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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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사랑해요
2022.12.09.
고개를 든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라크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미, 미안해요. 라크하가 저를 피하니까…….”
“알겠으니…… 이만 내려오는 게 어떨까. 너무 자극적이어서.”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린 라크하가 긴 한숨을 내뱉으며 한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나는 라크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내렸다. 물을 쏟아 잠옷이 젖어 있는 위치였다.
“대체 뭐가 자극적인 건데요?”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나서야 물에 푹 젖어 딱 달라붙은 잠옷의 상태가 눈에 띄었다.
잠옷이 물에 푹 젖어 딱 달라붙어 있었는데, 하필 위치가…….
“꺄악……!”
나는 황급히 양팔로 내 가슴을 가렸다. 그냥 찝찝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탓에 간과하고 있었다.
하필 하얀 잠옷이어서 심지어 속살이 비치고 있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갑작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부끄러움이 한순간에 밀려왔다.
“오, 옷이 비치는 거였으면, 진작 말씀해주셨어야죠!”
전부 내가 무감해서 일어난 사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라크하를 탓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라크하는 여전히 내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최근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그대가 부끄러워할까 봐.”
“지, 지금 최근에 있었던 일까지 생각하신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 추궁에 라크하가 눈을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서둘러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가렸다.
“보, 보지 마요! 매번 라크하만 제 몸을 보고, 이게 대체 무슨 봉변이냐고요! 억울하고 창피해 죽겠어요.”
당혹감으로 물든 머릿속은 이미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통제를 벗어난 입은 여과 없이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잠시, 나만 그대의 몸을 본 게 억울한 거라고?”
“당연하죠. 그럼 안 억울하겠어요?”
스스로도 내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던 때였다.
라크하가 제 눈을 가리고 있는 내 손목을 붙들고 아래로 내렸다. 내 손은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쭉 따라 내려갔다.
내 손끝이 닿은 곳은 이미 두어 개 정도 풀려 있는 라크하의 셔츠 단추였다.
“그럼 그대가 억울하지 않게 만들면 되겠군.”
달콤한 라크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악마가 있다면 이런 목소리로 나를 유혹하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게 멍하니 라크하를 내려다보았다.
“…….”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대의 억울함이 풀릴 때까지.”
내가 석고상처럼 가만히 굳어 있자 라크하가 겹치고 있던 손을 움직여 단추를 풀어냈다.
톡, 톡. 단추가 하나씩 풀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에 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상황 파악이 빠르게 되지 않아 정신이 멍했다.
열리는 단추 사이로 오목조목 자리 잡은 근육이 보였다. 조각 같은 그의 몸이 드러날 때마다 긴장이 되어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굳어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라크하가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내 손바닥에 입을 살며시 맞추며 나를 살펴보았다.
“싫으면, 언제든 거절해도 돼.”
내 의사를 묻는 라크하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니 지금의 상황까지 왔지만, 사실 싫지 않았다.
그저 낯설고 어색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을 뿐이었지.
그리고 언제까지 라크하와 아슬아슬한 상황을 얼버무리며 넘기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도 라크하가 좋고, 그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까.
나는 라크하의 뺨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그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아뇨, 좋아요.”
그 순간, 라크하의 눈동자가 짙은 열망으로 끓어올랐다. 나를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것 같은 시선에 귓가가 절로 달아올랐다.
“내가 늘 바라던 바야.”
나직이 속삭인 라크하가 내 어깨를 잡더니 나를 침대에 쓰러트렸다. 어느새 내가 침대에 눕고, 라크하가 내 위에 올라와 있었다.
라크하가 눈꼬리를 휘며 짙게 웃더니 내 손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메이아.”
따스한 기운을 담은 음성에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나를 향한 라크하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잔잔하게 일렁이던 호수 위로 커다란 돌을 던진 듯한 기분이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고, 넘쳐흐르는 듯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저도 사랑해요. 라크하.”
내 대답을 듣고 기분 좋게 미소 지은 라크하가 상체를 숙여 몸을 포개었다.
물에 젖은 옷 때문에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래서일까. 몸이 맞닿았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듯했다.
서로의 콧날이 미끄러지듯 교차하고, 입술이 맞닿았다. 여린 살결을 훑는 감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더욱 깊이 파고들며 제 열기를 가득 채웠다.
온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보라색 눈동자에 스며든 짙은 욕망을 본 걸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에 드리워진 따스한 햇볕. 방안을 감도는 온화한 분위기.
눈을 몽롱하게 깜빡이고 있자니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잘 잤어?”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라크하를 바라보려고 몸을 돌리던 그 순간, 내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악!”
허리에서 전류가 흐르듯이 짜릿한 통증이 무엇 때문인지는 잘 알았지만, 그래도 적응이 되지 않는 고통이었다.
“으으…….”
나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침대 위로 엎어졌다.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그런 걸까. 근육통이 만만치 않았다.
“몸은 어때? 몸이 많이 안 좋아?”
라크하가 내 어깨에 짧게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다정하게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어젯밤,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던 손이었다.
이 남자는 지치지도 않는 걸까. 물론, 황홀했던 밤이었긴 했지만…….
어젯밤의 일을 또다시 반복했다간 오늘 온종일 움직이지 못할 거야.
라크하의 손을 가볍게 붙들어 막은 나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욱신거려요.”
“오늘은 방에서만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라크하는요?”
“오늘 그대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급한 일을 끝낸 참이라.”
“정말요?!”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에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또다시 허리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에 나는 침대에 팔을 세운 그대로 굳고 말았다.
“……메이아, 괜찮아?”
“저, 저는 괜찮아요.”
나는 심호흡하며 최대한 고통을 가라앉혔다. 최근 업무가 많아서 부쩍 바빠진 라크하가 하루를 통째로 비워서 시간을 낸 적은 거의 없었다.
그건 즉, 오늘만큼은 힘을 내서 라크하와 완벽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말이지!
나는 최선을 다해 몸을 돌리곤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잘 없는 기회잖아요.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오늘 라크하와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해야 할 일?”
궁금증과 은근한 기대를 담은 눈이 나에게 향했다.
“네, 쌍둥이들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야죠!”
북쪽 숲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라크하가 또 자리를 비우면 쌍둥이들이 서운해할 테니까.
그런데 왜 라크하의 표정이 김빠진 것처럼 보이는 건지.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대의 말대로 쌍둥이들과 시간을 보내야지.”
어색한 미소를 지은 라크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라크하도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니까. 마지막까지도 쌍둥이들에 대한 마음이 큰 라크하를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
라크하가 마사지를 해주고, 스트레칭을 했더니 아침보다는 근육통이 나아졌다.
한결 몸이 괜찮아진 나는 라크하와 함께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솜씨는 좋지 않지만, 쌍둥이들과 라크하가 좋아했던 음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주방으로 가는 길에 창문 밖을 흘긋거리자니 라크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뭐가 있어?”
“아뇨, 그냥 날씨가 좋아서요.”
사실 다른 걸 확인한 거지만. 나는 일부러 숨겼다. 라크하를 놀라게 해주고 싶으니까.
종종 주방에 온 적이 있었던 나는 주방장과 인사를 나눈 뒤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라크하는 옆에 앉혀두려고 했다. 하지만 라크하는 내가 칼을 들자마자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섰다.
“생각보다 잘하시는데요?”
“주기적으로 신전 주변에 있는 오두막집에 갈 때마다 쌍둥이들에게 음식을 해줬으니까.”
나는 처음 라크하를 만난 장소에서 먹었던 수프를 떠올렸다. 하긴 맛은 꽤 있었지.
“거긴 왜 매번 쌍둥이들과 함께 가셨던 거예요?”
“내가 며칠 자리를 비울 때마다 쌍둥이들이 심술을 부렸었거든. 고용된 시터를 괴롭히거나, 시롬을 못살게 굴거나.”
이전에 얼핏 시터를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쌍둥이들의 행동이 이해됐지만, 쌍둥이들은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편이었다.
“저도 제 능력이 아니었으면, 쌍둥이들과 친해지는 데 오래 걸렸을지도 몰라요.”
“글쎄, 내 생각은 달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쌍둥이들과 친해지지 못했을 거야. 그대였기에 친해진 거지.”
희미한 미소를 지은 라크하가 정갈하게 썬 채소를 담은 접시를 내밀었다. 반듯하게 썬 채소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샤가 내가 요리를 해준 기점부터 내게 관심을 보였었지.
델카인은 능력이 통하지 않는 아이인데도, 점점 나에게 마음을 열었고.
내가 노력할 때마다, 내가 손을 뻗을 때마다 쌍둥이들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러네요.”
“그대가 온 이후로 웃는 일이 많아졌어. 나도, 쌍둥이들도.”
“오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는 오는 길에 창문 밖으로 봤던 걸 떠올리며 활짝 웃었다.
“다르아 꽃나무가 만개했더라고요.”
오늘 라크하에게도, 쌍둥이들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다.
***
“너무 맛있었어!”
뒤로 벌러덩 누운 아이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제 배를 통통 두드렸다. 옆에 있던 델카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난 형수님이 해준 요리가 제일 맛있더라.”
“양이 부족하진 않았어?”
“응, 충분했어. 배불러.”
“이리 와. 언니랑 그만 얘기하고, 너도 누워.”
아이샤가 델카인을 뒤로 당겨 제 옆에 눕혔다. 아직도 델카인한테 질투가 나는 걸까. 그런 아이샤가 귀여워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도 눕자! 여긴 꼭 누워야 하는 곳이라고.”
“어디 한 번 누워볼까?”
아이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분명 이유가 있겠지. 나는 거절하지 않고 아이샤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속에 수놓아진 다르아 꽃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정말이네. 정말 예쁘다, 아이샤.”
“그치? 다르아 꽃은 빠르게 지는 대신에 참 예뻐.”
아이샤가 왜 매번 다르아 꽃나무 아래에서 밥을 먹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새하얀 다르아 꽃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시선 끝에 라크하가 보였다.
이렇게 예쁘게 아름다운 광경을 우리 셋이서만 보기는 아깝지.
나는 라크하를 바라보며 내 옆을 두드렸다.
“라크하도 앉아 있지 말고 같이 누워요.”
“맞아, 형도 얼른 형수님 옆에 눕자!”
“오빠는 안 누울걸?”
아이샤의 예상과 달리 라크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옆에 누웠다. 그 모습에 아이샤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같이 눕자고 해도 안 누웠잖아!”
“오늘따라 눕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형이 그럴 만도 하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마법과도 같다잖아.”
“델카인, 너는 조용히 해!”
쌍둥이들과 라크하는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티격태격했다.
힘이 넘치고 활기찬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할까. 행복해진다고 해야 할까.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와서 키득거리는데, 라크하와 눈이 마주쳤다.
라크하도 지금 상황이 싫지는 않은지 얼핏 웃고 있었다.
따스한 초여름날, 행복한 순간이었다.