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쌍둥이들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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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쌍둥이들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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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쌍둥이들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2022.12.23.
“이번에 피레타 마을 습격 건으로 녹스와 데미안이 다음으로 갈 곳이 더욱 확실해졌군요.”
건너편에 앉아 있던 파트라슈가 몸을 일으키더니 업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업무 책상 위에는 커다란 지도가 올려져 있었다.
데미안과 녹스의 행적을 기록해둔 건가?
의구심이 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살펴보았다. 스톡 산맥이라고 적혀 있는 위치에는 별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별이 그려진 위치는 몇 군데 더 있었다.
파트라슈가 피레타, 라고 적힌 곳과 조금 더 떨어진 곳에 별을 하나 더 그렸다.
“이제 남은 곳은 여기뿐이지요. 지금까지 마물로 악명 높은 곳 위주로만 다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셀프레나 숲…… 말인가요?”
“예, 그래서…….”
“파트라슈, 말조심해.”
그때 잠자코 있던 시롬이 중요한 순간에 끼어들었다. 말조심하라니?
내게 알리면 안 되는 내용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시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얘기라도 되나요?”
“이제 시터님께서는 돌아가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쌍둥이들과 저녁 식사를 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요.”
“그래도 시터님께서는 아가씨와 도련님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지 않으십니까. 워낙 심각한 사안이기도 하고, 괜히 시터님께 심려 끼치는 일이 될까 우려가 되는 마음에 그렇습니다.”
시롬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시롬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냄새가 난단 말이지.
내 미심쩍은 눈빛에 시롬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알고 보면 지금까지 바쁘다는 이유로 나를 물렸던 것도 핑계였던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요. 시롬, 저한테 숨기는 거 있죠?”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파트라슈 씨, 정말 제게 숨기는 게 없어요?”
“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시롬을 추궁하다가 그 대상이 자신을 향하자 파트라슈는 꽤 당황한 듯 성급히 답했다.
“아아, 숨기는 게 있긴 한가 보네요.”
“헙.”
파트라슈는 뒤늦게 말실수를 깨닫고 제 입을 막았다. 그 모습에 시롬이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파트라슈, 자네. 입만 다물고 있었으면 반이라도 갈 것을!”
“사람이 어찌 입을 다물고만 있겠나. 나도 말할 권리가 있다네!”
“지금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논점 좀 흐리지 말게!”
결국, 파트라슈와 시롬의 말싸움으로 번졌다. 나는 손뼉을 쳐 그 흐름을 끊었다.
“자, 두 분 그만 싸우시고, 얼른 말해주세요.”
하지만 시롬과 파트라슈는 끝까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대체 어떤 얘기이기에 나에게 숨기고 말을 하지 않으려는 건지.
섣불리 얘기하지 않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초조해졌다.
파트라슈와 시롬의 눈치 싸움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파트라슈였다.
“어차피 시터님께서 알게 될 일이지 않나. 그냥 알려드리도록 하게.”
파트라슈의 채근에 시롬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더니 마지못한 듯 긴 한숨을 뱉어냈다.
“……황실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아인티아의 정예부대를 소집하여 마물과 녹스를 척결하라는 명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복귀한 겁니다.”
파트라슈가 시롬의 말에 뒤이어 말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아인티아의 정예부대를 꾸려 마물과 녹스를 척결하라. 그 명령이 내포하고 있는 뜻이 있었다.
“라크하도 함께 가는 건가요?”
“네, 물론입니다. 그게 공작님께서 폐하께 직접 내건 제안 중 하나이니까요.”
“……라크하가 직접 내건 제안이라니요?”
“공작님께서는 마물과 녹스를 척결한 뒤, 흑마법을 포기하는 맹약을 맺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뒤이어진 시롬의 말에 나는 숨을 짧게 들이켰다.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없었다. 쌍둥이들과 약속한 저녁 식사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식사 중에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시롬과 파트라슈와 나눴던 대화가 떠나지 않았다.
라크하가 내걸었던 제안들은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녹스와 마물을 척결하는 데다가 흑마법을 포기하다니.
지금 상황에서 라크하가 포기할 수 있는 걸 모두 내놓는 것과 같았다. 제 미래도, 가문도, 능력까지도.
하지만, 내가 가장 우려되는 건 녹스와 마물을 척결하고 오겠다는 제안이었다.
“원작대로 흘러가기라도 한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응? 언니, 뭐라고 했어?”
옆에 앉아 있던 아이샤가 내 중얼거림에 식사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으음…… 오늘 메뉴는 닭가슴살 스테이크네.”
“그러니까! 닭가슴살보다 닭다리살 스테이크가 더 맛있는데, 주방장이 뭘 좀 모르는 것 같아.”
먹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진심인 아이샤는 진지하게 음식에 대해 토로했다.
다행이다. 제대로 못 들었나 보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쌍둥이들과 식사를 하는 중이니 입조심을 해야 했는데.’
고민은 나중에 하고, 우선 쌍둥이들에게 집중해야지.
하지만, 그 다짐도 잠시였다. 이미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른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녹스와 마물을 척결하러 간 라크하가 녹스에게 몸을 빼앗기는 건 아니겠지?’
그럼 원작대로 라크하가 마물 떼를 끌고 와 황실을 습격하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라크하에게 반란자라는 이름표가 붙을 테고, 아인티아 가문의 구성원인 쌍둥이들도 위험해지게 될 것이었다.
‘물론, 원작에서는 라크하가 녹스와 마물을 척결하러 간다는 이야기는 없긴 한데…….’
이미 쌍둥이들이 레이나를 괴롭혀 탑에 갇힌다는 원작의 흐름도 깨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안심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원작과 많이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린 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형수님, 고민거리라도 있어?”
“닭다리살 스테이크가 아니어서 언니도 짜증 나는 거겠지. 언니, 내가 주방장 잡아 와서 혼내줄까?”
아이샤가 끼어들자, 델카인이 기분이 상했는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너처럼 매번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너처럼 하나하나 다 의미 부여하고 세상을 복잡하게 사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최근에도 과거로 돌아가기 싫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얘기나 하잖아.”
잠깐, 그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아이샤의 발언에 놀란 나는 서둘러 싸움을 제지했다.
정말 사소한 일이었는데, 싸움이 커지고 있었다.
“얘들아, 즐거운 식사 시간인데 서로 감정 상할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이샤가 건드리지 않아야 할 걸 건든 모양이었다.
드르륵.
델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이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방금 한 말, 다시 해봐.”
“델카인, 아이샤가 홧김에 한 말일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맞잖아. 뭘 과거로 돌아간다는 건데?”
“아이샤, 이것 봐. 아이샤 건 닭다리살 스테이크로 나왔네.”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쌍둥이들을 달랬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하필 델카인도 물러서지 않아 쌍둥이들을 제지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얘들아, 일단 진정하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는 게 어때?”
“그래, 너한테는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도! 형이 왜 안 돌아오는지도!”
기어코 델카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는 숨을 짧게 삼켰다.
매섭게 델카인을 바라보던 아이샤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뭐?”
누가 찬물이라도 뒤엎은 듯 다이닝룸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평소에 침착하던 델카인이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델카인도 나만큼 불안했던 거구나.’
라크하의 귀환이 늦어지니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더욱이 델카인은 어떤 상황인지 나보다 더 모르는 상황이었다.
궁금해도 속으로 꾹꾹 참고 있었던 건데, 하필 아이샤가 그 점을 건든 것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이샤였다.
“……델카인,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 사람들 얘기는 왜 나오는 건데? 오빠는 그냥 사업 일 때문에 나간 거라고.”
“아니, 형이 사업 때문에 나가서 이렇게 오랫동안 안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나는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라크하는 델카인이 물으면 사실대로 얘기를 해줘도 된다고 했지만…….
아이샤까지 얽히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럼 오빠가 안 돌아오는 이유가 그 사람들 때문이라는 거야?”
“……아마도.”
델카인이 대답을 요구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아이샤의 시선도 나에게 향했다.
“……언니, 정말이야?”
늘 당차고 밝던 아이샤가 겁먹은 듯한 얼굴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쌍둥이들의 상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쌍둥이들의 상처에 대해 누구보다 공감하고 있었다.
내가 그만큼 쌍둥이들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그러니 진실을 말해주더라도 쌍둥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들아, 일단 자리를 옮길까?”
***
마음 같아서는 다이닝룸에서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라크하가 선대 공작 부부에 관한 얘기를 허락한 건 최측근과 쌍둥이들까지였으니까.
나는 아이샤와 델카인을 데리고 쌍둥이들의 방으로 와 라크하가 무슨 일로 돌아오지 않는지 설명해 주었다.
선대 공작 부부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선뜻 말하기 어려웠는데, 델카인이 나를 대신해서 아이샤에게 알려주었다.
모든 얘기를 들은 아이샤가 고개를 푹 떨구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아무리 아이샤라도 감내하기 힘든 이야기겠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샤의 손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했다.
“아이샤. 라크하가 꼭 돌아온다고 했으니 괜찮을…….”
“나쁜 황제 같으니라고! 그래! 진작 반역을 시도했어야 했는데!”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이샤는…… 음, 그래.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예상과 다른 반응에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한결 놓였다.
“어쩐지 델카인, 그때 네가 날 말리면 안 됐어. 하, 분명 완벽한 반역이 됐었을 텐데…….”
별안간 우중충해진 아이샤가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아이샤의 기분 변화에 얼떨떨하게 바라보는데, 델카인이 내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가까이 오라는 듯 내게 손짓을 했다.
“응? 왜 그래?”
살짝 몸을 숙이자, 델카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수님, 나는 내 방에 가볼 테니까 아이샤를 달래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델카인이 빙긋 웃더니 제 방으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아이샤를 달래달라니. 델카인이 왜 그런 부탁을 한 건지 의아했다.
하지만 델카인이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샤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아이샤, 이대로 자려고?”
“…….”
어쩐 일인지 아이샤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아이샤가 보일 법한 반응은 아니었다.
“아이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아이샤를 부른 그때였다. 벌떡 일어난 아이샤가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요즘 들어 어리광을 부리지 않던 아이샤였다. 방금도 오히려 당당하게 화를 내던 아이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일부러 제 감정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었던 걸까. 가슴이 찡했다.
나는 아이샤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그러자,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던 아이샤가 작은 목소리로 제 속마음을 꺼냈다.
“……언니, 사실 나 무서워.”
“응, 아이샤. 뭐가 무서운 거야?”
“오빠 대신에 그 사람들이 돌아올까 봐. 황제는 오빠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 그게 아닌데…….”
“……괜찮아. 그 사람들이 돌아올 일은 없을 거야.”
선대 공작 부부가 대체 쌍둥이들에게 어떻게 대했길래 그런 걸까.
육중한 돌이 들어앉은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궁금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묻지 못했다. 내가 함부로 물을 수 없는 그들의 아픈 과거였으니까.
엄마와 아빠가 아닌, ‘그 사람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만약 오빠가 안 돌아오면, 내가 황제를 찾아가서 말할 거야.”
나를 끌어안고 있는 아이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사람들이 맨날 나를 이상한 괴물이 있는 방에 가뒀다고.”
“괴물이 있는 방에 가뒀다고……?”
“응, 흑마법을 써서 진득거리는 괴물을 없앨 때까지 안 꺼내줬어. 델카인한테는 흑마법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밥도 제대로 안 줬어.”
나는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선대 공작 부부를 북쪽 숲으로 보낸 건 5년 전이었다.
한참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어야 할 때였을 텐데, 끔찍한 일이 있었다니.
게다가 아이샤가 말하는 건 일부에 불과할 것이었다.
이게 정녕 어린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과거란 말인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 속이 들끓었다.
“만약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응, 믿을게.”
나는 아이샤를 더욱 강하게 안으며 토닥여주었다.
내가 비록 아이샤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온기가 닿길 바라면서.
이 온기가 앞으로 어떤 두려움이 닥쳐와도 이겨낼 용기의 발판이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