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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행복해지기 위해서 (118/136)


118. 행복해지기 위해서
2022.12.16.


황궁으로 떠났던 라크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의 사용인들은 변함없이 각자 제 할 일을 하며 지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공백이 생기면, 떠오르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그만큼 내 마음속에서 라크하라는 사람의 빈자리는 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쌍둥이들과 있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는 점이랄까.

문제는 밤이었다. 밤만 되면, 가슴 한구석이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시렸다.


“……보고 싶다.”

라크하는 주로 내가 잠들고 나서야 방에 왔으니 평소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데.

아예 오지 않을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더 마음이 적적하고 허전했다.

매번 겨우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확인하게 되는 건 옆자리였다.

혹시나 새벽 사이에 라크하가 돌아오진 않았을까 싶어서.

그러고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잘 잤어?”라고 묻진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며칠이 지난 오늘도 그는 없었다.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렇게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일일 줄이야.

라크하가 어떻게든 돌아온다고 했으니 믿고 기다리고 있긴 했지만, 마음처럼 불안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라크하는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 건의 피의자로 황궁으로 간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아침마다 확인하는 게 한 가지 더 생겼다. 바로, 가십지와 소식지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리타가 내게 가십지와 소식지를 챙겨주었다.


“요즘 황궁에서 전체적으로 큰 행사를 자제하라고 권고하면서 크게 주목할 법한 내용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전부 사업 관련 내용이거나, 추측성 글뿐이네요…….”

나는 리타의 말에 공감하며 보고 있던 것들을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라크하와 관련된 기사가 뜰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큼 감감무소식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해야 할지.’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 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아인티아 가문이 타격을 입을 테니까.

나는 리타가 가져다준 쿠키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다지 입맛이 없었다.

리타가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공작님의 소식을 살피시는 거라면…… 먼저 연락을 해 보시는 게 어때요?”

“아뇨, 괜찮아요. 제가 연락하면 신경 쓰일 거예요.”

사실 연락을 못 하는 거지만. 차마 리타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라크하가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 건으로 황궁으로 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의 최측근뿐이었다.

이를테면, 시롬과 파트라슈 정도?


“아, 그렇지. 그럼 보좌관님께 여쭤보는 건 어떠세요? 보좌관님이시라면 공작님의 소식에 대해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나도 처음에는 리타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시롬을 찾아갔다. 하지만…….


“라크하의 업무를 홀로 떠안게 되어서 그런지 엄청 바빠 보이시더라고요.”

찾아갈 때마다 다음에 와주면 안 되냐는 대답만 받고 방으로 돌아왔지.

리타의 말마따나 직접 연락해서 안부를 묻고 확인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 않을 텐데.

그래도 조금 위안이 되는 점은 있었다. 아직 남은 방법이 한 가지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레이나 님께서 3시에 만나자고 했었던가요?”

“네, 비스퇴르가 광장 부근에 있는 리프레 디저트 가게에서 뵙자고 하셨어요.”

레이나는 주기적으로 입궁한다고 했으니 라크하의 소식을 들은 게 있을지도 몰랐다.

대신, 이번에야말로 나 역시 데미안의 소식을 말해줘야겠지. 데미안이 배신했다고.

그래서일까. 마음도, 머릿속도 복잡했다.


‘아니야, 어차피 이건 레이나가 알아야 할 소식이잖아.’

하지만 합리화를 하는 동안에만 잠시 괜찮을 뿐이었다.

결국 다시 생각이 많아지는 탓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터님, 어디 가시려고요?”

“네, 쌍둥이들한테 미리 가보려고요.”

쌍둥이들의 검술 수업까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쌍둥이들과 함께 있으면 생각을 비울 수 있으니까.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리타를 향해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미소 지은 뒤 발걸음을 옮겼다.


 

***



“나 방에서 쉴래. 검술 수업이 있는 날은 너무 피곤해.”

“형수님, 나도 피곤해서 아이샤랑 같이 먼저 들어가 볼게.”

아이샤와 델카인이 하품을 쩍 하더니 눈을 비비적거렸다.


“응, 많이 피곤하지?”

쌍둥이들은 검술 수업이 있는 날만큼은 피곤하다며 각자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점을 생각하고 오늘 레이나와 약속을 잡은 거였다.


‘레이나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3시였으니까…… 저녁을 먹기 전까지는 돌아와야겠다.’

라크하가 없는 지금, 쌍둥이들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시간을 대충 계산한 나는 쌍둥이들과 마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저녁 식사 때 다이닝룸에서 보자. 들어가서 낮잠도 자고, 푹 쉬어.”

“응, 언니 나중에 봐.”

쌍둥이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창문 밖으로 얼핏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어라?”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정문 앞에서 아인티아의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 남자는 분명 파트라슈였다.

나는 얼떨떨해서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최근에 얼핏 파트라슈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마물과 관련된 일로 원정을 떠났다고 했던 것 같은데…….’

쌍둥이들의 검술 수업을 파트라슈 대신 다른 기사가 담당하면서 알게 된 소식이었다.

마물에 대한 조사가 끝난 걸까?

앞으로 있을 일을 위해서라도 레이나를 만나고 온 뒤에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먼저 디저트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나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해맑은 얼굴로 반겨 주었다.


“메이아 님과 같이 여기 디저트 가게에 와 보고 싶었는데, 너무 좋아요.”

하지만 암울한 소식을 전달할 생각에 나는 레이나를 따라 밝게 웃지 못했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나는 금세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디저트 가게에 와 본 건 처음이라. 여기 어떤 메뉴가 괜찮나요?”

“음, 타르트도 괜찮고, 케이크도 좋아요. 아, 그렇지. 쿠키도 맛있더라고요!”

그건…… 전부 다 맛있다는 말 아니야?

결국, 메뉴판을 훑어보던 나는 레이나가 좋아할 것 같은 메뉴 위주로 골랐다.

어차피 레이나와 나눌 대화 때문이라도 그다지 입맛이 없었다. 아니, 없는 줄 알았다.


“와, 이 케이크 왜 이렇게 맛있어요?”

하지만 맛있는 거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제가 괜히 이 집에 오자고 한 게 아니라니까요. 나중에 꼭 공작님과도 같이 오셔요.”

순간 ‘공작님’이란 단어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잠깐, 지금 레이나랑 화기애애하게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나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레이나에게 본론을 꺼냈다.


“레이나 님. 혹시 라크하와 관련된 소식을 들으신 게 있나요?”

“으음…… 전혀요.”

이렇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을 수도 있나? 큰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

티끌만큼도 들려오지 않는 소식에 불안감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민에 빠진 나를 보며 레이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공작님에 대해선 왜 물으시는 거예요?”

“아아…… 공작님께서 출타하셨는데, 소식이 없어서요. 어떻게든 소식을 하나라도 더 듣고 싶지 뭐예요.”

나는 정확한 사정을 말하지 않고 둘러 대답했다.

레이나가 믿을 만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건 쉽게 말할 일이 아니었다. 라크하의 개인적인 사정이었으니까.


“어머나, 그런 일이…….”

레이나는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공작님 소식을 들으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해주신다니. 감사해요.”

레이나가 바로 알려준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려나.

속이 답답해서 괜히 차만 홀짝이는데, 머뭇거리는 레이나가 눈에 띄었다.

나는 뒤늦게 레이나에게 데미안의 소식을 전달해 주어야 하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데미안은…… 녹스를 회유하지 못했어요.”

“……역시 그렇죠?”

레이나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제 앞에 있는 찻잔을 꽉 쥐었다.


“사실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어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곳곳에 실종자가 나온다는 말이 들려오긴 하니까…….”

레이나의 말마따나 계속해서 실종자가 나오고 있었다.

그게 녹스가 활개를 치고 다니고, 데미안이 살아 있다는 방증이었다.


“기분이 참 이상하더라고요. 실종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데미안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라니.”

죄책감에 일그러진 레이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했다.

아직 레이나가 들으면 충격받을 소식이 더 있었다.

데미안이 녹스와 손을 잡았고, 황실을 습격하기로 했다는 것까지.

중요한 얘기인지라 이걸 얘기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도 제 동생의 일이니 알려주는 게 맞긴 하겠지……?

레이나는 어떻게든 데미안과 관련된 소식이라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했으니까.

나는 마음을 가다듬은 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레이나 님. 사실 아직 말 못 한 일이 하나 더 있어요.”

“아뇨,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방금 말씀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뜻밖의 대답에 당황스러웠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동안 생각을 많이 해 봤거든요. 이제는 제가 뭘 하나라도 더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더라고요.”

레이나의 말투는 무덤덤했으나 떨리는 손끝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고개를 떨군 레이나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는 더 이상 개입하지 않을게요. 제가 개입할수록 메이아 님과 공작님만 힘들게 만드는 거였는데…… 죄송해요.”

데미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분명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텐데.

레이나가 몇십 년 만에 만난 동생이었다. 그런데,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사실을 알기에 속이 착잡했다. 나는 레이나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죄송해하지 않아도 돼요.”

“아뇨, 제가 지금까지 이기적이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으음…… 그럼 저도 죄송해해야겠네요. 저도 이기적인 사람이니까요.”

“전혀요! 메이아 님만큼 다정한 사람은 없어요.”

“글쎄요.”

내가 원작대로 움직였다면, 레이나가 불행했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나는 신전에서 도망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샤와 델카인의 시터가 됐을 것이고, 쌍둥이들과 라크하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이아 님은 매번 저를 배려해주시고…….”

“이기적이면 뭐 어때요.”

우물쭈물하는 레이나를 보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사람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행복은 가만히 있다고 오는 게 아니라, 쟁취하는 거니까.

그렇기에 나중에 찾아올 행복이 더 빛이 나는 게 아니겠는가.


“어쨌든, 그러니까 죄송해하지 말아요. 알겠죠?”

“메이아 니임…… 이러니까 제가 매번 메이아 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요!”

“어어! 자, 잠시만요! 레이나 님! 드레스에 크림 묻어요!”

“헉! 어, 어디요?”

별안간 나를 끌어안은 레이나를 말리며 드레스를 살피던 때였다.


“호외요! 호외!”

워낙 큰 목소리여서 곧바로 시선이 나와 레이나 옆에 있는 큰 창문으로 돌아갔다.

한 소년이 지나가며 하늘 위로 종잇조각이 흩뿌려졌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종잇조각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 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피어났다.

어째서인지 매일 아침 소식지와 가십지를 뒤적이는 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메이아 님?”

내 돌발 행동에 레이나가 당황한 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내 관심 밖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디저트 가게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호외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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