그때였다.
쾅-!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휘날렸다.
라크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폭발음이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수도 경계선과 이어진 문에서 난 소리였다.
라크하가 한눈을 판 사이에 마물이 말을 공격했다.
라크하가 타고 있던 말이 순식간에 땅으로 쓰러졌다.
“윽! 제길!”
가까스로 땅에 착지한 라크하는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강한 폭발음 때문에 귓가에 이명이 들려왔다.
게다가 흙먼지 때문에 주변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데미안을 놓쳤다간……!’
라크하의 머릿속에 메이아와 쌍둥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데미안을 뒤쫓기 위해 다른 말을 찾는데, 문득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라크하가 뒤돌았으나, 이미 사람의 몸집만 한 마물의 발이 코앞으로 뻗어진 뒤였다.
“……!”
늦었다. 라크하의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그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하늘을 밝히던 조명탄이 꺼지고, 라크하를 덮치려던 마물이 거짓말처럼 행동을 뚝 멈추었다.
다른 마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물들은 전부 홀린 듯이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불리했던 상황 속에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로 보일 뿐이지.
라크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숨에 마물을 베어낸 라크하는 서둘러 다른 말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등자를 박차고 속도를 높였다.
한편, 멀리서 라크하를 바라보고 있던 녹스의 시선 역시 마물과 같은 곳으로 향해 있었다.
뒤이어 녹스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테리투스?”
녹스의 본체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명탄이 터졌다.
***
“가까이 왔구나.”
나는 테리투스의 신호에 맞춰 조명탄을 하늘 위로 쏘았다.
피유웅-!
조명탄이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곧 나타날 녹스를 생각하자,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앞섰다. 손끝이 떨리며 손아귀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하지만 나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가까스로 감정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녹스는 다른 마물과 달리 자아가 있으니까. 그 점을 이용하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리저리 둘러대면서 시간을 끄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라크하와 쌍둥이들과 지내면서 변명만큼은 질릴 정도로 해봤으니까.
“후우.”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 여인이 정문 앞에 나타났다.
녹스는 지금까지 매혹적인 여성의 몸이나, 건장해 보이는 남자의 몸에만 들어가곤 했었는데.
‘조명탄을 보고 이 근방에서 급하게 몸을 차지하기라도 한 건가?’
숨어서 녹스를 바라보던 나는 의아해서 작은 목소리로 테리투스를 향해 물었다.
“……저 사람, 녹스인가요?”
“그래. 조심하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허리에 묶어둔 주머니를 꽉 쥐었다. 펠리르를 찾아갔을 때 조명탄 외에 따로 챙긴 단검이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이것만큼은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도 누군가를 공격하는 일은 내키지 않으니까.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녹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하늘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함정인 건가?”
다시 발걸음을 돌리는 녹스의 모습에 나는 허겁지겁 나무 뒤에서 뛰쳐나왔다.
“자, 잠깐만! 저기, 녹스!”
녹스는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제 발로 기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죽고 싶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럼?”
다행히 녹스는 섣불리 내게 덤비진 않았다.
주변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대치 상황은 나에게 유리했다. 내 목적은 언제까지나 녹스의 발을 묶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한결 마음을 놓으며 본격적으로 말을 이었다.
“테리투스가 조명탄을 켜고 숨어 있으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테리투스, 라는 단어가 언급되자마자 녹스의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
“테리투스는 어디 있지?”
“이미 떠났어. 혹시 테리투스와 만나고 싶은 거야?”
나는 자연스럽게 녹스가 관심을 가질 법한 화제를 툭 던졌다.
효과가 나름 있었는지 녹스가 멈칫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나는 얼마든지 테리투스를 부를 수 있어.”
“하하!”
녹스가 별안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얼떨떨해서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한참을 웃던 녹스가 입매를 비틀어 올리더니 빈정거렸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방법이 있어서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방법이 뭐든 테리투스는 나타나지 않을걸?”
사실 녹스가 어떤 방법으로 테리투스를 부를 생각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뭐라도 알고 있는 양 나서지 않으면, 녹스에게 휘둘리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녹스가 나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기죽지 않고 녹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우선 지금까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긴 한데……. 거짓말이 들키진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녹스는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어째서 테리투스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지?”
“지금 테리투스한테 제약이 걸려 있거든. 내가 능력을 써야 테리투스가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어. 그 방법이 아니라면, 어떤 짓을 하든 너는 테리투스를 보지 못할 거야.”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일을 섞어 말하니 그럴싸해서 전보다 자신감이 붙었다.
하지만 녹스의 미심쩍은 시선은 걷히지 않았다.
“내가 테리투스를 노리는 걸 알지 않아? 그런데 왜 불러주겠다고 하는 거지?”
“더는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나는 네가 인간성이 있는 마물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한때 괜한 희망을 품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녹스는 이미 선을 넘고, 인간성을 상실했다는 걸.
‘그런데도 그 당시엔 조금의 희망이라도 잡고 싶었지.’
그 기억을 여기서 써먹게 될 줄이야.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녹스에게 말을 늘어놓았다.
“너도 처음부터 마구 사람들을 잡아먹진 않았다며. 테리투스랑 대화를 나누면 풀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뭐,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테리투스와 대화를 해 보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네.”
줄곧 나를 경계하던 녹스의 눈빛이 한결 풀어졌다.
내가 만만하거나 순진하다고 생각해서 이용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몇천 년간 응어리진 테리투스에 대한 분노가 고작 대화로 풀어질 리가 없으니까.
역시 상대를 방심하게 하는 것만큼 강력한 무기는 없었다.
“나와 다른 인간들을 죽이지 않는다고 맹세하면, 테리투스를 불러줄게.”
“맹세할게. 하지만 테리투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를 거야.”
테리투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긴 개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전에 자리를 옮기는 건 어떨까?”
녹스가 씩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순간 녹스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뒤늦게 내 실수를 깨달은 나는 녹스가 의심하기 전에 서둘러 답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여기서 부르면 안 될까?”
“저 빛이 거슬려서 말이야. 테리투스가 갑자기 나를 공격할 수도 있는데 그냥 당할 수는 없잖아?”
나는 녹스가 가리킨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조명탄이 꺼지려면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시간을 더 끌어야 하는데…….’
적어도 조명탄이 꺼질 때까지만이라도. 저 빛이 사라진다면, 분명 녹스는 본색을 드러낼 테니까.
녹스의 앞에서 최대한 태연한 척 행동하고 있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라크하는 데미안을 상대하고 있을까?’
라크하가 녹스에게 몸을 빼앗길 일은 막긴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라크하 쪽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저 조명탄이 꺼질 때까지 녹스를 붙잡아 두는 데 집중하자.’
나는 간신히 불안감을 억누른 뒤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곧 조명탄이 꺼질 테니…….”
우르릉. 뒤이어 하늘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내 목소리는 묻혔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비가 떨어질 때마다 하늘 위를 밝히고 있던 조명탄의 빛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당황해서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혹시 비 때문에…….’
낭패였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녹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녹스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어디로 간 거지?”
곧장 데미안의 뒤를 추격하던 라크하는 갈림길 앞에서 말고삐를 당겨 멈추었다.
분명 이쪽으로 가는 걸 봤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라크하는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이 근방에는 아드리엔 남작가가 있었다.
‘……설마 아드리엔 영애에게 간 건가?’
황궁을 습격하기 전에 아드리엔 영애를 데리고 도망가려는 생각인 건가?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는 데미안이라면 충분히 할 법한 행동이었다.
라크하는 곧장 말머리를 아드리엔 남작가로 돌렸다.
그런 라크하의 등 뒤로 메이아가 쏜 조명탄이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