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제 행운이 부디 당신에게 닿기를
(122/136)
122. 제 행운이 부디 당신에게 닿기를
(122/136)
122. 제 행운이 부디 당신에게 닿기를
2022.12.30.
날이 좋기도 하고, 마침 쌍둥이들의 수업도 없는 날이라 밖으로 나왔다.
아이샤는 정원으로 나오자마자 델카인을 이끌고 이리저리 쏘다녔다.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라크하의 소식을 듣고 축 처져 있을까 걱정했는데.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쌍둥이들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얘들아, 나는 앉아서 쉬고 있을게.”
쌍둥이들의 체력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던 나는 홀로 테이블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홀로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라크하의 생각이 났다.
‘파트라슈가 라크하한테 편지를 잘 전달해줬으려나?’
동이 틀 무렵, 파트라슈와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황궁으로 떠났다고 들었는데.
덤벙거리는 파트라슈가 깜빡 잊진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한숨을 푹 내뱉은 나는 문득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침까지 화창했던 날씨가 어느덧 흐려지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 건 아니겠지? 이만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쌍둥이들을 바라본 때였다.
“언니! 얘 좀 봐!”
쭈그려 앉아 꼼지락거리고 있던 아이샤가 뒤돌더니 제 몸집의 반쯤 되는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저 통통하고 노란 고양이는 분명…….
“아, 아이샤! 그 고양이, 얼른 내려놔!”
나는 경악하며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저 고양이, 성질이 만만치 않은 것 같던데!
하악질을 하며 아이샤를 할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조마조마했다.
“언니, 걱정 마. 얘 엄청 얌전해!”
하지만 아이샤는 고양이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보다 못한 나는 쌍둥이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어라?”
정말이네. 아이샤의 말대로 고양이는 얌전하다 못해 평온해 보였다.
델카인은 아이샤의 품에 안긴 고양이를 들여다보며 신기한 듯 탄성을 터트렸다.
“아이샤, 네 말대로 진짜 돼지 고양이 같다.”
“그렇지? 나는 처음에 봤을 때 그냥 돼지인 줄 알았다니까.”
고양이가 별안간 심기가 불편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수염을 씰룩거렸다.
하긴 돼지 고양이라고 했으니 기분 나쁠 법도 하지. 아니, 잠깐.
무심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나는 멈칫했다.
‘고양이가 사람 말귀를 알아들을 리가 없잖아?’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아이샤의 품에 안겨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설마 테리투스가 현신한 건 아니겠지?’
‘제약’ 때문에 테리투스가 한동안 내려오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테리투스를 만나러 신전을 다녀온 뒤로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던가.
“이 돼지 고양이가 전에는 사람처럼 말도 했었어.”
“고양이가 사람 말을 어떻게 해?”
“아니, 정말이라니까. 내가 직접 들었어.”
아이샤와 델카인이 티격태격하는데, 어째서 고양이가 난감해 보이는 걸까.
어쩌면 정말 테리투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나는 조심스럽게 옛 기억을 꺼내 보았다.
“야옹아, 야옹해 보자.”
테리투스가 맞는다면, 내 말에 반응을 보일 텐데…….
“……야옹.”
돌아온 반응에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테리투스가 현신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쩌다 아이샤의 눈에 띄어서는…….
우선 아이샤의 손에서 테리투스를 구출해 따로 대화를 나눠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아이샤, 혹시 그 고양이 좀 빌릴 수 있을까?”
***
쌍둥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고양이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과 방문이 완전히 닫혀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고양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테리투스 님, 맞죠?”
“그래. 메이아야, 오랜만이구나.”
역시 테리투스였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제 제약이 풀린 건가요?”
“그래, 제약이 풀리자마자 왔단다. 아직 늦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무래도 그냥 두려니 마음이 안 좋아서 말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하필 라크하가 녹스와 마물을 상대하러 간 탓일까. 불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테리투스가 잠시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는 건 힘든 일이지. 내가 직접 점지한 운명이다 보니 더 바꾸기 어렵기도 하고.”
“……아직 제 운명이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건가요?”
“인간에게는 수많은 인연의 실이 이어져 있단다. 운명을 바꾸면, 그 실이 끊어지곤 하지. 그런데 아직 제르디아 황가와 이어진 네 인연의 실이 끊어지지 않았느니라.”
원작 내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테리투스의 말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제르디아 황가와 이어진 인연의 실이라면, 분명 내가 축복을 내리고 희생하는 운명을 말하는 것일 터.
그건 키네스가 녹스를 없애기 위해 직접 나서서 신력을 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결국, 라크하가 녹스를 막지 못한다는 거잖아.’
심장이 쿵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원작과 바뀐 게 많았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은 원작의 결말대로 흘러간다는 거야?
원작의 결말을 떠올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됐다.
“……제르디아 황가와 이어진 인연의 실을 끊을 방법은 없나요?”
“네가 제국을 떠났다면, 끊을 수 있었을 게다.”
제국을 떠나는 것. 내가 처음에 세웠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내가 사랑하는 그들을 두고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라크하와 쌍둥이들이 불행해질 걸 아는데, 어떻게 곁을 떠난단 말인가.
게다가 키네스도 쓰러질 것이다. 그럼 레이나는 키네스와 데미안, 모두를 잃게 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
테리투스의 대답은 단번에 나오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테리투스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까. 긴장되어 입안이 바싹 말랐다.
“테리투스 님.”
내가 채근하자, 테리투스는 끙하고 침음을 흘리더니 긴 한숨을 뱉어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란다. 딱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긴 하지.”
“알려주세요!”
희망을 엿본 나는 눈을 반짝이며 테리투스의 통통한 앞발을 덥석 잡았다.
테리투스가 신으로서 거짓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네 주변인까지 위험해질 수 있단다. 운명을 완전히 뒤트는 것이니까.”
내 주변인이라고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라크하와 쌍둥이들이었다.
내 사람들이 위험해지는 일만큼은 용납할 수 없긴 하지만…….
원작대로 흘러간다고 해도, 라크하와 쌍둥이들이 위험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일단 무슨 방법인지 듣고 결정해볼게요.”
“녹스를 이리로 부르는 것이지.”
“녹스를 부른다고요?”
“그래.”
입 밖으로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건 다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충격도 잠시였다. 어째서 테리투스가 이 방법을 제안했는지 알 것 같았다.
‘원작에서 마물 떼를 끌고 와서 황실을 습격하는 사람은 라크하였어.’
원작의 결말대로 가려면, 녹스가 라크하의 몸을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라크하가 녹스와 맞서는 일이 없어진다면?
녹스가 라크하의 몸에 들어갈 일은 없어진다.
‘그래서 원작의 결말과 다른 일이 벌어지는 거구나.’
어쩐지 입안이 썼다. 결말을 바꾸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니.
그것도 나뿐만 아니라 내 사람들까지 위험에 빠뜨려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하면 녹스를 부를 수 있나요?”
“내가 조금만 힘을 개방해도 녹스는 내 기운을 읽고 이리로 올 거다. 직접적으로 신력을 쓰는 게 아니니 다시 제약이 걸릴 우려도 없지.”
“테리투스 님의 기운을 읽고 정말 녹스가 이곳으로 올까요?”
“그 녀석의 목적은 나란다. 그러니 오지 않을 리가 없지.”
만약 녹스를 이곳으로 부른다면, 라크하는 데미안과 다른 마물들만 상대하면 된다.
대신 나와 쌍둥이들이 위험해지겠지.
하지만 우리가 녹스에게 당하기 전에 라크하가 데미안을 해결한다면, 원작의 결말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녹스를 부르지 않는다면, 제가 황제에게 축복을 내리는 운명은 불가피하다는 거죠?”
“그래. 자, 선택하거라. 어찌할 테냐?”
내게 선택지가 있긴 할까? 어차피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라크하와 쌍둥이들은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녹스를 부른다면 그 끝에는 내가 원하는 결말이 있을 수도 있었다.
라크하와 쌍둥이들, 그리고 내가 함께 웃는 결말이.
“그런데 제가 없는 곳에서 녹스를 부르는 건 어떨까요? 시간만 끌면 되니까, 산간 오지라든지…….”
“그런 얄팍한 수에 속을 녀석이 아니란다. 공작가나 적어도 황궁에서 불러야 반응을 보이지 않겠느냐.”
황궁만큼은 절대 안 됐다. 황궁에서 불렀다간 키네스가 녹스와 마주할 게 뻔했다.
그랬다간……. 생각만으로도 오싹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래. 네 마음은 알겠다만, 녹스에게 당할 바엔 축복을 내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단다.”
“아뇨,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나는 단박에 축복, 이라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내가 희생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키네스가 아닌, 라크하와 쌍둥이들을 위한 것이다.
테리투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정말 녹스를 부를 셈이라고?!”
“네, 녹스가 오기 전에 얼른 대비해야겠어요.”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탓에 내게 기대어 있던 테리투스의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비틀거리던 테리투스가 짧은 다리로 일어나더니 황급히 내 다리를 붙들었다.
“오, 오늘이면, 녹스가 수도로 올 텐데도 정말 부르겠다는 거냐?”
***
수도 경계선에 있는 검문소는 평상시에 외부인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누구나 할 것 없이 검문이 이루어지고 있을뿐더러, 수많은 기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눈 밑에 점이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라크하의 곁으로 다가온 기사가 상황을 보고했다.
“오늘은 유독 더 신경을 기울이라 전달해. 미리 조명탄을 사용하라 하고.”
“예, 알겠습니다.”
기사는 라크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조금 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위로 조명탄이 쏘아졌다.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했다.
라크하가 신경을 기울이라고 한 이유는 이 날씨 때문이었다.
어둑한 날씨는 녹스에게 제격이었으니까.
‘비만큼은 절대 오지 않아야 할 텐데.’
라크하는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펠리르가 제작한 조명탄은 이전보다 지속시간은 길어졌다. 하지만, 비가 왔을 때도 그 효력을 발휘할지는 불확실했다.
스산하게 부는 바람이 유독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때 파트라슈가 라크하의 곁으로 다가왔다.
“공작님.”
“무슨 일이지?”
“제가 정신이 없어서 깜빡 잊고 드리지 못한 게 있어서 말입니다.”
파트라슈가 멋쩍게 웃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메이아 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신 편지입니다.”
메이아. 그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무표정을 고수하던 라크하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메이아의 편지라니.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았는데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라크하는 기대감에 찬 얼굴로 조심스럽게 하얀 종이를 펼쳤다.
[라크하,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도 잘 지내고 있겠죠?
오늘 당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됐어요.
당신이 모든 짐을 짊어지려는 사실이 슬프지만, 당신을 존중하고 이해해요.
위기 끝에는 꼭 행복이 찾아온다잖아요. 우리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에게 일어날 불행은 제가 전부 가져갈게요. 제 행운은 부디 당신에게 닿길 바라요.
라크하라면,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추신. 당신이 원하는 말은 돌아오면 해줄 거예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옆에 무언가를 잘못 쓴 것처럼 펜으로 덧칠이 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 희미하게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는 글자가 보였다.
무심코 썼다가 지웠을 메이아의 모습을 떠올리자 라크하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따스한 감정은 찰나였다. 멀리서 기사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마, 마물이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