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탐나는 몸
(123/136)
123. 탐나는 몸
(123/136)
123. 탐나는 몸
2023.01.02.
“……녹스가 아인티아 저택으로 올 거예요.”
녹스를 부르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는 시롬을 가장 먼저 찾아가 상황 설명을 했다.
녹스를 아인티아 저택으로 부르는 것이다 보니 시롬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사실 시롬이 내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얼핏 라크하에게 들은 게 있었던 걸까.
“혹시 이 역시 테리투스 님의 예언인 겁니까?”
“음, 네…… 맞아요.”
내가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에 시롬이 테리투스의 예언이냐고 물어서 다행이었다.
시롬은 끙, 하고 침음을 흘리며 미간을 짚었다.
“녹스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대비해야겠군요.”
“……아마 오늘 녹스가 찾아올 거예요.”
“예에?! 그, 그걸 왜 이제야 말씀하시는 겁니까!”
시롬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마음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지. 나도 오늘 테리투스에게 그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으니까.
시롬은 고개를 내젓더니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따질 시간도 없군요. 아가씨와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잠깐만요!”
나는 순식간에 집무실을 뛰쳐나가려는 시롬을 황급히 붙잡았다. 아직 중요한 얘기가 남아 있었다.
“동쪽 별관보다는 서쪽 별관이 사용인들을 대피시키기 더 수월한가요?”
“예, 동쪽 별관은 손님 방 용도로 쓰는 건물이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럼 사용인들을 전부 서쪽 별관으로 대피시켜주세요. 그리고 기사들도요.”
“예? 그럼 녹스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시롬이 당황한 듯 눈을 껌뻑였다. 나는 그런 시롬을 바라보며 걱정 말라는 의미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부탁해요. 시롬.”
다른 사람들이 위험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위험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온전히 나 혼자여야 했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기로 하고 벌이는 일이니까.
“…….”
시롬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로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은 긴 한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쪽 별관의 홀로 대피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시롬에게 전부 터무니없는 말일 텐데, 믿고 따라줘서 감사해요.”
“제가 아니었어도 곁에서 시터님을 봐온 사람이라면, 믿을 겁니다.”
시롬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집무실에서 나갔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내가 신의 딸, 메이아라서 내 말을 믿어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시터인 메이아로서 이 저택에서 인정을 받은 기분은 묘했다.
정말 나라는 사람을 인정해 주는 거였으니까.
***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애석하게도 나는 금세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조명탄이 하나밖에 없을 줄이야.’
나는 내 손에 있는 조명탄 하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든 것들을 전부 황궁에 지원했을 줄은 몰랐다.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 성능도 훨씬 좋다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자.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쌍둥이들과 인사라도 나누기 위해 서쪽 별관의 홀로 향했다.
홀에는 수많은 하녀와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쭉 둘러보자, 리타와 함께 있는 쌍둥이들이 보였다.
멀리서 나를 발견한 쌍둥이들이 순식간에 내 곁으로 달려왔다. 꽤 불만이 많이 보이는 얼굴이었다.
“형수님! 왜 다들 한 곳에 모여 있는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오늘 언니랑 나랑 온실 정원에 가기로 했는데!”
“내가 무슨 일이 있는지 살펴보고 올게. 그때까지 여기서 착하게 잘 기다릴 수 있지?”
나는 쌍둥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달랬다.
“물론이지! 나는 착하니까!”
활짝 웃은 아이샤가 냉큼 대답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델카인은 영 찝찝한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괜찮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며 델카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타에게도 따로 당부했다.
“리타 씨, 아이샤와 델카인을 잘 부탁해요.”
“네, 시터님. 저만 믿으세요.”
리타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리타는 언제나 내가 부탁한 일을 잘 해내 주었으니까.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서쪽 별관에서 나오자,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리투스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메이아야, 지금 네가 한 선택에 후회는 없겠느냐.”
“네, 그럼요.”
후회할 리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원작의 결말대로 흘러간다는데 일단 뭐라도 시도해봐야 했다.
비록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녹스를 붙들고 있으면 라크하가 그 뒤를 맡아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하긴 했구나.”
“그건 테리투스 님도 마찬가지인걸요. 끝까지 저한테 황제를 위해 희생하라고만 할 줄 알았거든요.”
“그렇긴 하구나. 참 이상한 일이지.”
테리투스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네가 원래 운명대로 축복을 내렸으면 하던 마음에 지금까지 쭉 지켜보던 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널 응원하고 있더구나.”
“저를요……?”
“그래. 너는 내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들도 옳은 곳으로 이끄는 게 신기했지.”
테리투스가 우뚝 멈춰 서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정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응원하고 있단다. 네 선택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기분이 이상했다. 테리투스가 진심으로 나를 응원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니 테리투스가 수염을 씰룩거렸다.
“왜,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냐?”
“아뇨. 그럴 리가요. 신의 응원이라고 하니, 든든해서요.”
“흠흠, 그래, 아무렴.”
테리투스는 머쓱한지 헛기침을 하며 내 눈을 피했다.
그래, 테리투스가 나를 응원한다고 했으니 분명 괜찮을 거야.
숨을 가다듬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준비가 됐으니 때가 되면 녹스를 불러주세요.”
***
사람 몸집의 몇 배나 되는 마물이 순식간에 수도 경계선 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난데없는 습격에 당황하여 혼비백산이 되었다. 그때였다.
촤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마물의 머리가 베어졌다.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더니 마물의 몸이 쿵, 하고 뒤로 넘어갔다.
곧이어 벼락같은 라크하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원 공격 태세를 갖춰라! 그리고 놈들마다 약점이 있으니 빠르게 파악하고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노려 공격하라!”
“예, 예! 알겠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은 서둘러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마물의 수는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마물이 나타나기 전까지 어떠한 조짐도, 기척도 없었다.
시뻘건 피가 얼굴과 몸을 적셔도 라크하는 표정 하나 없이 능숙하게 마물들을 도륙했다.
그 광경을 녹스가 욕망으로 들어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데미안. 혹시 저 남자가 아인티아 공작이야?”
데미안은 녹스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녹스의 손가락 끝이 향한 곳에는 마물의 피를 덮어쓰고 있는 라크하가 있었다.
“……맞아. 그런데, 왜?”
“검술도, 흑마법도 뛰어난 몸이라니. 굉장히 탐나잖아. 기회가 되면 바로 노려야겠어. 그럼 나중에 죽이기도 쉬울 테고.”
녹스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에 있는 저 빛만 아니었어도 마물을 소환할 필요는 없었는데. 벌써 이렇게까지 대비했을 줄은 몰랐네.”
“피레타 마을에 마물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저하게 준비한 거겠지.”
녹스의 곁에서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던 데미안이 조명탄을 흘긋거리며 대답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위로 밝은 빛이 수놓아져 있었다. 마물들이 습격하자마자 기사들이 쏘아 올린 조명탄이었다.
“흐음, 그래? 역시 힘을 완전히 키우고 올 걸 그랬나? 그럼 빛 따위 아무것도 아닐 텐데.”
녹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테리투스를 상대하기도 전부터 되게 귀찮아졌네.”
“……테리투스를 상대한다고?”
데미안은 눈을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가 테리투스 때문에 몇천 년간 봉인되어 있었기에, 복수심을 갖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래서 황제와 메이아를 노린다는 것도.
하지만 테리투스를 처단하는 게 최종적인 목표라는 건 처음 들은 사실이었다.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테리투스, 그놈은 제르디아의 혈통이 죽기 전에 분명 지상으로 내려올 거야. 전에도 그랬거든.”
녹스가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눈을 번뜩였다. 살기가 서린 눈빛에 데미안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녹스. 신의 힘과 맞먹었던 마물.
그 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내 몸을 더 가지려고 했던 거구나. 내가 죽으면, 모든 게 쓸모없어지니까.’
대체 누가 이런 마물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녹스를 막으려다가 다들 개죽음밖에 당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선택지는 없어.’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마지막으로 레이나 아드리엔. 제 누나를 보고 싶었다.
이조차 욕심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나를 보아야 ‘그 방법’을 이행할 결심이 완전히 설 것 같았다.
데미안은 녹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녹스는 지금 기사와 마물의 대치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녹스의 눈빛에 이채가 띠었다.
“데미안, 너 먼저 수도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어떻게?”
“이상한 물건을 모아둔 곳을 찾았거든. 그 물건만큼은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하겠지.”
녹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식량과 조명탄 등 보급품들이 있는 위치였다.
“난 저 빛이 꺼지면, 공작의 몸으로 곧장 뒤따라 갈게.”
마침 하늘을 비추고 있는 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막사에서 나온 기사들이 조명탄을 다시 쏘려는 걸 목격한 녹스는 그곳을 향해 손짓했다.
녹스의 명령을 받은 마물들이 일제히 보급품을 모아둔 막사로 방향을 틀었다.
갑작스럽게 막사로 쏟아지는 마물을 감당하지 못한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경계선 문 근처에서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던 라크하가 다급히 막사로 말을 몰았다.
녹스가 씩 웃으며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야.”
***
서쪽 별관 홀에는 한기가 흘렀다. 메이아가 떠나간 이후로 분위기가 돌변한 쌍둥이들 때문이었다.
하녀들은 옹기종기 구석에 모여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앞을 버티고 서 있는 쌍둥이들을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봐. 대체 무슨 일이라서 다들 여기 모여 있는 거야?”
“그런데 델카인, 저 하녀. 왜 이렇게 떠는 거야? 누가 보면 우리가 잡아먹는 줄 알겠어.”
쌍둥이들의 목소리와 표정은 상냥했으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하녀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이샤,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
“네, 네! 맞아요!”
“글쎄. 그렇다기엔 쟤는 언니랑 친하잖아. 뭘 듣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아이샤가 리타를 향해 턱짓했다. 쌍둥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 리타는 긴장해서 몸을 움찔했다.
리타가 입을 열려는데, 아이샤가 별안간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아, 열 받는데?”
“아니, 갑자기?”
델카인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아이샤를 바라보았다. 아이샤가 리타를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저 하녀가 나보다 언니랑 친해서 뭘 더 알고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거, 걱정 마세요. 아가씨! 저도 정말 들은 게 없어요!”
“정말? 그럼 됐어!”
아이샤는 방긋 웃으며 볼일이 끝났다는 듯 휙 몸을 돌렸다. 그러다 시롬과 펠리르를 발견한 아이샤가 눈을 반짝였다.
“시롬, 엄청 오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
아이샤는 후다닥 시롬의 곁으로 다가갔다. 반갑게 인사를 하려던 아이샤는 시롬의 표정이 심각한 걸 보고 멈칫했다.
“비가 오면 조명탄이 꺼진다는 말입니까?”
조명탄? 조명탄이 뭐지? 아이샤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우르릉. 창문 밖으로 하늘이 잘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