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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결단 지을 시간 (121/136)


121. 결단 지을 시간
2022.12.26.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잠들었다.

델카인도 살피고 가려고 했으나, 델카인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는 뒤였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나온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하루네.”

쌍둥이들의 과거를 알게 줄이야.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쌍둥이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자세한 사정을 듣고 나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라크하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그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이 얼마나 큰지.

가문과 능력? 라크하에게는 전부 진절머리가 나는 것들일 것이다.

선대 공작 부부가 쌍둥이들에게 행한 일은 말로 언급하기 힘들 정도로 잔혹했으니까.

쌍둥이들은 한창 사랑을 받고 자랐어야 할 나이였다.

그런데 고작 흑마법을 배우게 하겠다는 명목으로 모질게 대하다니.


“어라, 아가씨!”

착잡한 마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던 때였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양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있는 펠리르가 있었다.

상당해 보이는 짐을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거우실 것 같은데 도와드릴까요?”

“정말? 그럼 나야 좋지.”

펠리르는 내가 그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내 호의를 덥석 받아들였다.

펠리르의 짐을 나누어 받은 나는 나무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안에 무엇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게가 꽤 있었다.


“뭐가 들어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아, 조명탄이야. 연무장으로 가져다주던 길이었어. 라크하가 황궁으로 가기 전에 부탁했던 물품이거든.”

“라크하가…… 그랬었군요.”

라크하가 녹스를 상대하러 간다는 게 더욱 실감이 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듣자 하니 이제 녹스에게 마력석이나 불도 통하지 않는다더라고.”

“녹스의 힘이 꽤 강해진 모양이네요.”

“그런가 봐. 조명탄은 그나마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은데…….”

펠리르가 창문 밖을 힐끔거리며 말을 천천히 이어갔다.


“뭐, 어쨌든 아가씨 덕분이지. 녹스가 본체를 드러내면 상대할 방법이 없었는데, 덕분에 그런 걱정은 덜었으니까.”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잠깐, 원작에서는 조명탄 같은 게 없었잖아.’

원작에서는 마력석도, 불도 통하지 않으니 녹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원작과 많이 달라진 참이었다. 쌍둥이들의 미래도, 라크하의 미래도.

그리고 어차피 라크하는 굳게 결심한 상태였다.


‘차라리 라크하를 말릴 수 없다면…….’

라크하가 마음 놓고, 걱정 없이 다녀올 수 있도록 하는 게 그를 위한 방법이었다.

내가 쌍둥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고. 라크하라면 별일 없이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다고.

어쩌면 지금으로선 그게 진정으로 라크하를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펠리르 씨, 혹시 급하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물품인가요?”

“응? 그런 건 아닌데, 왜?”

“잠시 제 방에 들렀다가 가면 안 될까요?”

가능하다면, 라크하에게 편지라도 써서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펠리르가 잠시 멈칫하더니 양팔로 제 가슴을 가렸다.


“미안, 아가씨. 난 내 친구를 배신할 수 없어.”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뒤늦게 펠리르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깨달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아, 아니야? 매번 아가씨가 나한테 잘 대해주길래…….”

펠리르가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말도 섞고 싶지 않아졌지만, 나는 간신히 그 충동을 억눌렀다.


 


“펠리르 씨가 생각하시는 건 절대 아니니 그런 오해 말아요. 얼른 가요.”

나는 펠리르에게 다시 짐을 전부 떠넘긴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이 순간 나는 새로운 다짐을 했다. 앞으로 펠리르에게는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않아야겠다고.

***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학살도 끝은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불타버린 마을에 살아 있는 생명은 없어 보였다.


“데미안, 너 많이 바뀌었더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랄한 목소리에 데미안은 천천히 뒤돌았다.

밀색 머리의 여인이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인의 몸에 들어간 녹스였다.


“도와달라는 인간의 말도 무시하고 뒤돌아서다니 정말 깜짝 놀랐잖아.”

즐거운 일인 양 말하는 녹스의 모습에 데미안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녹스의 멱살을 잡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간신히 제 감정을 억눌렀다. 여기서 녹스와 사이가 틀어질 수는 없었다.

이제 겨우 녹스의 신뢰를 어느 정도 쌓았다. 자칫 잘못 행동했다간 지금껏 노력해왔던 게 한 번에 무너질 것이었다.

데미안은 숨을 가다듬으며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나는 내가 목표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지금도 참고 있을 뿐이었다. 녹스와 신뢰를 쌓은 다음에 알아내야 할 게 있으니까.

그런 데미안의 속도 모르고 녹스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흠, 그런 것 같긴 하더라. 물론 처음부터 그랬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땐 네가 그다지 혹할 만한 제안을 하지 않았으니까.”

“음…… 네가 이렇게까지 까다로운 사람인 줄은 몰랐거든. 이제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지.”

눈을 접어 웃은 녹스가 은근슬쩍 데미안에게 팔짱을 꼈다. 녹스의 스킨십에 데미안은 움찔하며 팔을 뺐다.

하지만 녹스는 익숙하다는 듯 그저 흐응, 하는 콧소리를 낼 뿐이었다.


“……아쉽네.”

아쉬운 표정을 지은 녹스가 입맛을 다시며 들고 있던 까만 구슬들을 손안에 굴렸다.

흑마력만 불어넣는다면, 지금껏 모은 마물을 불러낼 수 있는 소환 구슬이었다.

피레타 마을도 저 구슬 속에 있는 마물들을 풀어서 습격했다.

데미안은 찌푸려지는 미간을 가까스로 펴냈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잖아.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일이 금방 퍼질 것 같단 말이지.”

“흠…… 그러고 보니 황실에서 준비를 더 하기 전에 습격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좋아, 그렇게 하자.”

녹스가 씩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은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이 앞당겨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꼭 녹스에게서 알아내야 할 게 있었다. 데미안은 대화 주제를 은근히 돌렸다.


“황실을 습격하면 조만간 나도 그분들을 구해드릴 수 있겠지?”

“너도 참 지겹다. 지금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네. 당연히 구해줄 수 있다니까.”

녹스가 지루한 얼굴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녹스에게는 따분한 얘기일 법도 했다.

데미안은 지금까지 일부러 꾸준히 그분들을 언급해 왔다. 단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

데미안은 불안한 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시전자를 죽이면 금기의 흑마법이 풀리는 거 맞지?”

“어휴, 그 인간들을 구할 생각만큼은 유별나다니까. 풀리는 거 맞으니 그만 물어.”

“나도 그러고 싶은데 계속 불안하단 말이지. 금기의 흑마법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

“멍청하긴.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건 어떤 금기의 흑마법이든 통용되는 사항이야.”

데미안은 녹스를 금기의 흑마법으로 소환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있었다.


‘내가 죽으면 녹스도 죽는구나.’

모든 퍼즐이 맞추어졌다. 하지만 데미안은 복잡한 마음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

라크하는 서쪽 탑에서 풀려난 이후, 배정된 방과 알현실을 오가며 키네스와 만남을 가졌다.

이왕이면 아인티아 저택을 오갈 수 있도록 완전히 놓아주었으면 좋으련만.

허튼짓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키네스는 라크하를 끝까지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오늘, 녹스와 마물을 처리할 작전과 맹약에 관한 사안까지 모두 마무리되었다.


‘이전에 내걸었던 조건대로 이루어졌으니 성과를 봤다고는 할 수 있겠지.’

물론, 성과라고 하기엔 객관적으로는 잃는 게 많은 조건이다.

하지만 라크하에게 ‘잃는다’라는 범주에 속하는 건, 메이아와 쌍둥이들뿐이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쌍둥이들에 대한 걱정은 크게 없었다. 메이아라면 쌍둥이들을 누구보다 잘 보살펴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다만, 메이아가 걱정되었다. 하필 데미안과 녹스가 마을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진 참이었다.

메이아라면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시롬을 붙들고 자세한 정황을 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가 황제에게 어떤 조건을 걸었는지 알게 됐을 터.


“아무래도 충격이 많이 크겠지.”

씩씩해 보이지만 메이아가 마음이 여리다는 걸 라크하는 잘 알고 있었다.

혼자서 울고 있진 않을까. 잠을 설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자신을 원망하고 있진 않을까.

라크하의 머릿속에 메이아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들어찼다.

충분히 메이아와 인사를 나누고 왔다고 생각했으나 부족했다.

메이아를 떠올리던 라크하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죽어, 죽어, 죽어.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여전히 눈만 감으면 저주를 퍼붓는 망자의 속살거림이 들려왔으나, 이제는 견딜 만했다.

이전과 달리 라크하에게 더 고통스럽고 두려운 건 메이아와 쌍둥이들이 위험해지는 것이니까.

게다가 그녀의 곁으로 무사히 돌아가려면 지금 휴식을 취해야 했다. 앞으로 다가올 전투가 얼마나 고될지 몰랐다.

라크하는 잠시 얕은 잠을 청한 뒤 정해진 시간에 맞춰 황궁 뒷문으로 향했다.

황궁 뒷문에는 파트라슈와 아인티아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라크하는 그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짐마차에 실린 물품을 확인했다.


“오랜만이군. 물품들은 빠짐없이 준비해 왔겠지?”

“예, 물론입니다.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그놈들을 끝장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이라…… 그래, 그렇지.”

라크하는 쓰게 웃었다. 파트라슈의 말마따나 이번 전투는 마지막이나 다름없었다.

녹스는 어떻게든 황실을 노리기 위해 수도로 돌아올 것이다. 이를 대비하여 작전지를 수도 경계선으로 정했다.

만약 수도 경계선이 뚫리고, 녹스가 황실을 습격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었다.


“작전 내용에 대해서는 다들 전달받았나?”

“예, 그런데 녹스와 데미안이 셀프레나 숲으로 향할 거라고 추측되니 차라리 수도로 오는 길목에서 잠복하고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셀프레나 숲에서 수도로 향할 수 있는 길목은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분명 포위하기에는 적절한 지형이긴 했다. 하지만 라크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가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황궁으로 올 건 확실하지. 만약 그 숲을 들리지 않고 온다면 더 빠를 테고.”

데미안과 녹스가 황실을 습격하려면 수도로 들어오는 건 불가피했다.

불확실한 일에 힘을 쏟기보다는 녹스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야 했다.

그 탓에 근방의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킨 참이었다.


“중대한 사안이니 어떤 변수도 허용해선 안 돼.”

라크하는 스스로 다짐하듯 확고하게 읊조렸다.

더 이상의 실수도, 실패도 있어선 안 된다. 이는 메이아와 쌍둥이들도 위험해지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제가 실언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준비는 끝났으니 이만 출발하도록 하지.”

라크하는 고개를 숙인 파트라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라크하가 등을 돌렸다.

모든 걸 결단 지을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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