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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나 역시 그대와 같아 (117/136)


117. 나 역시 그대와 같아
2022.12.12.


소환장에 적힌 시간에 맞춰 라크하가 입궁할 채비를 마치고서 집무실 문을 나섰다.

아이샤는 나를 따라 라크하를 배웅하러 나가려는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하지만 본관 홀에 도착하자마자 델카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샤를 붙잡았다.


“아이샤, 우리는 이만 돌아가자.”

“왜? 나는 언니랑 같이 오빠가 갈 때까지 배웅해주고 싶은데?”

“오늘 정원사가 온실 정원에 희귀한 꽃을 들여온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뭐? 진짜? 그럼 가야지! 늦으면 정원사가 아무 데나 심어버리잖아!”

어떻게든 함께 배웅하러 나가려던 아이샤는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바꾸었다.


“오빠, 안녕! 잘 다녀와!”

아이샤는 인사를 한 뒤 단숨에 온실 정원이 있는 방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형, 무사히 돌아와. 둘이 얘기도 잘 하고.”

델카인도 나와 라크하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

본관 홀에서 인사를 나누는 걸 마지막으로 쌍둥이들은 떠나갔다. 결국, 라크하를 배웅해주기 위해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얘들아?”

엉겁결에 라크하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얼떨떨했다.

하지만 라크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나를 이끌었다.


“델카인은 처음부터 여기서 인사를 하고 갈 생각이었을 거야.”

정말 나와 라크하가 따로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었던 걸까?

하지만 델카인이 마지막에 했던 인사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무사히 돌아오라고 했던 거지?’

선대 공작 부부와 관련된 일인지라 라크하는 쌍둥이들에게 자세한 정황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타지로 갈 일이 있어 잠시 저택을 비운다고 했을 뿐이었지.


“델카인이 선대 공작 부부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눈치를 챈 걸까요?”

“눈치가 빠른 델카인이라면 그럴 확률이 높지. 최근에 북쪽 숲을 다녀오기도 했으니까.”

“……그렇긴 하네요.”

그제야 델카인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아이샤와 달리 델카인은 북쪽 숲에 선대 공작 부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여러 가지 물어보고 싶기도 하고, 제 추측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을 텐데.

라크하가 곤란해하는 얘기인 걸 알고,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혹시나 델카인이 물으면 사실대로 얘기를 해줘도 돼.”

“네, 제가 얘기를 잘 해볼게요.”

라크하가 걱정하지 않도록 자신 있게 말했으나, 사실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델카인이 어른스럽고 눈치가 빠른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린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른인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얘기를 정말로 델카인이 모두 감내할 수 있을지.

그걸 감내하더라도 모든 진실을 알고 난 후에 받을 상처를 내가 온전히 보듬어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 최대한 빠르게 다녀올 테니.”

라크하가 복잡한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내 손을 거머쥐며 말했다.

맞닿은 손으로 느껴지는 온기를 통해 라크하가 나를 위로해주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괜찮다고, 모두 잘될 거라고. 나는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의 위로를 받으며 우리는 천천히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차는 이미 라크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보내고 싶지 않아…….’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라크하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은 자꾸만 요동쳤고, 머릿속에서는 그를 붙잡고 싶다는 욕심만 떠올랐다.


“이제 가 봐야겠어.”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걸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저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까지의 거리는 너무나도 짧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이별에 마음은 이미 저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런 표정과 마음으로 라크하를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라크하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델카인과 아이샤를 잘 부탁해.”

고개를 끄덕인 라크하가 조심스럽게 맞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진짜로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당분간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데…….’

어째서 가슴이 울컥거리고,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라크하는 모든 걸 해결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가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처 없애지 못한 불안감은 계속해서 나를 보챘다.

혹시나 라크하에게 무슨 일이 생기려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나중에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그래서일까. 조금이라도 더 라크하와 함께 있고 싶었다.


“혹시 황궁 앞까지만이라도 같이 가도 될까요?”

그 말을 꺼내면서도 이래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 있던 말을 꺼내고 나니 속은 후련했다.


“뭐?”

라크하가 당황한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내가 그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대만 괜찮다면, 같이 가도 좋지만…… 혼자 돌아와야 할 텐데, 괜찮겠어?”

이게 내 욕심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어서요.”

지금 보지 못하면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할지 모르는 거잖아.

이대로 후회하면서 마음 졸이고 싶지는 않았다. 황궁에 들어갈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나는 라크하의 손을 붙잡으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나 역시 그대와 같아.”

라크하가 이내 부드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내 손등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건 허락의 표시임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도 그렇다는 애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

황궁 앞에 도착해 메이아와 인사를 나눈 라크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황제의 알현실로 향했다.

라크하의 등 뒤로 과할 정도로 많은 수의 황실 기사단이 따라붙었다.

얼핏 보면 호위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포위하거나 경계를 하는 행동에 가까웠다.

긴장으로 굳은 황실 기사단을 보고 라크하는 실소를 흘렸다.

아인티아에 대한 황실의 반응은 늘 한결같았다.

적을 대하는 듯한 저 눈빛과 태도.

지금까지 아인티아가 저지른 행실을 생각하면 이해는 됐다.

아인티아 가문은 호시탐탐 흑마법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노렸으니까. 하지만 늘 받아왔던 거라도 그런 눈빛이 달갑지는 않았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현실 앞에 서 있던 시종장이 신분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화려한 응접실 안, 키네스가 금으로 장식된 황좌에 앉아 있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 건으로 소환하면 거부할 줄 알았건만, 뜻밖이군.”

의외라는 말과 달리 키네스의 목소리는 여유로움이 물씬 묻어났다.

지금까지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 사건에 라크하가 개입되어 있을 거라는 심증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북쪽 숲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기사들에게 들은 보고로 심증은 확증이 되었다.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에도 슬퍼하지 않던 라크하와 쌍둥이들만 봐도 수상했으니까.

선대 공작은 제 자식들을 아끼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자신을 아껴줬던 부모가 실종됐다는 소식에 어찌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아인티아 가문은 빠르게 선대 공작의 공석을 채우며 체계를 잡아갔다.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이 예견된 일이었던 것처럼.

키네스는 긴 다리를 꼰 채 발끝을 까닥거렸다.


“공작이 내 명으로 북쪽 숲을 수색하러 온 기사들을 쫓아냈다고 하던데.”

“아인티아를 무시하는 무례한 언행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기사단의 수색에 차질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 덕분에 공작이 왜 황명을 어겨가면서 내 기사들을 물렸는지 알 것 같더군.”

키네스는 자애롭게 말하며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실종된 줄 알았던 선대 공작 부부가 아인티아 소유의 별장에 있었으니 말이야.”

 

 
사실 키네스에게 선대 공작 부부의 실종은 희소식이었다. 선대 공작은 귀족파의 수장으로서 매번 황가를 쥐락펴락하던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신력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약해지고 있었으나, 흑마법은 정반대였다.

하필 라크하는 역대 아인티아 혈통 중에서 흑마법을 다루는 데 특출났던 자다.

신력과 흑마법이 균형이 무너진 상황은 황가의 기반을 흔드는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영토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찾아온 지금은 더더욱.

그리고 거짓말처럼 균형을 맞출 기회가 찾아왔다.


“선대 공작 부부에게 흑마법을 쓴 흔적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사실인가?”

“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라크하의 대답에 키네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흑마법을 쓴 사실을 부정하며 시간을 끌 거라 생각했는데, 망설임 없이 인정할 줄이야.

이건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대답이었다.


‘자포자기하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이내 키네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라크하라면 메이아를 위해서라도 쉽게 포기할 리가 없었다.

분명 다른 속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개인적인 사유로 흑마법을 쓴 사실은 중죄에 해당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단, 제국을 위한 일은 제외한다. 제국법전에 기재되어 있는 특례법이지 않습니까.”

“공작이 저지른 일이 제국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키네스는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키네스와 라크하 사이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흘렀다.


“선대 공작은 흑마법의 시대를 꾀했던 사람입니다.”

“흑마법사인 공작 역시 선대 공작과 다를 것 같지 않다만. 차라리 가주의 자리가 탐났다고 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겠군.”

“폐하께서 저를 신뢰하지 못하실 법도 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공작이 무언가를 제안할 처지가 아닐 텐데.”

키네스는 헛웃음을 터트렸으나, 라크하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키네스에게 내걸 제안. 그것이야말로 라크하가 키네스의 소환에 순순히 임한 이유였다.

키네스가 이미 선대 공작 부부에 대해 알게 된 이상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제국을 위해 쓴 흑마법이라고 둘러대도 결국은 그걸 증명할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시간 끌기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을 끌 때가 아니었다. 곧 닥쳐올 일들을 생각해서라도.

황실을 습격하겠다고 했던 녹스의 선포, 그리고 마물 떼가 황실을 피로 물들인다던 테리투스의 예언까지.

앞으로 다가올 일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일 덕분에 더 효과적으로 거래를 할 기회가 온 것도 사실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해서라도 제 제안을 들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는군.”

키네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라크하가 은근히 자신이 불려온 이유를 흐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죄를 지어서 여기 불려온 마당에 저렇게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마뜩잖았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기에 아인티아 공작이 자신에게 ‘제안’을 내걸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키네스는 꽤 솔깃한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서 허락의 표시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라크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녹스가 마물 떼를 끌고 와 황실을 습격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생각지 못한 발언에 검지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던 키네스의 손짓이 멈추었다.

라크하는 키네스의 작은 반응도 놓치지 않았다. 라크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제 의견을 피력했다.


“마물도, 녹스도 제가 책임지고 척결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인티아 가문은 흑마법을 포기할 것을 맹약하겠습니다.”

“뭐?”

키네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키네스에게 무척이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 사실을 조건을 내건 라크하 역시 알고 있었다.

아인티아는 지금까지 절대 흑마법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흑마법이야말로 아인티아가 황가와 대적할 수 있었던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물과 녹스의 척결, 그리고 아인티아의 흑마법이 더는 계승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모든 건 메이아와 쌍둥이들을 위해서라도 라크하가 최종적으로 이루려고 했던 목표였다.

녹스의 존재도, 선대 공작 부부를 쫓아냈던 것도 모두 흑마법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메이아가 위험해졌고, 쌍둥이들과 라크하는 불행했던 유년 시절을 겪었다.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이 굴레를 끊어내야 했다.

그리고 라크하는 메이아와 쌍둥이들을 위해 모든 걸 책임지고 끊어낼 자신이 있었다.


“녹스와 마물을 척결하다 못해 흑마법을 포기하겠다니. 공작이 지금 무슨 제안을 한 건지 알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키네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예상 밖의 일에 섣불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니, 단번에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라크하가 한 말이 사실인지 먼저 파악해볼 필요가 있었다.

결국, 키네스는 라크하의 뒤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기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전까지 공작을 서쪽 탑으로 압송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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