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는 사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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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는 사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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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는 사죄
2022.12.19.
<마물의 습격을 당한 피레타 마을, 붉은 머리의 남자는 대체 어떤 원한이 있었던 걸까?>
라크하와 관련된 소식이 아니라는 점에 안심이 됐으나, 그것도 찰나였다.
나는 몇 번이고 호외에 적혀 있는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 마물. 두 가지 단서만으로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데미안.
‘결국, 녹스와 데미안이 정말 마물을 불러 모으기 시작한 거야?’
불안감에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웠다.
호외에 적혀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원작의 후반부 내용이 벌어질 거라는 건 기정사실화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파트라슈에게 물어봐야겠어.’
마물 원정을 다녀온 파트라슈는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마차를 잡은 그때였다.
“메이아 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뒤늦게 덩달아 거리로 나온 레이나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레이나를 두고 디저트 가게에서 나왔다는 걸 자각했다.
“죄송해요! 먼저 가볼게요!”
뒤돌아 레이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 뒤 나는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바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파트라슈를 만나서 호외에 적혀 있던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연무장에는 훈련 중인 기사들이 많아 파트라슈를 찾기 힘들었다.
연무장을 기웃거리고 있자니 나를 알아본 기사가 다가왔다.
“시터님, 무슨 일이십니까?”
“파트라슈 씨는 어디 계신가요?”
“파블로프 단장님께서는 보좌관님을 뵈러 가셨습니다.”
시롬을 만나러 갔다면, 집무실에 있겠구나.
나는 파트라슈의 행방을 알려준 기사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무실 앞에 선 나는 숨을 가다듬은 뒤 노크를 했다.
조금 뒤, 문이 열리며 눈 밑이 시커먼 시롬이 걸어 나왔다. 피로에 잔뜩 찌든 얼굴이었다.
“시터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외출하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방문할 줄은 몰랐는지 시롬은 꽤 당황한 듯했다. 나는 집무실 안을 흘긋거리며 물었다.
“파트라슈 씨랑 같이 계신 거죠?”
“예, 맞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한창 얘기를 나누던 중이라 나중에 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또다. 이번에도 나중에 와달라는 식이야.
지금까지는 시롬이 바빠 보여서 물러났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들고 있던 호외를 시롬의 눈앞에 내밀었다. 물론, 내용은 보이지 않게 접은 상태였다.
호외 내용만 확인하고 시롬이 나를 물릴 수도 있었다.
“방금 막 비스퇴르가에 배포된 호외예요.”
“예? 호외라고요? 자, 잠시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호외가 돌았단 말입니까?! 무슨 내용이랍니까!”
그때 시롬의 등 뒤로 커다란 덩치의 파트라슈가 집무실 문틈을 비집고 나타났다.
파트라슈에게 밀쳐진 시롬은 종이 인형처럼 픽 옆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드디어 집무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장벽이 없어진 나는 안을 가리켰다.
“마침 잘 됐어요. 파트라슈 씨, 호외 내용 때문에 말인데요. 저도 같이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나눠도 될까요?”
“일단 들어오십시오. 시터님을 세워둘 수는 없지요.”
파트라슈는 시롬과 달리 나를 흔쾌히 집무실로 들였다.
시롬도 우선 호외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건지 이번에는 별말이 없었다.
파트라슈가 안내한 자리에 앉은 나는 테이블 위로 호외를 펼쳤다.
그러자 파트라슈와 시롬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은 파트라슈가 심각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결국, 데미안이 일을 저질렀군요.”
“호외에 적혀 있는 사람이 정말 데미안인가요?”
이런 일을 저지를 만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데미안밖에 없긴 했다.
하지만 원작의 후반부의 일이 일어나질 않길 바라는 마음에 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정말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정말 호외에 적힌 내용처럼 데미안의 외양과 비슷한 사람이 마을에 원한이 있어서 마물을 푼 걸 수도 있었다.
“스톡 산맥을 조사하고, 근방의 마을 주민에게 목격담을 듣긴 했습니다.”
“어떤 목격담인가요?”
“어느 날 갑자기 눈 밑에 점이 있고, 머리카락 색이 붉은 남자가 찾아와서는 마물을 다룰 수 있다고 했답니다.”
호외의 본문에도 파트라슈의 말처럼 적혀 있긴 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마물을 다룰 수 있는 건 데미안이 아니라 녹스였다.
‘설마 녹스가 데미안의 몸을 차지한 건가?’
불현듯 그 생각이 든 순간, 위화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녹스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몸은 차지해왔으면서 정작 데미안의 몸은 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노리지 않았던 걸까? 혹은 못 했던 걸까.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의 목숨이 제 목숨과 관련되어 있다면, 데미안의 몸을 차지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손쉽게 다른 사람의 몸을 차지해왔던 것처럼.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전에 우선 지금 녹스가 데미안의 몸을 차지했는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데미안은 녹스와 같이 다니는 게 아니었나요?”
“예, 맞습니다. 안 그래도 붉은 머리 남자와 밀색 머리의 여인이 함께였다고 합니다. 젊은 부부처럼 보였다지 뭡니까.”
“그 사람의 몸에 녹스가 들어가 있었겠군요.”
녹스가 여자의 몸에 들어가 있다면, 충분히 부부처럼 보일 법도 했다.
녹스의 행동거지와 말투, 눈빛이 고혹적이긴 하니까.
녹스가 이번에 북쪽 숲에 숨어들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인의 몸에 들어간 녹스가 기사를 유혹했었다고.
“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두 사람이 다녀간 곳에는 마물 때문에 입던 농작물 피해나 인명 피해가 줄었다고 합니다.”
호외에 적힌 내용과 정반대의 소식이었다.
“그런데 왜 호외에는 피레타 마을을 습격했다고 되어있죠?”
“제가 갔던 곳과 다른 마을이라서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란 말이지. 하지만 이상했다.
다른 마을에는 도움을 줬으면서 왜 정작 피레타 마을은 습격했단 말인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호외의 제목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붉은 머리 남자는 대체 어떤 원한이 있었던 걸까?>
원한이라. 피레타 마을을 습격한 이유는 정말 원한 때문인 걸까?
***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고, 귀를 찌를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처음 보는 형체의 마물이 지나갈 때마다 이리저리 피가 튀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이었다.
그 가운데 데미안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데미안의 곁으로 아이의 손을 잡은 중년의 여인이 달려와 주저앉았다.
“나, 나으리! 제발 제 아이만이라도 살려주세요!”
여인은 아이를 달래면서도 데미안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사람은 그밖에 없다는 듯이.
“나으리께서 마물을 다룰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처절하게 울부짖는 여인의 목소리에 데미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손아귀에는 땀이 송골송골 배어났다.
여인의 말대로였다. 마물을 다룰 수 있다는 명분으로 마을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급하게 도망친 상황에서 숙소를 얻고, 제대로 된 식사를 챙기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물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녹스였지.
쿵! 불길에 휩싸인 건물 하나가 무너졌다.
“으아앙! 엄마!”
중년 여인의 품에 안긴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네 발로 걷는 기괴한 마물의 시선이 여인과 아이를 향했다.
데미안은 초조한 눈으로 마을의 광장에 앉아 있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녹스가 씩 웃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어때, 나 잘했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데미안은 자조했다. 그저 피레타 마을의 주민 한 명이 퍼트린 소문이 화근이었다.
-저놈들, 마물과 한 패일지도 몰라. 사람이 마물을 부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피레타 마을 사람들의 의심은 점차 커졌고, 녹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배신은 죽음뿐이지. 그래야 다들 정신을 차리더라고.
데미안은 여인이 붙잡고 있는 다리를 뺀 뒤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중년 여인이 공포와 절망으로 물든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일렁이는 불길처럼 느껴졌다.
“……죄송해요.”
“악마! 이 악마 같은 놈 같으니라고! 당신 같은 놈은 저주를 받을 거야!”
자신을 덮쳐드는 불같은 외침에 데미안은 뒤돌아 어둑한 길목으로 숨어들었다.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났는데, 여인의 목소리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 속이 울렁거려 토기를 느낀 데미안은 구역질했다.
“우욱.”
데미안은 벽을 잡고 주저앉았다. 데미안의 볼 위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선대 공작 부부를 구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잔혹한 짓을 저질렀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학살의 현장이었다. 게다가 며칠 전까지 즐겁게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왜 이렇게 된 거야.”
북쪽 숲을 떠난 이후로 녹스를 말리는 데 분명 성과가 있는 줄 알았다.
비스퇴르가에서 숨어지낼 때와 달리 녹스가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냈었으니까.
어쩌면 이대로 평화롭게 마무리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엿보았다.
하지만, 그건 전부 제 착각이었다.
“……내가 바라던 건 이게 아니었어.”
그저 가족을 갖고 싶을 뿐이었다. 외로워서, 평범해지고 싶어서.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가족도, 평범함도, 그리고 충족감도.
그때였다. 바람 같은 기운이 훅 불더니 불길들이 단번에 꺼지며 진득한 어둠이 찾아왔다.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데미안은 귀를 막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이 상황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데미안은 모든 게 끝날 때까지 홀로 중얼중얼 뇌까렸다.
“잘못했어요.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는 사죄였다.
***
서쪽 탑은 흉악범들보다는 일시적으로 혐의가 있는 귀족들을 가두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에 달린 철창을 제외하고는 감옥치고 준수했다.
하지만 벽에 붙어 있는 횃불 몇 개로 빛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 음산하게 느껴졌다.
절그럭, 절그럭.
어디선가 들려오는 쇠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에 라크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뒤, 횃불 아래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열쇠를 들고 있는 기사를 보며 라크하는 조소를 흘렸다.
“그제야 내 말이 사실인 게 증명되었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기사는 그저 제 할 말만 하며 철창에 달린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넣어 문을 열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라크하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찌뿌둥한 몸을 풀며 기사의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날 늦게 찾아온 것 같은데, 그새 녹스나 데미안이 무슨 일이라도 꾸민 건 아니겠지?”
“…….”
묵묵부답인 기사를 보며 라크하는 그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제국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기사인 게 틀림없었다.
대충 기사의 특징을 파악한 라크하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이런, 내 충고를 무시한 탓에 혹시 벌써 제국 수도가 습격당했나 봐.”
라크하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수도가 그딴 마물들에게 그렇게 쉽게 습격당할 것 같습니까!”
“다행히 그건 아닌가 보군. 그쪽이 대답해주지 않길래 그냥 해 본 소리야.”
라크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했다.
라크하에게 중요한 건 메이아와 쌍둥이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기사는 ‘녹스’가 아닌 ‘그딴 마물들’이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기어코 메이아가 말했던 일이 일어날 거란 것과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